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에 대하여(1)
출애굽 시기를 주전 1240년경으로 본다면, 40년의 광야 생활 이후 약 1200년경에는 새로운 이스라엘 평등공동체의 역사가 시작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역사는 그냥 좋은 뜻만으로 저절로 변화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역사적, 혹은 물질적 토대가 무르익어야 합니다. 물론 팔레스타인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주전 13세기에는 그러한 변화의 징표들이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회벽처리 기술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시기였습니다. 가나안 지방은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형인데, 이 석회암은 물을 흡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비가와도 빗물을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주전 13세기 무렵에 석회암을 잘게 빻아서 열을 가하면 방수 처리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현대 사회의 시멘트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발견은 그 동안 성읍국가에 종속되어 그 주변에 살면서 세금과 부역을 감당해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발전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부역과 세금을 강요하는 군주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촌락을 이루며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무력의 근거인 병거대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산간 지역으로 올라가기 원했으며, 그것을 가능케 만들어준 기술이 바로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신기술이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은 4월부터 10월까지의 6개월이 건기이고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다시 우기이므로 연간 강수량 자체는 그런 대로 괜찮았습니다. 회벽처리 기술로 인해 샘이나 우물이 없는 산간지역에서도 우기에 내린 물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동안은 살 수 없었던 산간 지역에서도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성읍국가의 군주세력과 그 주변부에 예속된 농민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사회체제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에 이어진 히브리인들의 독자적 생존을 가능케 한 사회경제적 배경이었습니다.
홍태의 목사 (한강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