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성령과 동행하시는 가운데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빕니다.
2.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청소년 수련회는 8월 7(월)-9일(수)에 안산과 서울에서 열리는 예수살기 청소년캠프로 참가하려고 합니다. 7일 오전 10시에 교회에서 모여 출발합니다.
4. 어린이 여름성경학교는 8월 14(월)-15일(화)에 열립니다. 부모님들은 일정을 확인하시고 어린이들이 꼭 참가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5. 올해 여름 공동휴가 및 수련회의 일정 내용 등 의견을 내주시면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제안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6.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여행길에 나서는 교우 여러분들의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을 기도합니다. 음식과 교통에 특별히 신경 쓰시기를 바랍니다.
■ 목회서신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2년마다 이사를 다닌다고 합니다. 이유는 다들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셋집을 사는 사람들의 애환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는 전세값, 전세보증금 때문에 계약이 보장되는 2년이 끝날 때마다 5천만 원이 넘는 전세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하니 부담스러워 결국 좀 더 싼 집을 찾아 이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럴 바엔 차라리 빚을 좀 떠안더라도 집을 사자' 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물론 절반 이상이 은행빚이긴 하지만 2년마다 이사 다니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편하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솔직히 나는 좀 부럽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아무 금전적 부담이나 이사 걱정도 없이 살고 있으니 감사하긴 한데 만약 이 교회를 떠나게 되거나 목회를 정리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퇴직금을 적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리교회의 연금(은급제도)을 납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딘가에 전세보증금이 쌓여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 당장은 걱정 없이 살지만 목회를 마치는 순간 길거리에 나 앉아야 할지 모른다는 염려는 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베레아 귀신론으로 유명한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에 대한 고발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대형교회 목사처럼 김 목사도 역시 돈 문제(물론 돈 문제만은 아닙니다)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자기변호를 하면서 그동안 교인들에게 받은 봉투를 모아 놓은 것이라며 쏟아 놓는데 어마어마하더군요. 봉투 하나 당 20만원씩만 잡아도… 솔직히 그걸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과연 나는 금전적 이익을 위해 이 길을 가고 목회를 하는 것인가? 결코 아닙니다. 그동안 살아온 길을 되돌아 봐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채우시고 먹이심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하나님은 내 갈 길을 인도하시고 때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로 염려할 것이 아니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으로 감사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일 것입니다. 하나님, 그리고 우리 좋은만남 교우 여러분, 제가 걱정 없이 행복하게 오늘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덕환 청년이 군입대하였습니다"
김성희 집사님의 둘째 아들 이덕환 청년이 지난 25일, 강원도 삼척의 육군 제23보병사단 철벽부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여 5주간의 교육을 받은 후 자대 배치를 받게 됩니다. 이덕환 청년은 애초 장교로 입대하고자 준비하였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곧바로 영장이 발부되었다고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군복무기간을 21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한다고 하니 어쩌면 좀 더 일찍 전역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입대하는 사람에게 전역 이야기를 하는 건 좀 가혹한가요?! ㅎㅎㅎ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군대인데 아무쪼록 복무기간 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전역하기를 모든 교우들이 마음 모아 기도하겠습니다.
“고 박종필 감독님의 안식을 빕니다”
송윤혁 감독님과 이관택 목사님이 일하시는 댜큐인의 박종필 감독님이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고 박종필 감독님은 20여년간 빈민과 장애인 인권에 특히 많은 관심을 갖고 영상을 만드신 다큐멘터리 감독이시며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활동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송윤혁 감독에게는 은사와 같은 분이시라고 하여 더욱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평안히 쉬시기를 기도합니다.

1995년 8월 5일 "미국-베트남, 20년만에 외교관계 공식 재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 이후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냉전시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대리전 양상을 띤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을 중심으로 외국 군대가 개입하여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국은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 무기 투하, 고엽제 등 화학무기의 무차별적 사용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고 결국 미국 내 반전운동을 촉발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 전쟁으로 약 150만 명이 사망, 210만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천문학적인 댓가를 치르고서야 1975년 4월 30일에 끝났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베트남과 미국은 총부리를 겨눴던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외교관계를 공식적으로 회복, 재개하였고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베트남보다도 훨씬 전인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과 화해하였듯 북한과 화해할 생각이 여전히,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한반도는 종전협정이 아니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여전히 전쟁 중인 지역입니다. 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은 결자해지하여 종전협정, 더 나아가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봉북아의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뉴욕 타임즈 2000년 7월에 실렸던 글이다.
앤드류 아르킨은 뉴욕 75번가의 한 상점에서 사업상으로 중요한 만남의 약속이 있었다. 아침에 서두르지 못한 탓에 시간에 재촉을 받고 그는 급히 택시를 타고 그 약속 장소로 향했다. 그는 상점 앞에서 택시를 내리면서 급하게 택시비를 주고 허둥지둥 사무실로 향해 올라갔다.
약속한 사람과 만나서몇 시간 동안 사업을 의논한 후 다시 내려와서 다음 장소에 가기 위해 택시를 불러 탔다. 그런데 택시를 타고 보니 뒷 좌석 밑에서
1불 짜리 지폐와 운전면허증을 발견했다. ‘아 누가 흘리고 갔구나’하고 운전면허증을 주어 보니 자기 것이었다. 아르킨은 깜작 놀라며 이 뉴욕의 많은 택시 중에 같은 택시를 또 탈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면 시간을 내어 면허증을 분실 신고해야 하고 다시 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르킨은 생각했다. “오늘은 참 재수좋은 날이다. 아주 행복한 날이다. 일이 다 잘될 거다.” 아르킨은 그런 생각을 하니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저녁에 친구를 만나서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재수 좋은 날이면 복권이라도 한 장 사 놓지 그랬어.”
아르킨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그 동안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의 행복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욕망은 비교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은 철저히 상대적입니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바뀌듯이 세상이 주는 행복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만 원만 있었어도 행복했는 데 오늘은 십만 원이 있어도 불행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고,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을 가지면 열을 갖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자기와 남을 비교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소위 상대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가지면 행복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행복은 마치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또 그만큼 나에게서 뒤로 물러나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뿐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분리와 합일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
모든 것과 하나 되고자 하는 합일(合一, communion)에 대한 열망은 네가 태어날 때부터 너의 일부였다. 어렸을 때 겪었고 지금도 겪는 분리의 아픔이 네 속 깊은 곳에 있는 열망을 잘 보여준다. 한평생 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줄 ‘하나 됨’을 추구해왔다. 이 열망은 진지한 것이다 그것을 네 결핍의 표현 또는 신경증 정도로 보지 마라. 그것은 하느님이 주셨고 네가 이곳에서 해야 할 진정한 임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버림받고 거절당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극심해, 모든 것과 하나 되고자 하는 열망을 우정이나 사랑을 갈망하는 것으로 대체하려 할 때가 자주 있다. 네 안에서는 깊은 합일을 바라면서도 초청장이나 전화나 편지, 선물이나 단순한 몸짓을 바라는 것으로 끝내려 한다. 그런 것들이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지 않을 때 너는 합일에 대한 자신의 깊은 갈망마저 의심한다. 합일을 갈망하는 네 마음은 그 합일을 찾아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을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합일은 가장 순수한 너의 갈망이므로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제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물이나 쓰다듬는 손길을 찾기를 그만두고, 네 가장 깊은 바람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담대하게 목숨을 버려라. 그러면 목숨을 얻으리라. 주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어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가복음 10장 29-30절)
인생의 춤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기쁨과 슬픔을 별개의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네가 기쁠 때 너는 슬플 수 없고, 네가 슬플 때 너는 기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슬픔과 기쁨을 떼어 놓으려고 온갖 시도를 한다. 그리고 슬픔과 아픔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멀리하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기쁨과 행복의 반대쪽에 있기 때문이다.
죽음 질병 인격파탄… 이런 것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을 가로막는 것이므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두어야 한다. 인생의 목표를 향해 하는 길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안목은 이와 정반대다. 당신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해 우리 슬픔 안에 진정한 기쁨이 숨어 있고, 고통 속에서 인생의 춤이 비롯됨을 보여주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복음 12장 24-25절)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죽지 않으면 성령을 보낼 수 없다고 하시며 당신 수난과 죽음에 절망하는 두 제자에게 말씀하신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나?”(누가복음 24장 25-26절)
여기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계시된다. 스스로 고통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무엇이 태어나리라는 것을 알기에 아픔을 껴안는 삶이다. 예수님은 그 아픔을 ‘해산의 진통’이라고 하신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이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난ㅆ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복음 16장 21절)
십자가는 이 안목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표지다. 십자가는 죽음과 삶, 고통과 기쁨, 패배와 승리의 표지다.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 1주1닼 ”기찻길 옆 텐트살이 ” - 이관택 목사

일상은 한정적인 동시에 작은 행동에도 내포되어있는 의미는 다양하다. 그래서 지난하지만 꼭꼭 씹어 먹는 밥에서 단물이 나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 여러 의미들이 재발견되기도 한다. 거리홈리스의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전제를 설정한다. 함께 자고 아침을 맞이하고 밥을 지어먹고 물을 떠다먹고 지루해하고 재미있는 소일거리를 찾는다. 텐트촌에 제작진(이라고 해야 두 명이지만...)의 텐트를 설치한지 두 달이 흘렀다.
다섯 명이 등장인물로서 자신을 허락했고 몇 명은 뒷모습은 나와도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목소리 정도는 들려줄 수 있다고 했다. 관계를 쌓아올리는 것은 촬영이 끝나고 편집이 끝난 이후에도 진행형일 가능성이 높다. 텐트촌에서의 일상과 촬영을 병행한다는 것은 확실히 작업의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부침하는 화자와 청자의 거리 사이에서 변화하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 각자 다른 삶의 방식 ‘생존’
텐트촌에는 다양한 생존방식이 존재한다. 많은 것이 그렇듯 겉으로 보기에는 대동소이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사실지금 세상에서 자본이 없는 거리 노숙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생존방식을 발굴한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 애쓰는 고물수집, 국가가 만든 일자리사업에 참여, 아직 철근을 들어 올릴 근력이 남아있는 이들의 일용직노동,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자원봉사자들과의 관계를 통한 지원받기, 꼬지(구제금을 받기위해 종교시설을 돌아다니는 일), 그리고 텐트촌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지하기...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생존방식을 통해 거절당한 이들의 일상을 드러낸다.

텐트촌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문다. 술 한 잔 끝에 나온 속 깊은 이야기에도 ‘이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첨언을 잊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노동에 대한 기억이다.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다문 입이 열린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한다.
노동의 기억은 인간으로서의 기억과 상통한다. 열린 입이 다시 닫히는 것은 자신이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기억이 단절된 순간부터다. 누군가는 IMF이후, 누군가는 건강악화로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된 이후...노동이 단절되면서 삶의 관계들이 단절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고착되고 더 이상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들의 노동의 역사와 진술을 통해 관계의 파편들을 재구성 해본다. 더불어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 정체하는지 들어본다.
#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촬영 이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서 텐트촌을 떠나는 이들을 본다.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텐트촌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예상한다. 몸이 아파 병원으로 이송된 사람을 본다.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더 안정적인 곳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길 기대한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입원기간이 지나면 텐트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알고 있다. 빈곤의 굴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삶을 이야기한다.
#외부인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는 용산역 뒤편의 텐트촌.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카메라를 앞세워 들어가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지 넌지시 물어본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는다. 원칙이 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이 섭외를 거절한 경우는 재차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노숙자 이야기를 누가 들으려고 그래? 부질없는 짓이야.’ ‘얼굴 팔리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기운이 빠지기를 수차례 반복. 관계를 본격적으로 맺기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다. 자주 찾아오려면 아예 구석 한 곳에 텐트를 치라는 내부인들의 반쯤 장난 섞인 이야기에 그대로 집을 마련한다.
#일상
텐트에서 아침을 맞는다. 몸을 풀고 세수를 한다. 세수는 오 분 거리에 있는 용산역 공용화장실에서 할 수 있다. 하루 먹을 물을 페트병에 받는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기분이다. 사람 사는데 물이 가장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밥을 짓고 입에 밀어 넣는다. 텐트촌에서의 일상이다. 빨래는 가끔씩 공용물터를 이용한다. 노숙인들이 이용하는 시설이다. 건조까지 해준다. 씻는 것은 가끔씩 시설에서 해결해야한다. 하지만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듯한 이 공간은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있다. 주민들 간의 적절한 거리와 여유로움, 고즈넉함.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온함이다.

쫓겨나고 내몰리고 차별 받는 사람들의 곁에서 카메라를 들고 영상으로 고발하고 저항하는 삶을 사셨던 박종필 다큐멘터리 감독님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부디 차별과 억압 없는 곳에서 평화롭게 안식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