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
1. 오늘은 왕국절 제8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2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다음주일은 창립31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며 장혁 청년이 공동설교를 해주시겠습니다.
2. 11월 첫째 주일(6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또한 겨울 준비를 위해 김장을 담글 예정입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3. 수요성서대학이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참석을 바라시는 분은 차량운행을 위해 미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4. 채보란 청년이 활동하는 평화의나무 합창단 정기연주회가 10월 23일(주일) 오후 6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하이든홀)에서 열립니다. 좋은 연주회가 되도록 많은 관심 부착드립니다.
5. 방인웅 장로님이 고열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퇴원하셨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생일을 축하합니다] 10월에 생일 맞으신 윤혜민 청년(15일)과 임미화 집사님(22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목회서신
지난 주 중에 보신각에서 4대종단 평화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참석하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갑자기 일이 생겨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 SNS를 통해 올라온 사진만 보면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같이 일하는 분이 묻습니다. 왜 개신교 교역자들은 어깨에 스톨을 걸쳤냐고 말입니다. 제가 성만찬을 집례할 때 목에 두르는 스톨(stole)은 영대라고도 하는데 소나 가축이 밭을 갈거나 농사 일을 할 때 등에 매는 멍에를 상징합니다. 한 조각 헝겊으로 된 가벼운 스톨이지만 상징적 무게는 엄청납니다. 성직자가 스톨을 걸침으로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가 그처럼 막중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두집회에 나서는 개신교 목회자들은 종종 스톨을 착용합니다. 왜냐하면 개신교 목회자는 그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스님들은 머리를 보면 알고 가톨릭 신부님들은 로만컬라(클레지컬러)라는 셔츠를 보면 알고 원불교 교무님들도 옷차림으로 알아보지만 목사들은 딱히 뭐가 없습니다. 사실 시국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성직자들이 가장 열심히 싸우는 종단이 개신교입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시국문제에 다른 종단들, 특히 천주교는 열심히 하는데 왜 개신교는 하나님 장사만 하고 있느냐고 비판합니다.
이런 오해가 억울하기도 하고, 또 개신교도 열심히 앞장서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선교적 차원에서 몇 년 전부터 가두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는 일부 개신교 성직자들과 교인들이 스톨을 착용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나마 스톨이라도 걸칠 수 있는 것이 다행이기도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왜 굳이 개신교 목사, 개신교인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고 시민이고 또 성도입니다. 시민적 분노와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거리에 나선 것인텐데 굳이 왜 거기에 하나님, 예수님이 들어가야 하고 그것을 밝히고 드러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 일이 신앙적 양심으로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해야 할 지 하지 말아야 할 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신앙운동을 고민합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고구마 캐기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후에 강화도에 사시는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농촌 봉사 및 체험활동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약 200평 정도 되는 고구마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순을 걷어내고 고구마를 캤습니다. 해가 짧아진데다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하다 보니 힘도 들고 하여 3분의 2 정도 작업을 하고 마치려고 했지만 이 목사님 사모님의 강권에 아기 돌보기 담당이었던 안상호, 장혁 두 청년이 떨쳐 일어나 군생활 사역하던 실력을 발휘하여 남은 밭을 다 처리하였습니다.
일을 하면서 박순용 집사님이 '사 먹는게 제일 싸다'고 하셨습니다. 사먹는게 제일 싼데, 그렇다면 도대체 농민들은 얼마나 적은 소득을 얻으며 얼마나 고생을 한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새삼스레 농촌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땀흘리는 농부들의 노고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저녁에는 이 목사님 사모님이 맛난 토종닭 백숙과 죽을 만들어 주셔서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또 강화 교동의 난정교회 김용헌 목사님 내외께서 우리교회가 농활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간식을 준비하여 방문해 주셨습니다. 새참으로 먹고 마신 빵과 음료가 김 목사님이 대접해주신 것입니다.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모두가 즐겁고 뿌듯하게 좋은 시간 보내고 올 수 있어 감사합니다.


■ 교회와 사회
#그런데 최순실은? | 방현섭 목사
박근혜 정권 들어 한국사회는 요즘 듣고 보도 못한 사람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권 초기에는 정윤회라는 사람의 이름이 한참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요즘은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들먹거립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과거에 부부였고 이 여자의 아버지는 최태민이라는 전직 목사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답니다. 게다가 요즘 국정감사에서 거론되는 차은택 등의 인물이 대부분 최순실이라는 사람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들의 딸인 정유라는 국가대표 승마선수가 되는 과정에서의 석연치 않은 부분들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입학 시부터 지금까지 받은 이상한 특혜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습니다. 정유라는 지난 9월에 휴학을 했답니다. 이화여대는 올해 정부의 주요 재정지원사업 9개 가운데 8개를 따냈는데 그 배경에 최씨 딸에 제공한 특혜가 작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얼마 전 이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미래라이프대학이라는 것 때문에 학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 배경에도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아 불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통령과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 있는, 정치인도 아닌 한 여자, 한 가족이 민주정치를 조롱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5천만 국민이 이들의 치맛바람에 놀아나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한국이 민주국가인지 여왕과 극소수 귀족들이 통치하는 과두봉건정치인지 걱정하고 잇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최근 SNS에서는 '#그런데 최순실은'이라는 해시태그 붙이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국정이 농단당하고 농민이 억울하게 물대포 맞아 죽어나가고 있지만 김제동 영창 진위 등 여론몰이와 선전선동에만 급급한 이 정권에 국민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하고 탐욕을 따른 선택은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이 참상을 겪으면서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 한자락 詩

그냥 생각해 봤어요 (1010) | 이성인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우리들 희망을 물어 보시는데
아이들이 저마다
대통령
장군
과학자
사장
축구 선수
프로 야구 선수
하고 발표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벼논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일은 누가 하고
농사는 누가 지을까, 하고
허수아빌 보면서
그냥 한번 생각해 봤어요.
---------------------------
초등학교 때 난 축구선수였다, 운동장에서 크게 다치고 나선
장군이 되고자 했다. 중학교 땐 정치가, 고등학교 땐 목사,
신학대학교에 들어가선 노동자, 군대에서는 혁명가,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후엔 아들과 함께 농사짓는 꿈을 꾼다
“농사는 누가 지을까” 대통령, 장군, 목사는 없어도 되는데
농사꾼 없으면 세상은 끝장이다.
시인의 눈은 거룩하다 | 지리산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늙어감 「노인의 영광은 백발」
‘나이를 먹는 것은 어둠으로 가는 길인가, 빛으로 가는 길인가?’ 이 물음에 누구도 분명하게 답할 수 없다. 그 답이 자신의 존재 중심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늙어갈 것이며 어떻게 늙어가야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이 예상이나 짐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가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의 마음 속 자유 안에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중심에서 우리는 일치인지 분열인지, 황폐함인지 희망인지, 자아 상실인지 새로운 전망인지를 결단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들어 죽는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한테는 창조적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파괴적이며, 어떤 사람한테는 구속이 되고 어떤 사람한테는 해방이 된다.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 추방당하거나 거절당하는 아픈 경험이 무엇보다 기쁘고 감격스런 기회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누가 노인들을 불러낼 것인가? 누가 노인들이 두려움을 몰아내고 격리·소외·황폐·절망·자포자기의 어둠에서 모든 사람이 보도록 준비된 빛으로 이끌 것인가? 어떤 젊은이가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서 용감하게 나서서 노인들을 배척하는 것은 곧 전통을 상실하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사람이 노인들을 보살피는 사람이다. 노인을 보살피는 것은, 곧 나이를 먹는 것은 빛으로 가는 길이며 희망과 새 삶을 주는 길이다.
숨은 기쁨 「탕자의 귀향」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즐기는 습관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그보다 전쟁과 폭력과 범죄에 대한 ‘나쁜 소식’을 듣고 갈등과 투쟁을 목격할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으레 골치 아픈 문제와 괴로움, 실망과 낙담, 불안과 분노를 토해 내리라고 기대한다.
어쩌다 보니 슬픔과 아픔에는 익숙해 있으면서 세상의 은밀한 구석에 감춰진 기쁨을 보는 눈과 즐거움을 듣는 귀는 잃어버렸다.
내겐 내가 슬픔을 기대하는 곳에서 기쁨을 보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하느님께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동안 방문한 나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듣고 본 세계의 참상, 불의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심각한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다. 자기가 찾아낸 숨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이야기,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서로 믿고 돕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 들려준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만한 흥분되고 거창한 이야기, ‘신문에서 읽은 새 소식’을 듣지 못해 실망한다. 그는 나의 선정주의에 응하는 법이 없다. 그냥 “나는 매우 작고 아름다우며 내게 큰 기쁨을 주는 무엇을 보았어.”하고 말할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가져다준 기쁨에 자신을 몽땅 내맡긴다. 그한테서 배워야 한다. 현장에 숨어 있는 진짜 기쁨을 ‘훔치는’ 법을 익혀, 그 기쁨을 훔쳐 모두가 보도록 높이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평화롭지 못한 곳이 많으며 아직도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가던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서로 용서하는 순간을 목격하며 희망을 본다.
모든 것이 좋아지기를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일들을 축하해야 한다. 나를 겁주는 깊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선택하고 죽음의 힘이 기승 부릴 때 생명을 선택하며 온갖 거짓으로 에워싸인 곳에서 진실을 선택하기! 이석이 진정한 수련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 세상의 아프고 괴로운 현상에 마음을 쏟으려는 유혹에 넘어가, 사소하지만 분명하고 진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기쁨과 즐거움에 눈이 멀어 있었다.
기쁨을 선택하면 그 보상으로 기쁨을 얻는다. 나는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는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 속에 있는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찾기로 마음먹을 때 삶은 축제로 바뀐다. 기쁨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더 큰 기쁨을 위한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 놓는다.
■ 여행묵상

이국적, 이색적, 이상적인 공동체 '예수원' | 이관택 목사
(2) 예수원의 하루
예수원에 가자마자 우리를 맞이해준 멜기세덱 형제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대천덕 신부님은 살아생전 예수원에 처음 오신 분들에게 꼭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곳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이 이곳까지 오셨다는 것은 분명 해결해야 할 기도제목과 각자의 근심걱정들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이곳 예수원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곳이 아닙니다. 혹시 오시는 길에 예수원 간판이 있는 시냇가를 보셨습니까? 그 곳에 자신의 기도제목을 모두 내려놓고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원에서는 나라와 민족과 이웃을 위한 기도에 집중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갈 때 시냇가에 내려놓은 기도제목을 찾으시면 됩니다. 그 때 한번 보세요. 각 자의 기도제목이 해결되었는지 아닌지를.”
예수원은 1965년에 세워진 중보기도 공동체이다.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성공회, 루번 아처 토리 3세)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중국과 한국에서 보냈다. 아마도 한국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하고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한국의 상황을 익히 알고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일 것이다.
‘중보기도’는 대천덕 신부과 예수원의 정체성을 잘 내타낸다. 개인적 차원의 구원관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의 변화와 이웃 사랑의 실천이 결국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의 신학적인 지향점을 보여준다. 대천덕 신부가 어린 시절부터 속해있던 장로교를 떠나 성공회 신부가 된 데에는 바로 이 신학적 지향점 때문이다.
1965년에 세워진 예수원이 올해로 51주년을 맞이한다고 한다. 이미 대천덕 신부님께선 2002년에 작고하셨지만 그의 뜻을 이어 많은 이들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중보기도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지금은 한우 100여 마리를 키우는 목장과 초중고 대안학교도 운영하고 있으며, 토지정의를 위한 의제적 실천운동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예수원의 하루는 새벽 5시30분 차가운 산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타종으로 시작된다. 생활의 중심에는 이 종소리가 있는데, 종울림이 주는 소리를 통해 각자의 내면을 돌아보고, 공동체의 약속을 자발적으로 환기시킨다. 새벽6시, 낮12시, 저녁 7시30분에 있는 세 번의 기도(예배)시간과 공동식사시간은 하루생활의 큰 줄기라 할 수 있다.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을 함께 나누는 이 시간을 통하여 예수원의 존재이유는 은은하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기도와 예배는 인도자의 일방적인 설교를 통한 방식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기도와 식사 시간 사이에는 노동과 침묵시간이 배치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자발성과 공동체의 약속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하루 세 번 진행되는 소침묵과 밤 10시부터 새벽5시까지의 대침묵 시간을 통하여 진정으로 형언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와의 소통을 시도해볼 수 있었다. 때론 산들한 가을바람으로, 때론 붉고 노란 낙엽의 하늘거리는 자태로 내게 말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예수원의 첫인상이 ‘이국적’이었다면, 순간순간의 낯설음은 내게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겉으로 보여 지지 않는 중보기도의 가치와 사람들의 순박한 생활은 ‘이상적’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께 하였다. 신앙인으로써 나는 어떤 이상을 가지고 있는가?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실천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나? 예수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떠오르는 질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도 이국적(하나님 나라적)으로, 이색적(특별하고 신비하게)으로 이상적(꿈꾸고,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계획적)으로 살아내야 할 텐데. 2016년 유난히도 샛노란 들녘을 허락하신 이 풍요로운 계절에 나로 하여금 예수원을 만나게 해주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더욱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나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약속해 본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한 해 동안 피땀 흘려 소출을 거둔 농부들은 시름에 잠깁니다. 일한 만큼의 댓가도 얻지 못하는데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대거 수입되고 있다고 합니다. 식량 자급율은 23%에 지나지 않는데도 농업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습니다. 생명 살리는 농업, 농부들이 존중받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