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3주일 및 순교자기념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오늘은 박성중 목사님이 토크쇼 공동설교 '학교를 말하다!'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패널로 출연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 다음주일(7월 2일)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며 오후에는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댁으로 농촌생태활동을 가겠습니다. 콩심기를 하고 저녁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원하시는 분은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3. 남기평 목사님이 6월 26일부터 7월 8일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주관으로 유럽 평화조약캠페인을 위한 출장을 가십니다.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
4. 예배당이 강제수용된 경남 빛마을교회를 위한 탄원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5. 감신대 이사회의 독단적 파행으로 장혁 청년 등 신학생들이 농성과 기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민주적 학교 운영을 위해 싸우는 학생들을 기도로 응원해 주십시오.
[촛불교회 안내] "콜트콜텍 부당해고 노동자를 위한 기도회"
6월 29일(목) 오후 7:30 / 여의도 콜트콜텍 농성장(자유한국당사 앞)
■ 목회서신
미국 버지니아 대학 학생인 오토 웜비어라는 2015년 말 중국을 통해 5일간의 새해맞이 북한 관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관광상품에는 총 11명의 미국인이 참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웜비어는 여행 도중 돌출행동을 하여 출국 직전 북한 공안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죄목은 그가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가 북한의 선전물을 절도하려고 훼손하였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 노동교화형 1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고 최근 의식불명 상태로 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엿새 만에 사망하였습니다. 우선 웜비어의 사망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들을 위한 위로의 기도를 올립니다. 미국은 깊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물론 북한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매우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웜비어 사건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청년의 괜한 객기가 국제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 더욱 속상한 일이 있습니다. 며칠 전 종편인 JTBC에서 방영한 썰전에서 나온 내용을 보면 웜비어가 선전물을 떼어 가지고 가려고 했던 이유가 친구 어머니가 성공하면 중고차를 주고 실패하면 20만 달러(2억 원 상당)를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AP와 신화통신은 그 친구 어머니가 이것을 부탁한 이유가 자신이 집사로 있는 교회에 걸어둘 목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이 말이 사실이라면 교회는 젊은 청년의 목숨을 걸고 무모한 도박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세한 속내는 모르겠지만 추측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 교회는 북한이 어서 빨리 복음화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가지고 온 상징물을 하나 앞에 걸어놓고 3부자 세습도 모자라 신격화, 우상화하는 북한이 어서 빨리 무너지게 해달라고 더욱 힘내 기도하자고 교인들을 독려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자신의 개인 재산을 기꺼이 내놓아 이런 상징물을 구해오려는 믿음 좋은 성도였을 것이고요.
안타깝습니다. 과연 이런 것이 복음화이고 이런 것이 전도일까요? 웜비어의 죽음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였을까요? 목숨까지 걸며 괜한 분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다음주일 오후, 농활을 빙지한 강화도 소풍을 갑니다"
다음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요즘은 농경문화가 많이 사라져서 보리 추수의 의미가 별로 크지 않아 우리교회는 맥추감사주일을 기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려고 합니다. 맥추감사의 예배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농촌생태활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여름 추수와 가을 농사준비를 통해 감사하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작년 가을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에서 고구마 캐기로 농촌생태활동을 한 기억이 있으시죠? 올해에도 이필완 목사님, 김미영 사모님이 우리교회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주중에 강화도에 다녀올 기회가 있어서 이 목사님 댁을 들렀습니다. 밭 한 이랑에 심어 놓은 밀은 벌써 노랗게 익었습니다. 하지 감자도 조금 심으셨다는데 그건 다 캐내셨네요. 이번 주중에 밀을 베고 그 자리에 콩을 심으신다는데 우리교회가 와서 콩 좀 심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많은 양이 아닙니다. 또 겨울에 방을 따뜻하게 덮혀줄 솔방울과 솔잎, 잔솔가지 등을 뒷산에서 좀 주워달라고 하십니다. 그것 역시 큰 일은 아닙니다.

서울을 벗어나면 시간의 흐름이 금새 달라집니다. 쏜 살 같은 시간이 하늘 위 새털구름 흘러가듯이 천천히 갑니다. 이 목사님 내외를 만나고 함께 땀 흘리고 저녁식탁을 나누면서 우리가 사는 모습, 우리가 보내는 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이자 목적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누구나 환영합니다.
■ 교회와 사회
한미 관계, 상식적 국가 관계로 나아가야 - 방현섭 목사
문정인(연세대 명예교수) 통일외교안보 특보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한 발언이 일파만파이다. 그가 한 문제의 발언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와 한미연합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또 '사드 해결 안 되면 한미동맹 깨진다고 한다. 그게 무슨 동맹이냐. 사드는 무기체계, 방어용 무기체계다. 그걸로 동맹이 깨진다? 사드가 동맹의 전부인 거처럼 말하는 것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발언도 도마 위에 올라가 있다.
이 발언을 놓고 자유한국당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문 특보의 발언은 지난 50여년간 피로 지켜온 한미동맹을 한 방에 깨트릴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며 "문 특보는 우리 외교안보의 폭탄이나 마찬가지이니 사퇴하라"고 주장했고 바른정당 김영우 의원은 "문 특보는 김정은의 외교안보 특보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 언론의 소위 '트럼프 격노' 기사까지 가세하고 있다. 출처도 불분명한 취재원을 들어 트럼프가 격노했다는 기사를 문정인 특보의 발언과 결부하였고 이를 받아 쓴 다른 수구 언론들은 '책상을 치며' '배은망덕하다며' 등의 단어를 첨가하며 확대재생산하였다. 사실 트럼프의 격노는 문 특보 발언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수구정당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 특보의 발언이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태도만 보인다.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고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미국의 전략과 문재인 정부의 전략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미국의 입장을 감히! 한국이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대주의적 태도로밖에 볼 수가 없다. '문 특보가 김정은의 특보'라는 비판은 그대로 자신들에게 적용될 것이다. 자신들은 트럼프의 정당인가?
문 특보와 미국행에 동행했던 정의당 김종대 의원은 페이스북에 '사실 문정인 특보의 말은 북핵문제에 대한 적극적 자세를 모색하는 상식 수준의 이야기였다. 대부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말한 내용이다. 정작 미국보다 국내에서 미국 정책에 거스른다며 온통 난리'라는 글을 올렸다. 한미관계가 일방적으로 가서는 안 된다. 국가의 자존심도 문제거니와 국제 외교계에서도 이미 동의하고 있는 내용을 놓고 '한미동맹을 한 방에 깨뜨릴 수 있는 발상'이라느니 하는 속내는 결국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수구세력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춘추 전국 시대 조나라의 상인으로 세상의 흥망성쇠를 읽는 눈과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판단력이 매우 비상했던 진(秦)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인재를 뽑을 때 쓴 사용했다는 여섯 가지 기준있는 데, 이 기준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사람을 평가, 등용, 배치하는 데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여불위의 육험론(六驗論)이다.
첫째, 낙(樂), 즐거움을 조절할 수 있느냐?
둘째, 희(喜), 성공했을 때 자제할 수 있느냐?
셋째, 고(苦)’ 괴로움을 참아낼 수 있느냐?
넷째, 공(恐), 두려움 앞에 담대할 수 있느냐?
다섯째, 비(悲),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여섯째, 노(怒), 노여움을 자제할 수 있느냐?
사람은 실패해서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것은 잘 될 때 망한다는 것입니다.
명예가 생기고 부가 생기면 기고만장 해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것이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그 사람에게 돈을 줘 보고
감투를 씌어 보고 칭찬을 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절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
분노를 조절하여 괴로움을 참아내고 담대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아니,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지금 인재는 넘쳐 나도 인물이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집 없음 「주님의 집에서」
오늘 이 시대의 괴로움을 한 마디로 요약한 단어 가운데 ‘집 없음homeless’만 한 게 있을까?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하고 아픈 현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과 보호받고 사랑받을 안전한 장소가 없는 현실이 ‘집 없음’에 그대로 드러난다.
가정에서 우선하는 분명한 가치는 누가 뭐라든 친밀함이다.
‘여기 있는 게 불안하다.’(I do not feel as home here를 직역하면 ‘여기서는 집에 있는 느낌이 아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친밀한 교제가 허용되지 않는 불편함을 드러낸다. ‘집에 갔으면 좋겠다. I wish I were home.’는 말은 소속감을 주는 친밀한 장소가 그립다는 뜻이다.
비록 사람들이 가정에서 갈등을 겪고 많은 고통의 뿌리가 가정에서 시작되며 ‘결손가정’이 수많은 범죄와 질병의 온상으로 비난받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따뜻한 사랑과 행복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삶을
‘집으로 돌아감’으로, 죽음을 ‘마침내 집으로 돌아옴’으로 경험하라고 한다.
길 잃은 나 「탕자의 귀향」
더 이상 하느님을, 어떻게 해서든 내가 찾아낼 수 없도록 숨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숨는 나를 찾으시는 분으로 생각할 때 나의 영적 여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길 잃은 나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고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때 내 삶은 그만큼 덜 불안하고 굳건해질 것이다.
하느님이 나를 찾아 집으로 데려오시고, 천사들과 함께 내 귀가를 축하하고 그 기쁨을 맛보시게 하는 일이야말로 좋은 일 아닌가? 길 잃은 나를 찾아내 아낌없이 사랑하시도록 하느님께 기회를 드리고 웃게 해드리는 것만큼 신나고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
이런 물음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문제를 던진다. 과연 나는 하느님이 찾으실 만큼 귀한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이는가? 진정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신다고 믿는가?
부서지기 쉬운 쉼터 「친밀함」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낄 때 서로를 안고 절망과 고독 속에서 서로를 껴안는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서로에게 매달린다.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도 위험한 세상에서 도피하여 깊은 절망을 잊고, 잠시나마 긴박한 위협이 주는 견딜 수 없는 긴장을 풀어 보려는, 그리하여 어떻게든 따뜻하고 안전한 보호를 경험해보려는 욕구의 표현일 따름이다. 이런 몸짓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성장하며 각자 발견한 것을 나눌 장소를 제공하지 못하며, 휘몰아치는 세상의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일 뿐이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기찻길 옆 텐트살이 ”
* 용산역 옆 작은 숲에는 30여개의 텐트와 박스집이 있습니다. 집이 있다는 건 그 곳에 사람이 산다는 뜻이겠지요? 그렇습니다. 10여년부터 집을 잃고 갈 곳 없어 거리에서 생활하시던 분들이 용산역 옆 이 작은 숲에 한 분 두 분 모여들기 시작하여 현재는 스무 분 정도가 모여서 삽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곳을 일명 <용산 텐트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와 송윤혁 감독은 지난 2월부터 다큐멘터리 작업을 위해 여기를 자주 드나들었고 급기야 지난 6월13일부터는 텐트를 치고 아저씨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촬영을 시작하였습니다.
2017년 6월 16일 <새벽을 깨우는 까치의 울음소리>
어젯밤 새로운 텐트에서의 첫날밤은 고요하게 지나갔다. 모기에게 잔뜩 뜯길 줄 알고 단단히 각오하고 머리를 뉘였지만 모기보다는 기차의 굉음과 불편한 잠자리가 복병이었다. 특히 베개가 없다는 사실을 때때로 인지하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새벽녘 익숙하지 않은 소음에 또 다시 눈을 떴을 때, 텐트 안은 이미 환한 상태였고 몇몇 발자국 소리와 나지막한 사람의 목소리가 새날을 알려주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게 밤새 뒤척거렸는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텐트 밖을 나서자 경진이형(가명)이 보였다. 새벽 5시가 채 안된 시간이지만 벌써 많은 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 듯 보였다. 도대체 누가 이들에게 게으르단 꼬리표를 달았는가. 하루의 시작을 이리도 일찍 시작하는 분들에게 말이다

경진이형과 모닝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의 머리 위에서 우는 까치 울음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기차의 굉음보다도, 옆 호텔 공사소리보다도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경진이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이지 않는 까치소리를 향해 연신 돌을 던졌다. 한참을 던졌지만 까치소리는 줄어들기는커녕 더 요란해진다.
여긴 모든 것이 부지런하다. 특히 기차의 굉음과 공사장 소음들의 부지런함은 덩달아 이곳에 뿌리박고 사는 생명들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하게 이끌어댄다. 이 새벽에 기차는 사람을 나르고 사람은 공사자재를 나른다. 기계가 돌아가며 덩달아 세상이 돌아간다.
예전 냉전시대 때 사회주의권 사람들은 게으르고 자본주의권 사람들은 부지런하다는 이분법이 통용되었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아래 가득한 이 부지런한 소음들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늘 이런 소음으로 가득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이 소음을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케 한다. 두꺼운 벽이 있는 집이나 지저분하고 분주한 땅 위를 벗어난 고층집이어야 이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1mm 두께의 텐트 속에 누워 있는 나를 포함한 이곳사람들. 또 나무 위에 얼기설기 지어진 둥지에 사는 까치들은 이 부지런한 소음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눈을 부비며 좋으나 싫으나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까치가 더욱 격렬하게 운다. 시도 때도 없이 쾅쾅거리는 공사장 기계소리에 불안해하는 듯하다. 까치들의 모습이 아저씨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기차 소리야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날지 예상가능 하다만 공사장 소리는 다르다. 어느 날 새벽 저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어느새 텐트촌 옆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다란 호텔 두 동이 섰다. 저 공사소리가 끝날 때 이 공간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곳에 10년을 살았다 한들 거대한 호텔사람들의 한마디에 이 작은 숲과 30여개의 집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사라질꺼다.
까치를 향해 혈기왕성하게 돌을 던지던 경진이형도 저 공사 소리를 향해서는 돌을 던지지 못한다. 우린 너무 약하니까.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것은 익숙하니까.
어느새 "저들의 공사소리가 그만 끝나버리면 어쩌지" 그 다음일이 궁금하고 불안하다가 애써 관심을 까치소리로 옮긴다. "이 시끄러운 녀석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계속되는 가뭄에 대지가 갈라지고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집니다만 마른 장마 소식으로 해갈의 기대조차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변덕 앞에 무기력한 인간 존재를 발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합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위한 단비를 내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