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7.04.01 20:01

2017년 4월 2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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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2.jpg

■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5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구원 사역을 기리며 경건하게 이 절기를 지내시기 바랍니다.
2.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이번 수요일 오전 11시에 수요성서대학 제4강이 열립니다. 참석 가능하신 분들은 '제5장 : 예수의 동시대인 읽기 : 함께 아파함과 냉혹한 비판'을 읽어오십시오.
4. 이번 토요일(8일) 오전 11시 부천 파티엔블리스 웨딩홀에서 함옥분 장로님의 장남 손주한님의 결혼식이 열립니다. 교회에서는 9시 20분에 승합차로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하셔서 축복해주세요.
5. 내일(3일) 오후 7시30분, 감리교신학대학교 중강당에서 시위참가로 벌금형을 받은 신학생 돕기 모금 콘서트가 열립니다. 교회에서 15매의 티켓을 구매하였으니 참여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티켓을 가져가십시오.
6. 부활주일(16일) 오후 4시 30분, 안산 화랑유원지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4.16 가족과 함께 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촛불교회 안내] "토지 강제수용 철폐" | 4월 6일(목) 오후 7:30 / 국회의사당 앞

[4월, 정의로운 선택의 달]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으로 다음 달에 대통령 선거를 조기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이 땅의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통치하는 대통령,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봉사하는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바른 가치관을 갖고 잘 보고 깊이 생각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 목회서신
요즘 수요성서대학이 다시 시작되고 매주 수요일마다 즐거운 일들이 많습니다. 성서대학 후 함께 나누는 점심식사의 맛과 재미가 쏠쏠합니다. 자발적으로 식사를 대접하시겠다고 하여 수요일마다 맛집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모인 건지 점심을 먹으러 모인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식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양연화 집사님이 문득 '예전에는 놀고 노래하고 유흥을 즐기러 다니면서도 마음에는 죄책감이 있어서 신나게 놀고 난 후에 꼭 회개의 기도를 했다. 그러나 다시 또 신나게 놀러 다니는 현실에서 항상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미있게 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도 자기 자녀들이 즐겁고 행복한 것을 원하실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대학 공부 내용 중에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의 차별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더불어 정결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죄책감을 남겨 놓고 죄인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게 하고 있었습니다. 정결법은 당시 가난한 사람은 물론 평민들도 지키기 어려운 조항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90% 이상 되는 사람들이 다 '죄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한 교리가 있습니다. 바로 원죄의 교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인이라는 것으로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죄책감을 안고 살고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여전히 성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의 굴레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즐거움을 추구하는 생활이 당연히 부담스럽고 죄책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양 집사님은 이제 그런 굴레를 벗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자기 모습보다 하나님의 딸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애로우신 아버지 혹은 어머니시라면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 잡혀 매 순간마다 비굴하게 마지못해 눈치 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기쁘고 감사하게 주신 생명을 누리고 즐기며 사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습니까? 권세 있고 가진 것이 많은 자들은 그 힘과 재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착취하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야 그저 소소한 일상과 무해한 욕심으로 작은 낙이나 누리면서 남에게 피해 안주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것이 고작인데 그걸 꼭 원죄라는 굴레로 엮고 묶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신앙이 죄책감으로부터 자라나는 것인지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주신 은혜를 기쁘게 누리는 가운데 자라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 교회와 사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성숙한 통치자를 세울 수 있습니다 | 방현섭
매 5년마다 대통령 선거는 12월의 어느 수요일에 치렀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5월에 치르게 되었습니다. 장미꽃이 피는 봄에 열린다 하여 이른바 '장미 대선'이라고 합니다. 대통령 한 사람(사실은 두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을 잘 못 뽑아 그야말로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는데 봄바람 부는 때 뽑는 새로운 대통령은 그야말로 이 나라 이 백성이 따듯한 훈풍을 맛보게 해주기를 기도해봅니다.
바야흐로 각 정당마다 대통령 후보를 확정하고 예비 선거운동이 한창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거의 독주를 하다시피 하지만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다시 다크호스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바라마지않는 정권교체는 이룰 것 같아 그나마 다행입니다만 경선 국면을 보면서 드는 시름 또한 깊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보수우익 정당의 경선에 나선 후보들의 발언을 들으며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들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리는 없겠지만 정말 저렇게까지 막말을 해대면서 수준의 천박함을 확인시켜주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선 것부터 기가 막힐 뿐입니다. 
선두를 달리는 정당 역시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한솥밥을 먹으면서 투쟁하고 한 대통령을 모시던(대통령은 모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들이 대통령 비서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막말을 해대면서 서로를 깎아 내리는 것 역시 기가 막힙니다. 국민들은 한 팀이 되어 나라를 바로 세워주기 바라고 있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은 아닌가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왔던 어차피 비슷비슷한 후보들이 나와서 경쟁하고 있는데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를 '남자 박근혜'라고 한다거나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비판을 넘어 비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보면 걱정스럽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의 좋은 점, 좋은 정책을 말하면 될 텐데 왜 타 후보의 단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들이 살아온 삶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성품에 따라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다. 성숙한 국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성숙한 통치자를 세울 수 있습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임종을 앞둔 노인을 위해 목사가 기도하려고 찾아갔다.
목사는 노인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할아버지, 예수를 영접하시고 마귀를 부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품에 안기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목사가 재촉했다.
“할아버지, 마귀를 부정하세요.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노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목사가 궁금해서 물었다.
“할아버지, 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노인이 숨을 몰아 쉬며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목사님! 내가 지금 천국에 가게 될지 지옥에 가게 될지,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하는 판국에 괜히 말 잘못했다가
한쪽 편을 화나게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빈대떡 부치듯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뒤집으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말에 대한 책임을 지지않을 때
국민은 불안해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인데도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말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
오늘은 문제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1주1닼 - 송윤혁 감독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 절규를 듣는 시대에 복이 있습니다.”

20170402_002.jpg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 켄 로치 감독, 2016년
 열심히 살던 목수가 사회로부터 버려졌다. 다니엘 블레이크, 극중에서 '댄'이라고 불린다. 댄은 어떤 사람인가? 목수이고 와이프와는 사별했으며 현재는 의사로부터 노동을 중지해야한다고 경고를 받은 심장에 병이든 사람이다. 그의 인격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말자.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개인의 인격이나 인간성 같은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영화 속에서 그는 아주 매력적이다. 하지만 아주 객관적인 상황들만이 댄의 이야기를 양각과 음각으로 이루어진 판화처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문단을 시작한 '열심히'라는 단어도 제거해야겠다. 열심이란 말처럼 모호하고 편협한 단어가 또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 앞에는 열심 혹은 ‘게으른’이라는 단어가 혹처럼 붙는다. 열심히 살아냈지만 가난하면 불쌍한 것이고 게으르게 살아서 가난하면 그 궁상맞은 삶이 온당하다는 생각이 시대를 관통하는 관념이다. 켄로치는 댄이라는 인물을 창조하면서 그의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캐릭터를 따르다보면 댄은 아주 평범하게 인간의 삶을 살아왔으리라 짐작 할 수 있다. 어쩌면 치열하게 살아왔을수도 있다. 하지만 짐작일 뿐이다. 중요하지도 않다. 

 댄이 영화 속 세계에서 끝까지 싸우며 쟁취하려 했던 것은 '질병수당'이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정부에서 보장하는 급여다. 한국에도 비슷한 제도들이 있다. 놀라운 것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보장 제도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제도의 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온갖 진입장벽을 뚫어 내야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가난한 사람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진입하기 위해서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해야한다. 
이 과정이 아주 굴욕적이다. 소위 상담사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하며 고용가능성이 없는 인물인지 설명해야한다. 자신의 효용성을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처절한 사회에서 국가의 생활보장을 받기 위해서는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국가에서 고용하는 단기일자리 사업에 들어가 일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입증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모순이지 않은가? 무용을 입증해 얻는 일자리와 노동이라니.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사실 이런 일을 하기 싫어한다. 모욕적이며 월급도 한 달에 55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고 길어야 10개월이면 고용기간이 끝나 실업수당을 타다가 재고용을 위해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몸이 아파 아예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의사에게 몸의 상태를 파악하는 진단을 받은 후 진단을 근거로 공무원에게 판정을 받는다. 의사가 의료적으로 일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려도 공무원이 일할 수 있다는 행정적인 판단을 내리면 수급은 받을 수 없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댄이 후자의 경우다. 물론 한국에서도 발생하는 상황이다. 제도는 복지사각지대를 확장한다. 동시에 인간성을 상실하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댄이 영화 속에서 끝까지 쟁취하려 했던 것은 질병수당이었을까? 영화 속 댄이 남긴 편지다.

20170402_003.jpg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우리는 돈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권리를 요구한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요구하면 때 쓴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요구할 권리조차 없는 사회다. 지금의 세상은 때 쓰다가 죽는 세상이다. 죽음의 목전에서 외치는 것은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절규를 인간의 목소리로 받아 안아야 그 시대에 희망이 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절규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복음서의 기자가 좀 더 말에 군더더기가 많은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썼을 수도 있다고 불경하지만 생각해본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 절규를 듣는 시대에 복이 있습니다.'

20170402_004.jpg ■ 영화묵상 “그래서 나는 따른다!”- 최근규 청년

쿼바디스(Quo Vadis)
김재환 감독 | 한국 단유필름 |  2014년

#1.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쿼바디스(도미네)는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제자들의 물음이다. 본 영화는 오늘날 대형화된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여주며 위의 질문을 한다. 
한국교회는 예수와 함께 동행 하고 있는가? 예수의 희생, 낮아짐, 청빈에 대한 가르침은 오늘도 유효한가? 권력, 재물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담임목회자를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는 세상에 부패의 원인을 제공하고, 어둠이 퍼트리고 있지는 않은가? 목회를 앞둔 나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세 가지를 나누고 싶었다.   

#2. 교회에서 만난 예수
나를 안수해준 목사는 카지노에 빠졌었다. 도박할 돈이 필요해 처음에는 장로들에게 나중에는 암 투병 중이었던 교인의 수술비까지 빌려가며 도박을 했었다. 전도사로 사역을 나간 교회들 대부분은 건축을 시도하거나, 건축 후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모습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가라는 목자들의 조언보다는, 돈을 벌어야 되니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는 장사꾼들의 강요를 더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런 교회가 불쾌했다. 신학대학교를 가지 않았더라면, 전도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모습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회의 지도자를 세우는 신학대학교에서는 교수들의 권력다툼, 교단에서는 감독선거와 관련된 부정부패들이 횡횡했다.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고 배운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까?
강의실과 채플설교에서 예수를 만난 적이 아마도 없던 것 같다. 하지만 신학교 2학년 시절 친구와 함께 찾아간 한 판자촌에서 예수가 어디에 계시는지 조금이나마 경험한 적이 있다. 어느 수요일 억울한 상황에 처한 판자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위해 그분들을 뵈러 간적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무렵, 가까운 곳에서 찬양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옆에 있었던 교회에서 드럼과 기타를 치고, 주여 주여 외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자기들만 은혜에 받쳐 외치는 소리를 거북하게 들었다. 그리고 어떤 분이 이렇게 얘기 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저럴 시간에 우리를 한 번이라도 찾아와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 때까지만 해도 교회 건물 안에 갇혀 계셨던 하나님을 믿었던 나에게 그 분의 독백은 사자후의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예수는 교회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구나.’ 
‘예수를 교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3. 내가 따르는 예수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사랑의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금란, 임마누엘, 광림교회 등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교인이 만 명 이상이 되는 대형교회 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다루진 않았지만, 분명 한때는 한국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쳤던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교회규모가 점점 커지고 기업화· 사유화하며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기 시작된 것이다. 한 때 순수하게 예수만을 전하겠다는 사람들을 오염시킨 것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쿼바디스에서도 나오듯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대형교회 만의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편의점보다 더 많은 십자가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 공격적 전도에 목을 매고 있는가? 작은 교회들의 소망이 대형교회화 되는 것이라면 교회들의 무한경쟁은 무한반복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인 것이다. 쿼바디스에서 작은 교회 목사의 인터뷰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도들이 듣기에 거북하고 자극적인 설교보다는 듣기 좋은 말들만을 하려고 한다.’는 말이 나왔다. 듣기 좋은 말,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문은 작은 교회에서 수없이 반복 전파된다. 좋은 설교문이 반복해서 전파되는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이 문제라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별로 지역별로 사람별로 각기 다른 특성이 있는데, 부와 명예는 축복, 동성애와 가난은 범죄와 같이 제도화된 가르침이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이 흔히 교인들이라고 하는 사회집단들에게 잘못된 윤리와 사회규범으로 정착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20170402_001.jpg 새날에 일하면서 친구들에게 내가 나눠야 했던 예수는 길 위의 예수였다. 온갖 위험에 노출된 길 위의 친구들과도 예수도 너희들과 함께 길 위에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친구의 개인 개인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면서 비행청소년, 말썽쟁이라 손가락질을 해댄다. 위험에 처한 길 위의 청소녀들을 위해 센터가 지어지는데 지역주민들은 혐오시설이라며, 집값이 떨어진다며, 마을에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 모진 핍박은 예수의 삶의 모습과 흡사한 하다. 길위에서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제멋대로 살자고 외치던 예수의 모습을 싫어하던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교회를 다니던 안다니던, 예수를 현재 알고 있든지 아니든지,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나에게 또 한 명의 예수요. 또 한 번의 산상수훈이기 때문이다. 

#4. 그래서 나는 따른다 
나는 오늘도 살아 숨 쉬는 예수를 따른다. 아니 따라 가야한다. 다짐이다. 내 주변에 가장 연약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네 주변의 연약한 사람, 힘들어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가장 연약한 사람은 사회의 변두리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전체를 확실히 볼 수 있는 자리는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이다. 세상의 기득권, 중심이기 보다 변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목회를 하고 싶다. 세상의 중심에 내 탐욕을 놓고 바벨탑을 쌓아가는 그런 목회보다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고 그 분과 동행하는 그런 목회를 꿈꾸고 실천하고 싶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세월호가 성공적으로 인양되고 목포신항으로 옮겨져 육상거치를 위학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미수습자 수색이 잘 진행되어야 하고 침몰 원인도 규명될 수 있도록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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