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7.05.20 20:00

2017년 5월 21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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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6주일 및 279주년 웨슬리회심기념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감리회 운동으로 산업혁명 당시 혼란한 영국을 변화시킨 존 웨슬리의 정신이 오늘날 되살아나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주일은 청소년주일입니다.
2. 다음주일(28일) 오전 10시 30분에 네 개의 작은교회가 연합하여 감리교일영연수원에서 모여 함께 예배하고 체육대회를 합니다. 작은교회들이 함께 만나 교제를 나누고 예배하는 뜻깊은 연합행사에 많이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교회차량은 9시 50분에 출발하겠습니다.
3. 건강 문제로, 직장 문제로 기도하는 교우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촛불교회 안내]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회" 5월 25일(목) 오후 7:30 / 미대사관 앞 광화문광장

■ 목회서신
참 신앙, 좋은 신앙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저 역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다가 결국 목사가 되기까지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참 신앙에 대한 개념이 혼란스럽습니다. 벌써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거한지 벌써 50년 가까이 되다보니 알게 모르게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이 뼈속 깊이 배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신학대학에서 신앙의 새로운 국면에 대한 이해와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시는 창세기의 말씀을 주일학교에서부터 배우면서 곧이곧대로 사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단군신화에서 곰이 여자가 된다는 이야기 같은 것은 한 민족의 개국과 관련한 설화로 이해하면서도 창조의 이야기는 전혀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창세기의 이야기 역시 당시의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앙을 교육하기 위한 설화이고 설교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그동안 믿었던 것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종교적 상징과 언어를 이해하면서 오히려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십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것도 기꺼이(덮어놓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그 말을 맞습니다만 그 용도는 전혀 달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원칙들을 지켜나가기 위한 사회적 가르침이라기보다는 개체교회와 목사, 설교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강요였다는 느낌이 더 많습니다. '진리, 정의와 자유, 평등과 평화를 위한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의심치 말고 희망을 가져라'는 믿음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논리로 흘렀고 결국 목사의 권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현대는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 시대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도 의문을 갖고 봐야 되는 시대, 물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의 이해를 통해 보다 견고한 반석에 발을 딛고자 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참 신앙은 그렇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다음주일에 작은교회 연합 야외예배를 합니다”
드디어 다음주일에 우리교회와 가재울녹색교회(양재성 목사), 동녘교회(김경환 목사), 모퉁잇돌교회(김기원 목사)의 80여명 교우들이 함께 하는 연합 야외예배, 체육대회가 열립니다. 예전에 초록가게로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던 백석교회(신석현 목사)는 이번에는 아쉽게도 함께 하지 못합니다.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모여 함께 예배(사회 방현섭 목사, 설교 김경환 목사, 기도 모퉁잇돌 성도 중)와 성찬(집례 양재성 목사, 보좌 각 교회 교우 1인)을 하고 이어서 점심식사를 하고 대운동회로 두 팀으로 나누어 남녀 혼성으로 배구, 족구, 배드민턴 게임을 합니다. 소운동회도 이어지는데 5인 줄넘기, 돼지몰이, 3인4각 등 소소한 게임을 한 뒤 보물찾기로 피날레를 하게 됩니다. 상품도 푸짐하게 준비할 예정입니다. 행사는 3시 30분 즈음에 끝나게 됩니다. 점심식사는 각 교회에서 개별적으로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김밥, 치킨 등을 준비할까, 아니면 삼겹살을 구워 먹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가능하면 다른 교회와 함께 뒤풀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좀 귀찮기도 합니다만 작은 교회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한 자리에서 교제를 나누며 이 시대의 대안들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으니 많이 참석하셔서 즐거운 시간으로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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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와 사회 | 방현섭 목사
문빠와 언론의 대결, 자제와 자성이 필요하다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뀐 느낌입니다. 사실 대통령이 자기 밥을 직접 퍼 먹는다든지 도움 없이 혼자 양복저고리를 벗는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만 지난 10여년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보니 새삼스레 놀라고 감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소위 '문빠'들이 너무 과도하게 문재인 대통령 수호천사를 자처하면서 문제가 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 언론에서 문 대통령 부인을 '김씨'라고 호칭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문 대통령 지지자들이 반발하면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과거 억압적 보수정권 하에서는 대통령 부인에게, 심지어는 일본 천황 부인에게까지 꼬박꼬박 영부인, 여사라는 호칭을 붙이더니 왜 탈권위적인 이번 대통령에게는 함부로 하느냐는 주장입니다. 언론사는 예전부터 영부인 등의 호칭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고 해명하였지만 네티즌들이 이런 해명과 상반된 기사들을 찾아 증거로 들이밀었고 해당 기자는 네티즌을 고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몇몇 기자들은 '문빠와 전쟁을 하겠다'는 식의 글을 SNS에 올려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보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 본인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합니다만 그동안 보여준 행보로 추측해보면 아마도 그런 호칭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어쩌면 당연하게 여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난 권위주의 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또 그런 정부에 대해 쓴 소리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받아쓰기에만 급급했던 언론을 보면서 답답하고 화가 났을 법한 국민들이 마음 또한 이해는 갑니다만 사사건건 언론을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권력의 일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는 언론이 적당히 사과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언론의 본분이 비판이니 하면서 맞짱을 뜨는 것도 과한 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대통령 지지자들은 자제가, 언론은 자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격렬한 선거를 치르면서 갈라진 분열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앞장서 섬김의 정치를 보여주고자 노력하는데 이런 방식의 분열과 대결은 결국 모두의 상처가 될 뿐입니다. 그저 국민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마음을 모으는 성숙한 자세가 절실합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1999년 개봉된 이영재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강원도 산골 산리초등학교에 홍연이(전도연)라는 열일곱 살 늦깍이 초등학생이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초등학교 2학년 생이다. 그는 철없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정신없이 놀다가 엄마가 부탁한 빨래를 삶다가 빨래를 태워버린다.
밭에서 돌아와 야단치던 엄마를 피해 도망 나온 홍연이는 산리초등학교에 부임하는 스물한 살 강수하선생님(이병헌)과 만나게 된다. 강선생은 자기반 학생인 줄도 모르고 홍연에게 길을 묻는다.
“아가씨! 여기 초등학교가 어디 있어요?”
홍연은 자기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부끄러운 표정으로 초등학교 방향을 가리킨다. 선생님이 간 뒤에 혼자 남은 홍연은 굵은 남자 목소리로 선생님의 흉내를 냈다. “아가쉬!” “아가쉬!”
이 영화는 그 이후로 홍연이가 선생님을 좋아하면서 겪게 되는 성장과정을 그린 마음 따뜻한 영화이다. 그런데 홍연이에게 선생님이 불러준 “아가씨!”라는 한마디가 동생들과 싸우기만 하고 철딱서니가 없던 그를 아가씨로 변하게 했다. 
자신이 아가씨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더 이상 동생들과 다투지도 않고, 고무줄놀이도 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홍연이를 아가씨로 부른 한마디가 그의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뜨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는 상 속에서 한 줌 흙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던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자기 자리가 어딘지,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던 우리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 우리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소중한 가치가 되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느낌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
그동안 얻은 줄 알았던 것을 한꺼번에 다 잃은 듯한 느낌이 들더라도 낙심하지 마라. 치유라는 게 그렇게 곧은 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뒷걸음치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잃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라고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다. 네가 얻은 것은 얻은 것이다. 
사소한 일이 너를 한순간 비틀거리게 하는 때가 있다. 피곤함, 누군가의 냉정한 반응, 네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의도적 거절과 같은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면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걸 때마다 길에서 멈출 궁리를 하지 말고 문제를 깊이 성찰하라. 그러고 나서 다시 섰을 때, 거기서 네가 처음 길을 떠났던 출발점이 아니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바로 그 지점임을 깨달아라. 
네가 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될 때 한순간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진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곧장 네 안에 있는 집으로,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그 순간들이 비슷한 순간을 만나 손을 잡고 정말로 너를 길에서 멈춰서게 할지도 모른다. 별로 해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네 ‘어지러운 마음distraction’을 알아차리도록 깨어 있어라. 길가 수렁보다 갓길에서 돌아오기가 더 쉽다.
네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심을, 그 하느님이 너에게 좋은 길벗을 선물로 졌음을 믿어라. 자유를 향한 네 길로 끊임없이 돌아오라.

주소를 잃은 사람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
머리와 가슴이 여러 가지 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과연 내가 자신과 사람들의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는지를 생각하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돌아치면서도 마음이 흡족하고 평안할 때는 거의 없다. 뭔가 많이 부족하다는 씁쓰레한 느낌이 우리 인생 밑바닥에 흐른다. 
지루함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못한 데서 오는 느낌이다. 여러 가지 일로 잔뜩 바쁘면서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한 이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고 예측하지 못한 돌발 사태가 꼬리를 문다. 지루하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듯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의 가치를 의심한다는 듯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역설은 사람이 바쁘게 살면서도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이 일 저 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속으로 의심한다. 쏟아지는 일거리와 책임을 감당하느라 쩔쩔매면서도 이 모든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사방에서 부추기는데 그들이 정말 우리를 위해 그러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한마디로 빈틈없이 꽉 차게 살면서 여전히 모자란 느낌이다.
이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에게 주소가 있는데 그 자리에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잘 안다 그런데도 노숙자처럼 이리저리 헤맨다. ‘이 모든 일’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를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다양한 일이 우리를 집에서 너무 멀리 데려가는 바람에 우리는 주소를 잊어버린 신세가 된다.
가득 차 있으면서 모자라고, 바쁘면서 지루하고, 있을 곳이 많으면서 집이 없는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향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신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은, 먼저 우리가 집 잃은 신세로 근심 걱정에 파묻혀 하루하루 뭔지도 모르고 살고 있음을 정직하게 고백할 때 들을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집으로 돌아가려는 간절한 마음이 든다.
예수께서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길 위에서 만나는 하나님이라(2)  ”

#  영화 "길" | 남태제 감독, 2017년
20170521_002.jpg 불의한 지배체제와 이권을 독점하는 소수의 세력은 우리 사회의 곳곳에 흡협귀처럼 잠복하여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그것은 예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세례요한에서 예수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 뒤에 사도들의 피끓은 외침이 이어 졌음에도 흡혈귀들의 활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나도, 40년이 지나도 아무리 퇴치하고 쫓아 내도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여지없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 대는 이 흡혈귀들의 존재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와 상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흡혈귀들이 없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면, 하나님 나라는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길’ 위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구불구불 거리고 때로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오르막길을 만날 지라도 길 위를 함께 걷는 이 여정 자체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을 다룬 이광재의 소설 <나라 없는 나라>의 에필로그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동학이 패퇴하고 죽음을 맞이한 선생과 제자가 혼이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선생님 저 재를 넘으면 무엇이 있습니까” 
-“몰라서 묻는게냐. 우리는 이미 재를 넘었느니라. 게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이 재 너머에 있던 것들이다.”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아니다. 재는 또 있다.”
-“그럼 그건 어쩝니까”
-“그냥 두어도 좋다.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 길이 멀다. 가자꾸나.”

시사회에 모였던 학생과 교수 그리고 30년의 간격을 넘어서는 선후배의 만남을 보면서 길을 함께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와 닿았다. 실은 막막하리 만치 답답한 발걸음을 걷는 우리라지만 역사의 실오라기가 이어져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걷는 길의 의미는 실로 가볍지 않다. 이 길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이 길 위에 있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 <길>은 몇 차례의 시사일정과 마무리 편집작업이 남아있다. 또 김문기 일당이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다큐인’을 고소하는 바람에 법정싸움 또한 남아있다. 하지만 어서 완성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 <길>을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영화를 통해 우리 각 자에게 주어진 “길”의 의미와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길 위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숨결은 여러모로 나를 설레게 하니 말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세월호 희생자 미수습자 수색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창석 선생님과 허다윤 학생의 유해가 발견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속히 나머지 미수습자들도 발견되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무더위에 수색하는 분들도 힘을 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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