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7.04.15 22:22

2017년 4월 16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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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주일 및 세월호 참사 기억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인양과 육상 거치를 마치고 미수습자 수색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2. 오후에는 안산 화랑유원지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4.16 가족과 함께 하는 부활절 연합예배(4시 30분)에 참석하겠습니다. 2시경에 출발합니다.
3. 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이번 주는 제6강입니다.
4. 20(목)-21일(금) 꽃재교회에서 서울연회가 열립니다. 네 명 목회자와 임정희 집사님이 우리교회 연회원입니다.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를 많이 도와주신 중앙교회 정의선 목사님이 이번 연회에서 은퇴하십니다.
5. 남기평 목사님이 18일-28일에 기독교방송 기독교개혁 500주년 기념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독일에 다녀오십니다. 잘 진행하고 오시도록 기도해 주세요. 
6. 4월 29(토)-30일(주일)에 주문진 야외예배를 계획 중에 있습니다. 참석하실 수 있도록 일정을 확인해 주십시오.
 
[촛불교회 안내] "사드배치 반대와 한반도 평화" | 4월 20일(목) 오후 7:30 / 광화문 KT 앞
 
■ 목회서신
어느덧 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영원이 우리의 기억에 머물러 있을 것만 같습니다. 세월호 말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점심무렵,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저는 어떤 식당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몇몇과 자리 잡고 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켜놓은 텔레비전이 세월호 침몰 소식을 급박한 목소리로 알리고 있었습니다. 화면에 비친 대형 여객선 세월호는 옆으로 기우뚱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막과 더불어 전원구조하였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우리는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모두가 다 알다시피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지요.
안산 세월호 분향소에서 기도회를 할 때마다 꼬박 자리를 지키신 예은이 할머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세자 장로님이 뉴스앤조이와 인터뷰하신 내용이있어 옮겨봅니다.
 
"저는 50년 동안 감리회 한 교회만 섬겼어요. 그런데 사고 난 뒤 보니까 내가 한 게 신앙생활이라 할 것도 없더라고요. 신앙생활이 그저 내 중심으로, 내 새끼, 그냥 내 것만 생각하고 편리하게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나를 보고 뭐라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요.
 
이제 고난주간 시작인데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를 묵상하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죄인 된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피눈물을 다 흘리고 가셨는데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억눌리고 억울하고 아프고 병들고 이런 사람 위해서 오셨는데, 저는 신앙생활 하면서 그런 신앙생활해 본 적이 없어요. 누가 아프다고 해도 나만 안 아프면 되고, 억울해도 나만 안 억울하면 되는 거지.
 
사실 저는 신문도 잘 안 봤어요. 5·18도 있었고 큰 사건도 많았는데 사회 일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냥 나만 편안하게 잘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라 생각하고, 낼 수 있는 헌금 열심히 내고, 새벽기도 하루라도 안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 그게 순종이다 싶어 그렇게 생활했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우리 노인들이 잘못 살았어요. 늙은이들이 잘못 산 대가예요. 사회 문제에 책임지지 않고 우리들만 밥 먹고 살기 위해 살았죠. 돈만 모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가진 건데. 아직도 멀었지만 이제 저는 조금 알게 됐어요.
 
저도 때로 통곡을 하고 울어요. 우리 아들(예은 아빠)은 잘 안 우는데, 한번 울었다 하면 살이 흔들리는 울음을 울어요. 집이 흔들려요. 그런데 엄마(예은 엄마)는 내장이 녹아서 나오는 울음을 울어요. 예은이 쌍둥이 언니는 옆에서 들으면 팔뚝 하나를 뽑아 가는 것처럼 울어요. 언니가 울기 시작하면 우리가 울음을 그쳐야 해요. 팔다리가 잘린 것처럼 우니까요.
 
그걸 보면서 '우리가 함께 울어도 서로의 울음이 다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같이 울어 주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거예요. 큰 교회에서는 기도해 준다고 말은 하는데, 사실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기도는 기본이지만 직접 와서 옆에 앉아 주고, 세월호 리본 달아 주고, 배지로 표시해 주고. 사람들이 뭔가 오해하고 잘못 알고 있다면 그건 아니라고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많은 것을 경험했고 할머니로서 아이들한테 사랑한다고도 말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온 것 후회합니다. 여러분 집에 돌아가시면 가족들 많이 안아 주시고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하나님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평생 성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지만 감당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비로소 세상을 보고 이웃을 돌아보며 신앙적 반성과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 할머니 장로님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무거운 질문으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신앙이란 결국 우리 자신과 이웃의 아픔을 바라보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음처럼 깊은 통증 앞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며 한 걸음 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감으로 희망을 만드는 것, 여기서 우리는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세월호의 아픔, 그 가족의 아픔,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아픔, 이 아픔을 기억하며 새롭게 거듭나는 부활의 아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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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얘기 깊은 생각
한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사람이 늙으면 왜 구부러지는 것입니까?”
스승이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두 자루를 목에 걸고 태어난단다.
하나는 앞가슴에
다른 하나는 뒷등에 달려 있지.
등에 달린 자루에는
정의와 평화, 기쁨과 감사 사랑과 봉사를 담아야 하고
가슴에 달린 자루에는
원망과 짜증 미움 시기와 질투 교만과 욕심을 담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일평생 앞가슴에 달린 자루만 채워서 그런 그렇다네.”
 
이게 아닌데... 내가 이것을 위해 이렇게 기를 쓰고 살아왔던가?"
온 힘을 다해 자신이 세운 어떤 목표를 성취하지만
그 성취감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이어 공허감이 밀려들어옵니다.
그 세우고 이룬 목표가 단지 개인적 이익에 머물 때
공허감은 더 빠르게 밀려듭니다. 
심리학자 롤러 메이(Rollo May)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에서
현대인을 ‘공허한 인간 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뚜렷한 목적도, 목표도 없이 계속 달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담는지도 모르고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정신적 쓰레기들을 자신의 영혼의 방에 밀어넣고 있습니다.
마침내 평안한 휴식을 취해야 할 방은 쓰레기가 차지하고
그 쓰레기더미 옆에서 구부려 새우잠을 청하지만
누군가가 와서 그 쓰레기를 가져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핏 발 선 눈을 감지 못하게 합니다.
지금,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당신의 영혼의 방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자기 불신 「고독 : 크리스천 삶에서 세 가지 명상」
너도나도 오직 성공을 지향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은 갈수록 ‘최고’의 지배를 받는다. 가장 높은 탑, 가장 빨리 달리는 선수, 가장 키 큰 사람, 가장 긴 다리, 가장 우수한 학생에 대해 저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댄다.(네덜란드 사람들은 거꾸로 자랑한다. 우리한테는 가장 작은 마을, 가장 좁은 길, 가장 낮은 건물, 가장 불편한 구두 등이 있다고.)
그러나 그렇게 성공과 최고를 강조하면서 많은 사람이 남몰래 자신을 업신여기며, 언제든 누군가 자기의 겉포장을 벗기고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덜 좋고 덜 사랑스럽고 덜 근사한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은 내가 침착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내 참모습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기절초풍하겠지!’
바로 이 자기 불신이 경쟁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사람의 삶을 좌절과 절망에 빠뜨린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공동체에 있는 그대로 서로를 나누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자기 정체성을 세상 판단에 맡기면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칭찬과 인정을 받아야 하고, 도무지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결국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상대방의 약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정도 사랑도 불가능하다.
자신의 행동이 내적 자유보다 두려움의 표현이 될수록 우리는 스스로 만든 착각의 감옥에 갇힌다.
 
자기 거절 「영혼의 양식」
영성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본모습을 보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하는 거시다. 우리는 자기한테 찬성하지 않는 것self-deprecatiom을 겸손의 미덕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자기한테 찬성하지 않는 것은 겸손과 정반대된다.
우리가 하느님 눈에 귀한 존재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임을 아는 것은 대단한 깨달음이다. 자신을 거부하는 경계를 뛰어넘으려면 우리를 사랑스런 자녀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용기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하찮게 여김 「탕자의 귀환」
오랫동안 나는 자기를 하찮게 여기는 것을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교만과 자긍을 경계하면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게 주시는 하느님의 첫사랑을 거절하고 자신의 원천적 선善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죄임을 안다. 하느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 속에 하느님이 주신 선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으면 참나를 만날 수 없거니와, 아버지 집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들과 함께 찾느라 헛수고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기 안에 있는 원천적 선을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독단, 경쟁의식, 질투, 자만, 거만함에는 불안한 마음이 숨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중심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더 마음을 쓴다. 나는 탁월한 재능으로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선함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사진의 성공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긴 것이다.
사람들에겐 자신을 하찮게 여긴 아픈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때 사랑과 관심을 주지 않은 부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안겨준 교사와 배신한 친구들, 인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 도움도 주지 않고 자신을 방치한 교회.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기 전부터 있던 사랑과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뒤에도 여전히 있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 이야기다. 비록 극히 제한된 사랑이라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에서 솟아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는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바로 그 사랑에 이끌려 하루를 살아가는 길(방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 모습에서 나는 그 사랑을 자주 훔쳐본다. 이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집으로 돌아오는 자식을 환영하고 잔치를 벌이는 어버이의 사랑이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빈곤을 바라보는 당신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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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왕초와 용가리" | 이창준 감독, 2015년 (2)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말 그대로 '왕초' 상현과 '용가리' 정선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빈곤의 실제와 환상 사이를 제 마음 대로 오가는 감독의 편향된 시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의 ‘왕초’ 상현은 말 그대로 쪽방촌 '안동네'의 대장 같은 이미지로 등장 한다. 비록 가난한 쪽방 살이 신세지만 동네 주민과 친구들을 챙기며 그 누구에게도 굽힘없이 살아간다. 또 그는 영화 속에서 부산에 있는 부모님과 아들을 만나러 가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미역 잡이 일을 열심히 하기도 한다. 상현은 안동네에선 든든하고 좋은 형님으로, 고향 집에선 좋은 아들이자 아버지로, 또 전국을 누비며 노동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야말로 가난하지만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사람이다. 
 반면에 ‘용가리’ 정선은 영화 내내 시종일관 땅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누워있다는 건 만취상태라는 이야기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항상 술에 절어있는 정선은 매우 나약해 보인다. 이 사람 저 사람 정선을 툭툭 치고, 놀리기 일쑤인데도 정선은 그저 술에 취해 희미한 눈동자로 응대할 뿐이다. 그가 ‘용가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등을 한가득 메우고 있는 용 문신 때문일 것이지만, 그 용가리는 아무런 힘도 없는 폐인에 불과한 정선 곁을 외로이 지킬 뿐이다.  
 
 나는 이 영화가 상현과 정선의 실제 모습을 심하게 왜곡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안동네 쪽방 주민들 중에 유독 이 두 사람을 ‘왕초’와 ‘용가리’로 캐릭터화하여 보여준 영화의 의도에 대하서는 그 속내가 매우 불손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왜곡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이 꼭 이 영화의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홈리스(주거가 부재하거나 불안정한 사람)가 가장 힘든 것이 배고픔 때문일까. 홈리스는 이야기 한다. 지나는 행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멸시의 시선이 가장 견디기 힘들다고. 세상은 홈리스를 착한 홈리스와 나쁜 홈리스로 분리시킨다. 영화 속 ‘왕초’ 같이 비홈리스(소위 평범한 사람)도 갖기 힘든 부지런함과 리더쉽 그리고 책임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우여곡절 끝에 쪽방촌으로 흘러 들어갔으면 용서한다는 표시로 ‘착한 홈리스’로 분류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의 홈리스들은 소위 술에 절어있는 폐인으로 매도당한다. 
 분명 안동네에는 ‘왕초’와 ‘용가리’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캐릭터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가난하지만 저마다의 특별한 삶의 방식들을 영위하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보석 같은 이들을 깊이 있게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가 선택한 두 명의 캐릭터는 우리에게 말한다. 착한 홈리스와 나쁜 홈리스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옹호 받고, 동정 받아야 할 홈리스와 그렇지 않은 홈리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세상은 자신들의 편견과 멸시의 시선을 수정하지 않기 위해서 빈곤에 대해 있지도 않은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그 익숙한 시선을 그대로 쫓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홈리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빈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점검해보게 된다.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면 되고, 안경의 도수가 안 맞으면 렌즈를 새로 하면 될 텐데. 나는 지금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에 안경점으로 뛰어가고 싶게 하고 싶다. 그 동안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았던 자신의 썩은 눈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 할 텐데.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콜트콜텍, 동양시멘트 등의 노동자 여섯 명이 광화문의 한 건물 광고탑에 다시 올라 '정리해고·비정규직·노동악법 철폐와 노동법 전면 개정'을 외치고 있습니다.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존중 받는 세상이 만들어지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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