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1주일 및 여성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구원 사역을 기리며 경건하게 이 절기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2. 오후에는 청소년 독서방,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로 모이겠습니다.
3. 수요성서대학은 3월 15일에 개강하겠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 공부하실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4. 참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서 제작한 사순절 묵상집을 한 권씩 가져가세요. 사순절 기간 동안은 이 묵상집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라며 주보에는 따로 묵상기도문을 게재하지 않겠습니다.
5. 소설읽기 모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남기평 목사님께 문의해주십시오.
■ 목회서신

여러분께 객관적으로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에 자칭 독실한 불교신자들이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우리 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십자가와 강대상 등 기물을 박살내고 도망갔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고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경찰에 신고하고 범인을 잡아서 손해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범행과 관련 없는 다른 불교인들이 이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대신 사과하며 배상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칭찬을 하면서 저런 모습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얼마 전 이와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1월 경북 김천의 개운사라는 절에 한 60대 개신교인이 침입하여 불상과 기물을 훼손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서울기독대학교 손원영 교수는 자신이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페이스북에 사과의 글을 올리고 불당 복구를 위한 온라인 모금활동을 벌여 260여만원을 모금하여 부처님 오신 날에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운사측이 완곡히 고사하여, ‘종교평화를 위한 대화모임’에 전액 기부되었습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하였습니다. 서울기독교대학은 '성실 의무 위반'과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며 홍 교수를 파면하였습니다. 신학적 정체성과 불상을 만드는 돈을 모금했다는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 이면에는 16년 간 장기집권을 해오면서 절차를 무시한 행정을 일삼고 불법으로 부지를 매입, 교육부 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아 50억원 환수조치 등 불이익을 초래한 총장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지만 대신 사과하고 용서를 빌며 배상을 하겠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의 한 모습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일로 서로 대립하던 종교가 화해하고 평화를 위해 협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일은 칭찬해주고 격려하고 본받으라고 권면해야 할 일입니다. 종교가 적대적 관계로 경쟁하던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종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프고 상처 입게 하는지 우리는 매일 보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성곽 안에서 패권을 휘두르며 예수님 행세를 하는 행태는 교회를 손가락질 받게 하며 더욱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제19회 은평동지방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진관교회에서 제19회 은평동지방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지방에 속한 33개 교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자리로 이번 회의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각 부서가 활동했던 내용을 보고하고 앞으로 2년 동안 지방 일을 맡아 볼 각 부서의 새로운 임원(총무)와 서기 등을 선출하였습니다. 새로 뽑힌 임원은 서기로 권영국 목사님(좋은씨앗교회), 선교부 총무로 김원만 목사님(대광교회), 교육부 총무로 강익성 목사님(성일교회), 사회평신도부 총무로는 오윤기 장로님(은현교회)이 선출되었습니다. 방현섭 목사는 이번 회기부터 장로 과정고시위원과 선교부 상임위원으로 지방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세 명의 목회자(이관택 목사님은 사정상 불참)와 함옥분 장로님, 임정희 집사님이 대표로 참석하셔서 분과위원회 토의까지 참석해 주셨습니다. 평신도 대표님들은 지방회 후에 우리교회 교우들을 인근 음식점에서 만나 친교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아무튼 참 감사합니다. *^^*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방회 대표 중 연회 대표를 선출하게 되는데 목회자와 동수의 평신도를 뽑습니다. 우리교회는 네 명의 목회자가 있음에도 우리교회에는 단 한 마디도 의견을 묻거나 양해를 구하지 않고 평신도 대표를 배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으나 '평신도 대표 선출을 원하는 교회는 와서 신청하라고 아까 광고했다'는 답변만 하였고 시간이 지체 되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교회와 사회

길을 잃은 교회, 깃발을 잃은 교회 | 방현섭
최순실을 비선실세로 세워놓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검도 기간 영장 없이 종결되어 검찰로 사건을 송치하였고 헌법재판소도 모든 심문과 변론을 마치고 막바지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 열 명 중 여덟 명은 대통령 탄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여론조사는 새삼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극우보수 세력은 탄핵이 기각 혹은 각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백색테러를 자행하고 있어 대다수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극우보수 세력의 집회에 개신교인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일에 열린 집회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교회들이 버스를 대절하여 교인들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교회 목사는 설교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하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라고 독려했다고도 합니다. 이런 설교에 반발하는 젊은 층 교인들은 소리를 지르며 설교 중에 퇴장하기도 했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뉴스들이 사실인 양 옹호하면서 언론이 편파적인 보도를 한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대구 쪽 교회들도 조직적으로 교인들을 동원하여 버스를 대절해 상경하여 집회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보수집회에 참석한 개신교인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신앙과 이스라엘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 자신이 기독교인인지 유대교인인지에 대한 정체성조차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갈 길을 잃고 들어야 할 깃발을 잃은 이들의 모습이 오늘날 주류라고 자부하는 개신교회의 자화상인 것 같아 입맛이 씁니다.
정의를 외면하고 시대의 요구를 듣지 못하여 몽니를 부리는 교회는 결국 폐쇄적 소수집단으로 전락하거나 대중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 늦기 전에 깨닫기를 바랍니다.
■ 한자락 詩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진리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흐른다
끝없이 겨울로 추락했던 것들이
봄을 만들어 돌아온다
거친 바람에 상처를 입은 것들이
생명을 밀어 올린다
지금 그대 앞에 봄은 오고
우리네 심장은 뛴다
볼 것을 제대로 보아야 봄이다
이 봄에 매화향기 하나면 충분하다
지리산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홀로 있기로 옮겨 가기 「영적 발돋움」
영성생활의 첫 번째 특성은 끊임없이 외로움loneliness에서 홀로 있기solitude로 옮겨 가는 것이다. 똑같이 중요한 두 번째 특성은 적대를 환대로 바꾸는 것이다.
자신과의 관계가 달라지면 이웃 관계도 달라진다. 자신의 깊은 중심에 닿으면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한테 닿을 수 있다. 자기의 과거, 문화, 조국, 이웃, 친구, 가족한테서, 그리고 내면의 깊은 중심과 하느님한테서 떨어져 나온 낯선 사람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환대하여 두려움 없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맨다.
비록 많은 사람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적대감의 제물이 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닌 우리한테는 낯선 사람들이 서먹서먹함을 떨쳐버리고 함께 어울려 형제자매로 살아갈 공간을 만들 책임과 능력이 있다. 적대에서 환대로 옮겨 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는 두려움에 자기를 방어하고 이웃을 공격하는 사람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든 움켜잡으려는 사람들, 사방을 의심의 눈초리로 둘러보는 사람들, 언제 어떻게 나타나 자기를 해칠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들에게 둘러싸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한테는 사명이 있다. 그것은 적대hostis를 환대hospes로, 적을 손님으로 바꾸고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어울려 살아가는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깨어 있는 삶 「영적 발돋움」
번잡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외로움에서 홀로 있기로 옮겨 가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영성생활을 진지하게 하려는 사람이 일정 기간 또는 아예 평생토록 조용히 혼자 있을 곳을 찾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홀로 있기’는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물리적 독거獨居에 의존하지 않는, 내면의 기질이나 태도다.
마음으로 홀로 있기에 통달한 사람은 더 이상 주변의 온갖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고, 고요한 내면의 중심에서 세상을 보고 이해한다.
마음으로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외로움에 빠져 있는 것과 스스로 홀로 있는 것의 차이를 배운다. 사무실이나 집이나 텅 빈 응접실에 혼자 있을 때 외로움으로 안절부절 못할 수도 있지만 고요히 홀로 있기를 즐길 수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교수의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행복한 시간’에 수다를 떨 때 쓸쓸함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신의 고요한 중심에서 말하고 듣고 보는 사람의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도 있다. 쉬지 못하는 것과 잘 쉬는 것, 끌려다니는 것과 자유로운 것, 주변에서 홀로 있기와 외로운 것의 차이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으로 홀로 있기를 실현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러나 외로움이 사무칠 때 당장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말이나 사건만 골라서 보고 들으려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 본질적 고독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정도 연애도 결혼도 공동체도 그 외로움을 없애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때로는 환상이 현실보다 근사하게 보이는 법이다. 외로움에 울부짖는 사람은 자기를 껴안아 주는 사람, 그 품에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 헤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얻는 것은 금방 사라져 버리는 거짓충족일 뿐이다. 어렵더라도 우리는 ‘외로움’에서 ‘홀로 있기’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외로움’에서 달아나 외로움을 잊고 부인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열매 맺는 ‘홀로 있기’로 바꿔야 한다. 바른 영성생활을 하려면 먼저 ‘외로움의 광야’로 들어가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부드럽고 끈질긴 노력으로 외로움을 ‘홀로 있기의 정원’으로 바꿔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와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메마른 사막에 꽃이 피어나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듯 우리의 외로움을 담고 있는 아름다움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외로움’에서 ‘홀로 있기’로 옮겨 가는 것은 모든 영성생활의 시작이다. 그것은 쉬지 못하는 불안에서 쉴 줄 아는 평안으로, 밖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욕망에서 안에 있는 것을 잡으려는 갈망으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집착에서 아무 것도 겁내지 않는 놀이로 옮겨 가는 것이다.
■ 음악묵상 | 이관택 목사
중심이 없는 음악, 세상의 중심이 되다(3)
# 흑인음악, 중심대신 모두의 승리를 선택하다.

하지만 모든 음악이 다 위계적이며, 중심과 주변을 나누는 방식으로 소통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은 오히려 세파의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온몸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흑인음악이 그렇다. 필자가 앞에서 불평등에 관한 장광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흑인음악 속에 숨어있는 "평등"을 향한 강렬한 열망과 의지를 함께 나누기 위해서이다.
20세기는 흑인음악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즈를 시작으로 블루스, 스윙, 소울, 레게 그리고 힙합까지. 지금 러시아에 체류 중인 필자도 알 수 없는 러시아어 랩과 비트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을 정도니 말 그대로 흑인음악이 대세가 아닐 수 없다. 음악 평론가 김봉현은 자신의 저서 <힙합>에서 "과연 블랙뮤직은 어떻게 지구를 점령했을까?"라고 질문한다. 필자는 이 질문자체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흑인음악은 지구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별에 스며든 것이다.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춤추게 하며 그들의 마음에 스며든 것이다. 역사를 살펴보거나 음악의 구성과 형식을 보더라도 흑인음악은 누군가를 점령하거나 정복할 의도를 가진 음악일 수 없다. 노예생활의 설움과 한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저 신에게 의지해 미친 사람처럼 노래했던 영가가, 끝도 없는 목화밭에서 짐승처럼 채찍에 맞아가며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부른 노동요가, 벗어 날 수 없는 가난의 굴레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빈민가의 읊조림이 어떻게 정복자의 노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단지 구원을 기도할 뿐이었다. 그 기도의 소리에 오늘 날의 또 다른 절실한 기도들이 공명하는 것 아닐까.

20세기 초 세계적인 재즈스타 루이 암스트롱을 기억하는가? 그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당초 트럼펫주자였다. 그가 만약 클래식 교향악단에서 트럼펫을 불었다면, 혹은 팝가수의 세션으로 트럼펫을 연주했다면 지금의 루이 암스트롱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소리의 위계와 중심이 없는 재즈라는 장르였기에 다양한 연주자의 음악소리가 동일하게 존중받고 받아들여 질수 있었던 거다. 흔히 재즈음악의 백미 중 하나를 "잼 연주"라고 하는데 각 악기의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즉흥연주를 하는 것을 말한다. 서로의 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바로 잼이다. 여기선 관객과 리스너도 같은 비중의 중요성을 갖는다. 마치 판소리에서 추임새를 넣듯이 리스너도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다.
재즈를 비롯한 흑인음악은 소리들 간의 위계, 심지어 공연자와 관객 간에 존재해있던 위계까지 무너뜨리고자 했다. 특정한 소리를 중심으로 세우기보다 각각을 담당하는 모두가 함께 중심이 되고자 한 것이다. 즉 모두의 승리를 선택한 것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이 한 통속이 된 노조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광호씨의 장례를 353일만에 치뤘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여 주시고 악한 기업가들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