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9일 주보

by 좋은만남 posted Apr 0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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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종려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다음주일은 부활주일 및 세월호 참사 기억주일로 지키겠습니다. 부활주일 헌금도 정성껏 준비해 주십시오.
2.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성금요일 한끼 금식하고 이웃과 평화일꾼을 위한 겨자씨헌금을 해주십시오. 
3.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4. 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이번 주는 제5강입니다.
5. 부활주일에 세례,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담임목사에게 신청해 주십시오.
6. 부활주일(16일) 오후 4시 30분, 안산 화랑유원지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4.16 가족과 함께 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7. 4월 20(목)-21일(금)에는 꽃재교회에서 서울연회가 열립니다. 네 명 목회자와 임정희 집사님이 우리교회 연회원입니다.
8. 어제(8일) 함옥분 장로님 장남 손주한님이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축복합니다.
9. 임정희집사님이 연신내에 인견매장을 오픈하셨습니다. 번창을 기도합니다.

[4월 생일축하] 이인건(11) 남규현(12) 송윤혁(15) 박성중, 한효균(18) 정지수, 임정희(21)
[촛불교회 안내] "적폐 청산과 주권자 시대" | 4월 13일(목) 오후 7:30 / 광화문 세월호 광장

■ 목회서신
어느덧 사순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이번 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로 지키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성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영광과 환호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지만 곧바로 고난과 죽음의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고 제자들에게도 이처럼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성금요일에 체포되어 고문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일요일에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빈 상태로 발견이 되어 부활을 성취하십니다. 그렇게 40일 동안의 사순절기는 억압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과의 동행, 부정한 종교와 기득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거쳐 십자가의 처절한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사순절의 끝은 결코 고난과 죽음이 아니라 그것을 이기고 넘어서는 부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은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기득권에 대항한 투쟁과 가진 것 없는 세력과의 연대로 인한 권력자들의 억압으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고난의 신앙과 모든 고난과 죽음을 넘어 결국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신분을 확인하시어 왕위에 등극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영광의 신앙이 그 두 갈래입니다. 고난의 신앙은 부활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이들, 억압당하는 이들과의 연대와 저항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고 믿지만 영광의 신앙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대와 기쁨에 더 큰 방점을 찍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고난의 신앙이 아니라 영광의 신앙에 열광합니다. 종교란 결국 생사화복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와 죽음이라는 미지의 공포에 대한 보험이기에 지금 여기에 고난당하는 타인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내세의 기대에 더 집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과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고난 없이, 죽음 없이는 부활도 영광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며 사순절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부활을 기다리기 바랍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20170409_003.jpg “손주한님이 품절남이 되셨네요”
함옥분 장로님이 오매불망 고대하고 기다리던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함 장로님의 듬직한 맏아들 손주한님이 어제(8일) 품절남의 대열에 합류하였습니다. 부천 역곡의 파티엔블리스웨딩홀에서 가족과 친지, 지인들과 교우들의 엄청난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위한 첫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었습니다. 오전 11시 예식인데 제가 주례를 맡게 되어 함께 움직이신 분들이 덩달아 이른 아침부터 서둘게 되어 죄송했습니다. 차 두대로 나누어 가다 보니 먼저 가신 분들만 사진을 찍어 부득이 주보 표지사진에는 나중에 오신 분들이 안 보이시네요. 요즘 제가 사진 찍기를 좀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죄송합니다. 부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잘 사시기를 기도하며 먼저 품절남이 되신 선배 남편들의 모범을 잘 보고 배워 그 길을 따르시기를 빕니다.

“벌금형 받은 신학생 돕기 모금 콘서트”
세월호 사고를 둘러싼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을 규탄하며 광화문 세종대왕상에 올라가 기습시위를 벌인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생들과 재능교육 부당해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용역과 경찰에 맞서다가 연행된 신학생들, 세월호 1주기 가두시위 중에 경찰과 충돌하여 연행된 신학생 및 목회자들에게 부과된 3,500여만 원의 벌금을 함께 부담하기 위하여 열린 모금 콘서트가 지난 3일 감신대 중강당에서 열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콘서트에 참석하여 응원하고 모금에 참여하여 총 3,300만 원이 모였습니다. 우리교회도 30만원을 전달하였습니다. 정의를 위해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투신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위해 기꺼이 마음을 나누어 주신 우리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모금 결과를 알려드립니다. 

20170409_004.jpg ■ THE BOOK - 방현섭 목사
나무에게서 온 편지 | 하명희 지음 / 사회평론 / 2014년
(기억이 맞는지 좀 가물가물하긴 한데)작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밤을 넘기고 새벽까지 교역자 모임을 하던 중 박성중 목사가 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갈 데가 있다며 나갑니다. 주일 아침이 되었는데 박 목사가 웬 여성분과 나타났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렇게 하명희 작가와의 우연하고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하 작가의 자필서명이 담긴 전태일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책 ‘나무에게서 온 편지(이하 나무편지)’까지 선물로 받았습니다.
박 목사가 종종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자랑스럽게 했던 고등학교 운동권(고운)의 이야기가 소복이 담겨있는 나무편지는 나와 비슷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운 출신 한 여성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여성적 필체와 감성으로 절절하면서도 따뜻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의 최대 질문은 항상 ‘나는 누구인가?’였습니다. 나무편지는 새삼스레 나에게 다시 이 질문을 되새기라고 촉구하고 있는 듯합니다.
때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사회를 과학적으로 보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사회참여를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부끄럽고 아쉽고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긴 하지만 그 나이에 거리에서 최루탄 맞아가며 뛰어다녔던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완결되지 못하였다는 것 때문에 부끄럽습니다. 짱돌을 들고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더 이상 들 수 없고 또 들어서도 안 되는 시대의 운동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었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80년대 선배들의 운동에 비하면 나는 여전히 어리광 부리는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나무편지를 통해 그것이 바로 나의 운동이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20170409_002.jpg "틀린 걸 고치는 게 이렇게 쉬워도 돼? 이게 말이 돼?"

91년 봄의 대투쟁 후에 흩어진 고운, 그러나 그들 앞에 등장한 도스(DOS)로 구동되는 컴퓨터가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문이었듯이, 그렇게 세대마다 새로운 문, 새로운 운동을 만나고 또 기꺼이 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하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나무편지는 나의 작은 장에서 펼쳐지는 나의 작은 운동을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렇게 80년대와 90년대의 운동은 다르고 또 2000년대 이후의 운동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광주항쟁과 87항쟁이란 전설에 매달린 우리에게는 그렇게 자괴감만 쌓였었나 봅니다. 
이젠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동지들, 선후배들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도 서운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그렇게 세상의 흐름에 삶을 내맡기고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길 기도하면서.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먼저 치열하게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하명희 작가와 박성중 목사, 수많은 고운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마당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나가야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 제목처럼 ‘어디로’가 여전히 남는 질문이 될 테고 나의 마지막 장 역시 끝내 종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겠습니다.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분노 「제네시 일기」
분노는 영성생활의 심각한 장애물 가운데 하나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기도란 마음의 흔들림 없이 항구함에 이르게 한다.” 이곳에 오래 머물수록 나는 어떻게 분노가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는지 깨닫는다.
오늘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내 마음에 화가 치밀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지금 하는 일이 꼭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닐뿐더러 그냥 나를 놀릴 수 없으니까 맡긴 일이라는 생각이 더하면서 일을 시킨 사람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난 것이다. 이웃에서 멀어졌다.
수도원에 머물면서 분노란 결국 내가 만든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게 된다. 다른 곳에서는 몰상식하고 자기만 알고 거칠고 비열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내가 화를 내는 것이 누구 때문이라거나 무엇 때문이라고 쉽게 둘러댈 수 있지만, 수도원은 그런 곳이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 머무는 이들은 저마다 더없이 양순하고 부드럽고 사려 깊다. 그들은 참으로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다.
수도원에서 화를 내는 데 핑계거리가 될 만한 대상이 별로 없다. 아니, 전혀 없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다. 내가 스스로 화를 내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것이고, 아무도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만일 화가 나고 심술이 났다면 그때야말로 내 분노의 뿌리를 깊이 들여다볼 완벽한 기회다.

원망 「탕자의 귀향」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다. 인생을 선물로 받아들여 경험하는 것을 원망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원망은 말한다. 너는 네가 누려 마땅한 것을 누리지 못한다고.
감사는 진정 ‘내 것’과 ‘우리 것’의 경계를 넘어 인생의 모든 것이 순수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지난날 나는 감사란 선물 받은 사람의 자연발생적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도 연습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사를 연습하는 것은 나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이신 분한테서 받은 선물이며 기쁨으로 축하할 선물임을 깨닫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려면 깨어 선택해야 한다. 내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와 원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나는 감사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불만이나 원망 대신 감사하기를 선택할 기회가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나를 비난할 때 가슴은 쓰리지만 그래도 감사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내 눈에 어떤 사람의 잘못과 허물이 뚜렷하게 보여도 그의 좋은 점과 아름다운 점을 말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앙심을 품은 말과 증오로 얼굴을 찌푸려도 나는 용서하라는 말을 듣고 웃는 얼굴을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언제나 원망과 감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내 어둠 속에 나타나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며 사랑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며, 내 것이 모두 네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 서 있는 어둠 속에 머물며, 나보다 나은 누군가를 가리키고, 지난날 나를 덮쳤던 불행에 마음 아파하며 원망과 한숨 곳에 살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찾아오시는 분을 바라보며 나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순수한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은 내 선택에 달려 있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빈곤을 바라보는 당신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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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초와 용가리" | 이창준 감독, 2015년 (1)

 요사이 나는 생애 첫 다큐멘터리 작업에 돌입하였다. 다큐작업이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아무대책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고, 기다리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인사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시간을 달래는 일이 나의 요즘 업무라면 업무다. 
20170409_005.jpg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일 텐데 다큐멘터리 작업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열고, 열고, 또 여는 작업이 아닌가. 상처투성이로 떠밀려 거리노숙을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삶을 보여주세요"라며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무지막지함. 그리고 이 요구에 대해 응답하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느끼는 막막함이 바로 다큐 작업에서 장착해야 할 두 가지 일상적 감정이다. 
'무지막지함'이야 송구한 마음으로 성찰하고 방향을 다듬어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의 태도를 수정하면 된다지만 '막막함'이란 감정은 이제 첫 번째 관문을 겨우 ‘똑 똑’하고 노크하는 신입으로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막막한 심상에다가 뭔가라도 그려줘야 그나마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 찾은 영화가 이창준 감독의 <왕초와 용가리>였다. 일단 내가 하고 있는 작업과 소재가 비슷하다는 점. 극장개봉까지 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본 지금 그 막막함이 해소되었냐고? 글쎄. 여전히 어렵다는 말로 대신할 수 밖에.

<왕초와 용가리>는 일명 '안동네'라 불리는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독은 주인공 '왕초' 상현과 '용가리' 정선을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풍경을 잔잔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가려고 노력한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삐딱한 궁금증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소위  '서울의 할렘'이라는 자극적인 수식어가 붙어있는 '안동네'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할까. 빈곤의 풍경이 풍겨내는 이질적인 향기를 제외하곤 여느 동네와 별로 다를 바 없고 그렇다고 특별한 사건 또한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보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고 일부에선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겨나는 삐딱한 궁금증들은 빈곤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시선, 나아가 빈곤을 향한 이 세상의 시선 자체에 대한 의문이자 문제제기였다. (계속)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경색된 남북관계와는 달리 국민들은 평양과 강릉에서 열린 여자 축구와 아이스하키 경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몸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결과 반목을 끝내고 교류협력으로 참된 평화로 나아가는 한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