좋은만남교회

2016.07.24 16:31

2016년 7월 24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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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0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2. 공동식사 후에 성서대학 2016년 여름 계절학기 마지막 강의가 열립니다. "예수의 믿음인가, 예수에 대한 믿음인가?"라는 주제로 공부하겠습니다. 강의 후에는 이번 학기를 총정리하는 교제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3.  수요성서대학은 종강하였습니다. 수요일 모임은 다음 개강 때까지 열리지 않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4.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는  8월 1-2일에, 청소년 수련회는 8월 1-3일에 열립니다.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내일(25일)까지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5. 장년부 공동휴가 및 수련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일정, 장소 및 내용에 관한 제안을 받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6. 주보의 매일 성서읽기는 이번주로 종료합니다. 그동안 통독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 자발적으로 성서읽기에 정진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목회서신

이번에 성서대학을 진행하면서 참석하신 분들과 신앙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지금 신앙생활에 만족하는지, 문제가 있는지, 원하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 우리교회 교우들은 대부분 장로교회에 다니시다 오신 분들이더군요. 우리교회에서 뭔가 아쉬운 부분들로 말씀하시는 것들이 장로교회의 뜨겁게 소리치면서 통성기도하는 분위기 같은 열광적인 부분과 다양한 선교회(전도회)와 기관 활동 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선교회 활동은 우리 인원이 너무 적어서 조직하지 못하는 것이니… 좀더 열심히 전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ㅎㅎ 열광적인 뜨거운 분위기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과거에 장로교회에서는 통성기도 많이 하시고 철야기도도 하셨었는데 우리교회는 그런 분위기는 뭔가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전에는 많이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통성기도가 별로 좋은 기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는 분도 있습니다. 네, 통성기도가 외국에서는 '코리안 스타일' 기도로 인기가 높다지만 저도 개인적으로는 불편합니다.

문제는 '통성기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전심을 다해 기도하고 있느냐'일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어머니)와의 대화라고 합니다. 대화가 없는 가정은 문제가 있는 가정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어버이신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기도가 뭔가 달라고 하는 내용으로만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건강, 사업, 성공, 진학 등등을 위해서 많이 기도합니다만 만약 내 자녀와 나누는 대화의 전부가 이것저것 사달라는 것이라면 저는 매우 섭섭하고 아이를 잘 못 키운 것 같아 마음이 아플 겁니다. 감사한 것들,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들, 우리 이웃의 이야기들, 살면서 느낀 것들도 기도의 중요한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 교우들은 매우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기도와 성서 통독 등의 기본적인 것들을 잘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시간을 들이는 만큼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시간을 투자하시면 좋겠습니다. 꼭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열댓 가지의 기도제목을 놓고 온몸기도(절기도)를 하는 것도 좋겠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심이고 성실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이게 빠진 게 진짜 문제입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 “성서대학 계절학기를 진행 중입니다”20160723_005229895.jpg

12주 간의 수요성서대학을 마치고 미처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한 나머지 공부(?)를 계절학기라는 이름으로 이번 학기에 처음 시도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평가는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강의한 저도 힘이 났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는 교육이 너무 약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던 차에 이런 시도를 하게 되어 참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주일마다 신이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에 대한 교리적인 설교,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기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복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란 것이 실제적인 삶에서는 그리 큰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이제는 새로운 신앙고백, 삶에서 구체적인 형체를 띠게 되고 또 신앙하는 대로 힘차게 살게 되는 그런 고백을 위해서 제안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입니다. 이런 목표의식으로 시작한 성서대학이 앞으로 몇 학기 동안 계속될 예정입니다.

아무튼 이틀 내내 일곱 분이 참석해 강의에 집중해 주셨습니다. 공부를 마친 후에는 조촐한 뒤풀이 시간도 가졌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후에 질문꺼리도 나누고 생활도 나누는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예일학교 신진주 선생님도 이틀 내내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주일 오후에 마지막 전체 강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많이 참석해주셔야 합니다! 

^^


■ 교회와 문화  히브리 노예들에게 필요했던 노래 (2) -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 - | 이관택 목사int'ln.jpg


무엇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가?(계속)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밖은 천둥번개와 쉴 세 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로 여전했고, 교실 안은 온몸이 젖은 채 추위와 불안감에 떨고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흡사 국제 포로수용소 같았던 그 암울한 침묵을 깬 것은 작은 노랫소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노래였는지, 일본노래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노래를 시작으로 암울했던 분위기가 점점 밝아졌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한곡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중국, 한국, 일본의 젊은이들은 마치 배틀하듯 각자의 노래를 릴레이로 이어갔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서로를 위해 응원의 박수를 치고, 경쾌한 음악이 나오면 함께 춤사위도 곁들였다. 폭우로 인해 식어버렸던 축제의 열기는 다시금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때 나를 포함한 한국팀은 <아리랑>부터 <학교종이 땡땡땡>까지. 다양한 노래들을 선보였으나 결국 레퍼토리가 떨어졌고, 마지막 곡으로 그나마 익숙한 민중가요를 선곡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주제인 <인터내셔널가>이다. 우리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팔뚝질을 하며 노래를 시작하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국과 일본 학생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마다 팔뚝질을 하며 각 자의 말로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교실 안은 어느 새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자!’고 힘껏 소리치는 작은 광장이 되어버렸다. 세 나라의 언어가 동시에 울려 퍼지는데도 전혀 소란스럽거나 난삽하지 않고 마치 하나의 합창소리 같았으며 뭔지 모를 뭉쿨함이 우리의 심장을 연결해주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참을 부르다 보니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를 인솔했던 제복 입은 사람들(중국 공산당이었으며, 우리로 치면 공무원)도 합류하였다. 세상에 맙소사! 공산당과 함께 어깨를 걸고 팔뚝질을 하다니! 어느새 노래는 우리를 하나로 이끌었다. 창밖의 폭우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우리의 귀에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깨닫고 함께 어깨를 걸었던 시간. 이것이 내가 기억하고 경험했던 ‘인터내셔널’이다. 당신의 ‘인터내셔널’은 어떠한가? 그리고 이 땅의 노동자로서 같은 처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면 ‘인터내셔널’을 경험할 수 있을까? 


*<인터내셔널>은 단순히 ‘국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1864년 런던(영국)에서 창립한 사회주의자들의 국제기구인 ‘제1인터내셔널’을 의미한다.  

(다음 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어려운 형편에 어린 세 남매를 둔 한 과부가 생계를 위하여 거리에서 호떡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혹독한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호떡을 팔던 어느 날, 멋진 노신사 한분이 와서 물었다. 

“아주머니, 호떡 하나에 얼마입니까?” 

‘1,000원이요.’ 과부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 노신사는 지갑에서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과부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과부는 얼른 호떡을 싸서 따라나서며 말했다. “아니, 호떡 가져 가셔야죠.”

“아뇨, 괜찮습니다.” 노신사는 빙그레 웃으며 그냥 가버렸다. 과부는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무심코 지나쳤다.

그런데 이튿날 그 노신사가 또 와서 1,000원을 놓고는 그냥 갔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000원을 놓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이 다 갈 무렵,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케롤이 울려 퍼지며 함박눈이 소복히 쌓이던 어느 날, 그날도 노신사는 어김없이 찾아와 빙그레 웃으며 1,000원을 놓고 갔다.

그때 과부는 중대한 결심을 한 듯 황급히 포장마차를 나와 노신사의 뒤를 따랐다. 과부의 얼굴은 상당히 상기가 되어있었다.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던 과부는 노신사에게 수줍은 듯, 하지만 분명하게 말을 했다.

“저... 호떡 값이 올랐거던요.”


받는 것도 습관이 되면 자기 권리인 것 같이 여깁니다.

처음에는 감사하는 감정이 생기지만 자꾸 받다보면 나중에는 왜 나에게 더 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감정이 발동합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불평과 원망감정에 노예가 되고 맙니다.

주기적인 호의는 의무가 되고 주기적으로 받는 일은 권리가 됩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THE BOOK | 남기평 목사8987427951_f.jpg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 "가장 위대한 기도"를 읽고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1년 2월 15일 출간


무엇보다 먼저, 이 책의 알짬만 말하자면, 우리가 기도하거나 읊는 주기도문은 사회의 배경과 문화의 배경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기도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특정계층의 시선에 편중되어 있고, 이들을 위한 기도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특정계층은 힘없고, 소외받고, 자신의 어떠한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는 계층입니다. 이 계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광범위 했으며, 대부분의 민중들이 하루 한 끼를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문’일 뿐인 주기도문이 힘이 있고,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요? 지금 우리는 ‘주기도문’을 한국어로 번역된 한글-주기도문을 보공 있지만, 헬라어나 히브리어 그리고 아람어로 본 주기도문의 단어 하나하나는 대단히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단어와 단어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선언(a revolutionary manifesto)이며 동시에 희망의 찬가라고 믿는다.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의 핵심인 정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전(vision)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9쪽)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비전은 구약에서도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분배적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레위기 19장, 출애굽기 25장 그리고 다니엘서 등 상당히 다양한 곳에서 펼치고 그 뜻을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따라서 분배가 바로 정의이고, 이 정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분배적 정의를 ‘하라’라고 하나님에게 부탁, 요청이 아닌, ‘명령’조로 말하는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매일이 먹을 것 찾고, 끼니를 거르지 않기 위해, 기층 민중들은 그야말로 사투를 버립니다. 이 생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데, 나라나 공동체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렇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심정으로 이들은 하나님께 호소 더 나아가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를 탕감하게 하소서,” “우리를 구하소서”도 명령법으로 나온다. 우리가 좀 더 겸손하게 “해주세요”라든가, 적어도 “해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룩하게 하소서”와 “오서서,” 그리고 “이루어 주십시오”는 명령들이다.  (91쪽)


그 외에도 각 문장과 단어가 뜻하는 바가 가히 파격적이고, 민중들에게 힘을 줍니다. 이것은 기도가 주는 힘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관점이 항상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늘의 풍족한 양식과 더 이상 부채가 없는 내일을 문자적으로 희망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의” 오랜 꿈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238쪽)


■ 성서상식 |  오경 혹은 육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다섯 권을 가리켜 (모세)오경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오경이 아니라 육경이라는 학자들의 연구도 있습니다. 오경에 여호수아서를 포함하여 육경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여호수아서를 빼고 오경이라고 할까요? 여호수아서는 히브리민족이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며 원주민과 전쟁을 벌여 땅을 차지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 때 제국들은 여호수아서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자극하게 될까봐 강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율법에서 빼게 하였다고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고위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불법적 금품을 챙기고 이권에 개입하며 재판을 굽게 하고 국가적 도덕성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힘들기만 한 국민들의 민생은 외면한 채 제 잇속 챙기기만 급급한 이들에게 정의를 나타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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