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연(우주) 안에서 경건
그동안 우리가 사는 공간 즉 자연 혹은 우주는 인간의 개척 대상, 혹은 개발의 대상으로만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양상이 달라졌다.
당장 지난 여름만 해도 그렇다. 우리도 엄청난 폭우로 상처를 입었고 많은 수재민들이 생겼다. 미주에서는 토네이도, 허리케인이 수시로 불어 닥치고 있으며 유럽은 불볕 더위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엘니뇨, 라니냐라는 생소한 단어가 이젠 어색하지 않다.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상처 입고 신음하는 자연이 이제 인간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이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을 향해 경고하신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벌써 수년전부터 자연과 생태계는 인간을 향한 반란을 시작했다. 이 반란은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로 나타났다. 사막화1)는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남북극의 빙하는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자연재해 현상들이 예측되고 있으며 빙하가 녹으면 지구상 육지의 대부분이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다. 종종 자연재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상영돼 인간들의 마음을 더욱 심란스럽게 한다. 이제 인간은 인간중심적인 사고 방식에서 생명중심적인 사고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있다. 그러나 이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이제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다시 갖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인간중심의 시대였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화되면서부터 사회의 중심이 하나에서 여러 가지로 분권화되었다. 이를 다원화사회 혹은 다원주의사회라고 한다. 오늘날은 다원화사회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가정의 권력이 오직 아버지에게만 집중되었지만 오늘날을 그렇지 않다. 한 가정에서도 분야별로 권력이 나눠졌다. 자녀들도 아버지에게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고 부모도 자녀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중세 유럽의 경우에는 오직 종교(기독교)가 유일한 권력의 근거였지만 사회가 발달하면서부터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과학, 경제, 정치 등등의 분야에서 권력을 분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의 진행과정을 살펴본다면 우선 하나님 중심의 신학 일변도에서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고려하게 되었으며(인문주의, 휴머니즘적 신학)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자연과 생태계의 영역까지도 고려하게 되는 패러다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중심으로만 사고하는 신학은 오늘날의 많은 문제에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인간 중심주의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범생명세계까지도 신학으 중요한 주제로 고려해야함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럴 때에라야 신학의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통틀어 범우주적인 신앙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은 동일한 하나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과학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성경은 흙이라고 하고 과학은 효소와 단백질덩어리 유기물질인 코아세르베이트라고 한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와 세계를 만드셨다. 그리고 그 세계의 재료로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셨다고 창세기 2,7은 밝힌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보다 각종 동식물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밝히는 반면 2장의 창조이야기는 사람을 만들고 나서 식물과 동물을 만드셨다고 전한다. 여기서 동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흙을 빚어 만드셨다고 한다. 어쨌건 사람과 자연, 우주는 하나의 태생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주만물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재료(질료)는 자연적인 요소이다.
같은 기원을 가진 것들은 서로 친화한다. 사람도 동향사람은 왠지 모르게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원리가 동양철학의 근원을 이룬다. 사주를 따지는 주역(본래 성리학으로부터 기원을 삼는다)도 음양오행과 우주의 근본요소인 물, 불, 흙, 나무, 금속 등을 분류하는 것으로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 우주 자연생태계는 기본적으로 친화적인 관계이다. 세계창조 직후 사람과 동물이 서로를 해하지 않고 의지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추측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단 창조된 세계는 인간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창 2,18-19를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짐승들을 아담(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 남자’이라는 뜻이다)을 돕는 배필로 만들어 주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담은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이름을 지어 주는 행위가 얼마나 친근하고 중요한 역할인가 생각해보라).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간과 자연, 생태계는 서로에 대하여 경건하였고 성실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 짐승들이 아담의 온전한 배필이 될 수 없다고 여기셔서 다시 여자를 만드신다. 그러므로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일정한 공존의 관계, 친밀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사람과 자연은 친구의 관계, 부족하나마 서로 돕는 관계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에게 성실하고 경건해야 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생태계는 이용과 대결, 착취와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경건의 관계이며 공존의 관계이다.
창 1,28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독재적이고 전제적인 왕권보다는 덕으로 통치하는 왕권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긴다. 우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도 인간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애로 다스리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스리는 권한을 주신 것은 파괴나 지배, 군림이 아니라 보호와 사랑스러운 관리를 의미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과 자연, 생태세계의 관계는 서로에게 성실한 경건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간은 자연을 도구로 여긴다. 광물 및 동식물을 인간의 유용함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파괴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무분별할 개발의 논리가 현대에 와서 비판을 받거나 재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70년대의 개발논리는 그 당시에는 정당하였을지 몰라도 오늘날은 분명히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불과 30-40년 사이에 생태계는 지난 수천년 동안 했던 것보다도 더 치명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광우병이니 에이즈니 하는 질병들도 인간이 자연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이다.
이제는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생태계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관계가 서로에게 성실한 경건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동양의 불교의 경우에는 생명을 중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어 살생을 매우 금기하고 있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개신교는 서구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편승한 부분이 있어서 자연세계에 대해 도구적인 관점(실용주의, 프래그매티즘)으로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가진 파괴적인 힘 때문에 자연계와 경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서로가 경건해야 한다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 자연 안에서 우리가 경건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숭배하는 것, 예를 들어 일월성신을 숭배하고 신뢰한다거나 비바람을 숭배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으로의 경건이며 우상숭배의 한 형태이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시대에 그런 일은 별로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우리 주위에서 아직도 많이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자연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경건한 관계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연법칙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상식적인 인과율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자연생태계를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연 자신의 관점에서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