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4주일 및 어린이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건강하게 양육하도록 마음 모아주세요.
2. 우리교회에서 내일(8일) 오전 11시에 은평동지방 교역자회의를 개최합니다. 시간 되시는 분은 교회에 오셔서 대접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오후에는 봄맞이 대청소와 지방 교역자회의를 준비를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 오후에는 묵상화 생활 나눔 기도회로 모입니다.
4.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이 오전 11시, 7강으로 열립니다.
5. 이번주 화요일(9일)은 5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갈 대통령을 선거하는 날입니다. 후보들의 공약을 꼼꼼히 살펴보시고 신앙적 가치관에 따라 투표해 주십시오.
6. 이번 목요일(12일) 저녁 7시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는 감리교시국대책위원회가 주관하는 세월호 기도회가 열립니다.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5월 생일 축하] 민지애, 임수현(4일) 이준기, 방정혁(14일) 고남곤(18일/음4.23) 박차오름(22일) 손창호(24일)
[촛불교회 안내] "사드 철거, 한반도 평화" | 5월 11일(목) 오후 7:30 / 미대사관 앞 광화문광장
■ 목회서신
나무들이 왕을 뽑고자 하여 나름대로 신망 있고 존경 받는 나무들을 찾아가 왕이 돼달라고 했습니다. 그 나무들은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로 좋은 열매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나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어찌 이 귀한 일을 그만두고 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뛸 수 있겠느냐'고 거절하였습니다. 아무도 왕이 되려고 하지 않자 '모든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시나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내 그늘 아래로 와서 숨어라. 가시덤불에서 불이 나와 백향목(최고급 건축자재로 쓰이는 귀한 나무)을 살라버릴 것이다'라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요담의 예리한 풍자를 담은 우화입니다.
가시나무에 무슨 그늘이 있겠으며 무슨 불이 나오겠습니까? 좋은 나무들도 고사하는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오히려 불편만 더해주고 해를 끼치는 가시나무가 애초에 무슨 왕의 자격이 있겠습니까?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 글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과 함량미달인 존재가 더 그럴듯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과 비선실세가 정상적인 국가체계를 농락하며 국정을 주무르다가 탄핵되고 갑자기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의 선택이 탄핵으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다수결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고 바른 선택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두려우면서도 겸허하게 깨닫습니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에 열다섯 명이나 되는 후보들이 저마다 자신이 바로 한국을 새롭게 할 적임자이며 국민을 섬기는 참된 후보라고 떠들어 댑니다. 여기에는 가시나무와 올리브나무, 포도나무가 뒤섞여 있어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헷갈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삶, 했던 말, 그들이 함께 했던 사람들, 그들이 미워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를 미워하는 사람, 억울한 사람을 위해 송사를 한 사람, 백신을 나눠준 사람, 촛불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 무상급식을 없앤 사람, 평생 노동자와 함께 한 사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실 사람을 선택하세요.
■ 좋은만남 이모저모

지난 주일은 주문진의 황토팬션에서 맞이하였습니다. 열일곱 명의 성인과 두 명의 어린이가 1박2일의 일정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인원이 많고 출발 가능한 시간대가 달라 세 팀으로 나누어 이동하다 보니 아쉽기는 했지만 세 팀이 나름대로 다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설악산과 강릉, 주문진 영진해변을 두루 다니며 알짜배기 관광을 한 것 같습니다. 첫째 날 저녁은 최근규 청년이 정성껏 준비해준 덕분에 아주 신선하고 맛나는 생선회와 매운탕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두부조림도 별미였습니다. 오랜만에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단지 다음날 너무 피곤했다는 것이 ㅡ_ㅡ;; 피곤하긴 했어도 할 건 다 하고 서울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들, 섬겨주신 분들,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도 함께 해주신 함 장로님께 감사드립니다.
“은평동지방 교역자회의를 우리 교회에서 합니다”
우리 지방에 속한 교회 목회자들의 월례회의인 지방교역자회의가 8일(월)에 우리 교회 예배당에서 열립니다. 우리 지방에는 총 서른세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여건이 되지 않는 작은 교회들도 있습니다만 이 교회들이 감리사 임기인 2년 동안 돌아가면서 교역자회의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번 5월에 우리 교회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배와 회의 이후 식사대접을 하는데 이번에는 식당에서 하기 보다 교회에서 직접 만들어 대접하는 것이 경제적이고 정성도 깊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관심 갖고 식사대접 준비를 도와주시고 시간 되시는 분들은 월요일에 오셔서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교회와 사회
노동절 참사를 보며 노동절의 의미를 되새긴다 | 방현섭 목사
지난 5월 1일은 국제노동절로 'May Day(메이데이)'라고도 합니다. 1884년 미국의 방직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노동절은 1889년 제2 인터내셔널 파리총회에서 5월 1일을 노동절로 지키기로 선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은 각국의 대표 정당과 노동자 대표들로 구성된 국제 협의체입니다. 노동절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같은 좌파 사회주의 이론가와 활동가들에 의해 사회의 계급적 구조가 폭로되고 이에 따라 계급적 이익에 따른 노동자의 권리 쟁취 등을 목적으로 하여 노동조합운동과 결속하는 뿌리 깊고 전통 긴 노동자들의 운동이 쟁취한 소중한 날입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한국에는, 아니 전 세계에는 노동절에 쉬거나 노동자의 권익 옹호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더 많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을 극단적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것인 양 색안경을 쓰고 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노동이 '막일'을 의미하는 단어로 왜곡되었고 근로자라는 말을 더 선호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것이 그저 사용자(기업)가 호의로 던져줘야 얻어먹을 수 있는 은혜로운 먹이 정도로 여기기도 합니다. 기업, 특히 대기업이 국가경제를 책임지고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는 그릇된 믿음이 팽배한 한국에서 노동자는 그저 자본가들이 입맛대로 골라 쓰기 좋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옛날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의 권리는 그저 '노동3권 보장'이라는 법적 구호로만 남아 있습니다.
2017년 한국의 메이데이, 여섯 명의 노동자가 노동악법을 철폐하라며 광화문 사거리 9층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전광판 위에 올라가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중 한 명은 5일, 단식 22일만에 건강악화로 농성장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또 거제도의 조선소에서는 크레인이 붕괴돼 여섯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고 스물두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하청업체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노동절이라 쉬는 정규직을 대신하여 노동절에도 쉴 수 없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을 하다가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노동하는 사람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을 먹여 살리는 것은 대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입니다.
■ 한자락 詩

지금 이곳에 오지 않는 건
미래에도 오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서 싹이 트지 않는 건
내일이 와도 꽃이 될 수 없다
지금 이곳에 없는 해방은
미래가 와도 오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오지 못할 평등이라면
미래가 와도 결코 오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해방이라면
지금 우리들 가운데 와 있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평등이라면
지금 이곳 우리들 손길에 와 닿아야 한다
저들의 가치가 욕망과 독점의 가치라면
우리의 가치가 나눔과 평등의 가치라면
삶을 나누고 투쟁을 나누고 가치를 나누고
그리고 노동을 나누어야 한다
노동의 독점에 저항해야 한다
내가 가진 노동을 나누어야 한다
나눔을 잃어버린 싸움은 미래가 없는 싸움이다
나눔을 잃어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성큼 다가와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은
미래에도 없다
장막을 거둔다고 새 땅이 열리는 것 아니다
영토를 차지한다고 새 세상이 열리는 것 아니다
지금 이곳에 우리들 가운데 오지 못할 것이라면
미래에도 결코 오지 않는다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기분 「제네시 일기」
기분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곳 제네시에서 보낸 처음 몇 주간 동안 나는 갑작스럽게 변하는 색다른 기분에 휘둘리는 자신을 보았다. 침울하게 기가 꺾이는 느낌, 자신이 비참해지는 느낌, 지루함· 분노·짜증·미움·고마움·기쁨·흥분이 모두 거기 있었고, 때로는 하루 사이에 그 모든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이 모든 변덕스런 기분은 친구의 다정한 몸짓, 유쾌한 노동, 칭찬하는 말 한마디, 좋은 책 한 권 등 내게 다가오는 일에 스스로 얼마나 집착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소한 사건 하나가 순식간에 슬픔을 기쁨으로, 불평을 만족으로, 분노를 이해와 연민으로 바꿔놓았다.
어디선가 슬픔은 집착의 열매라는 글을 읽었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언제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일과에 따라 주어진 일이 재미없을 때 나는 금방 지루해했고, 때로는 괜한 시간 낭비를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마음이 끌리는 책을 읽을 때면 시간이 후딱 지나갔고,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할 때는 여기 머물기를 잘했다 싶고 모든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분’은 허망한 집착의 표현이며, ‘무심(無心, indifference)’의 경지에 이르려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깨어진 인간관계 「안식의 여정」
사람들이 겪는 대부분의 아픔이 깨어진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확신한다. 분노와 질투와 앙심, 거절당한 느낌, 이 모두가 하나 되어 어울리고 서로에게 깊은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갈등에서 온다.
어쩔 수 없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성삼위를 함께 살 집으로 삼은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것을 주시고, 완벽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한 데 대해 서로를 용서하는 은혜도 아울러 주시리라 믿는다.
부모의 기대를 채우려는 아들 「탕자의 귀향」
탐욕스런 둘째 아들보다 무정하고 적개심을 품고 화를 내는 맏아들이 정신적으로 나와 더 가까움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와 닮아 있는 나를 본다. 맏아들인 나는 모범적인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어느 집이나 특히 맏아들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드리고 말 잘 듣고 자기 책임을 다하는 자식이 되고자 애쓰는 것 같다. 그들은 어떻게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려 애쓰며 부모가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면서 상대적으로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부모에게 별로 마음 쓰지 않는 듯한 동생들에게 질투를 느낀다. 내 경우가 그랬다.
나는 한평생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부모에게 불복하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친구가 그렇게 살았다. 나는 언제나 붐 같은 존재(교사·영적 지도자·주교·교황)가 만들어 준 일정표에 따라 고분고분 살아왔고 매사에 모범생이 되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가끔 어째서 나는 둘째 아들처럼 용감하게 뛰쳐나가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제멋대로 처신하는 둘째 아들에 대한 시샘이 있었다. 나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을 두루 섭렵하며 인생을 즐기는 친구들을 볼 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왜 나는 그런 짓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지 늘 궁금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아우의 방탕과 형의 적개심 가운데 어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는지 생각해 보았다. ‘의로운 사람들’과 ‘옳은 사람들’ 사이에는 많은 적의敵意가 있다. ‘성인들’ 사이에도 많은 판단과 비난과 편견이 있다 어떻게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사이에 얼어붙은 분노가 참으로 많음을 알았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당신의 숲’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
# 영화 "숲 속에서" | 수잰 크로커 감독, 2014년

영화는 특별히 어떤 한 사람의 나레이션이나, 특정인물의 시점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두 부부와 4살 6살 10살의 삼남매, 개 한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의 모습을 포착하고, 그 영상 밑으로 다섯 가족의 인터뷰가 마치 수다하듯 끊임없이 흐르는데, 당시 자신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고, 보는 이들과 함께 삶의 의미를 공유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과 반려동물들이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그리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의 감독인 수잰 크로커는 외부인이 아니라 삼남매의 교육을 위해 책을 읽어주고,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던 어머니 자신이었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 아니 이 가족의 정체는 더욱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들은 왜 힘겨운 야생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런 다큐멘터리를 직접 만들게 된 것일까.
이 다큐의 원제는 <all the time in the world>이다. 직역하면 ‘세상의 모든 시간’ 정도가 될 것이다. 프롤로그에 이 가족이 숲에 들어가는 이유가 간접적으로 제시되는데, 매우 빠른 속도로 편집된 영상과 신경 쓰일 정도로 크게 울려 퍼지는 시계의 초침소리는 그 동안 이들이 현대사회 속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역으로 그 거대한 초침소리는 이들로 하여금 왜 숲 속으로 들어오게 했는지 또한 이야기 해준다. 사실 우리는 온갖 시계 속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하지만 시계에 둘러싸일수록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숲 속에서의 삶이 물리적으로 시간이 남아돌고, 시간적으로 여유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 숲 속에서의 삶은 물리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오히려 별 것 아닌 일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면을 하려면 물을 구하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직접 강가에 가서 물을 길어야하고, 밥을 하려면 불을 지피기 위해 땔감을 만들어야 한다. 초침소리 요란한 도시나, 숲이나 시간이 없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all the time’은 ‘항상’으로 직역되지만 이는 본인이 누리는 주관적인 시간을 말한다. 초침소리에 쫓겨 다니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계획해서 살아가는 ‘나의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숲의 시간은 오롯이 나의 시간이며 내 가족의 시간이 된다.
그리스도인에게 ‘시간’은 ‘하나님’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간을 인식 할 수 있게 표시하는 ‘시계’로 둘러싸인 삶에 진정한 ‘시간’이 없듯,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교회’로 둘러싸인 삶에 진정한 하나님이 부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all the time’은 오롯이 내가 만나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규칙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아무리 바쁘게 종교생활을 뺑뺑이 돌리듯 강요해도 결국 하나님과의 조우는 우리 스스로가 ‘숲’으로 들어가 만날 일이다. 시계는 다만 시간을 표시하는 기계에 불과하고, 교회는 다만 하나님을 아는 이들이 모인 공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신의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권한다. 그 숲에서는 하나님 뿐 아니라, 당신의 삶과 당신의 가족, 그리고 불안하고, 힘겨운 삶의 변곡점들을 헤쳐나갈 용기와 지혜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어디에 있을까? 나만의 숲은.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이번 화요일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다 사람답게 살고 존중 받으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폭력과 차별, 위기와 분열을 조장하는 모든 세력을 심판하고 평화와 평등, 정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