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교회연합주일, 왕국절 제3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4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적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실천을 부탁드립니다.
2. 오늘 오후에는 김포로 이사하신 함옥분 장로님댁 심방을 가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함께 참석해 주세요.
3. 다음 주일 오후에는 남기평 목사님의 '기독교개혁 500주년' 관련 교육강좌가 열립니다. 기억하시고 일정을 확인해 주십시오.
4. 가을학기 수요성서대학이 이번 수요일(13일)에 개강합니다. 교재를 미리 읽어주시고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5. 남기평 목사님과 안주영 청년이 기독교개혁 500주년 독일 현장 방문행사에 참여하시고 16일(토)에 돌아오십니다. 기도를 부탁합니다.
■ 목회서신
지난 주간에는 사흘 동안 제주도에서 열린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의 실무자 워크숍에 다녀왔습니다. 아시다시피 대북 인도지원 사업도 지지부진한 것은 둘째 치고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입니다.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그저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생각으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일정이 생각했던 관광이 아니더군요. 첫째 날은 숙소에서 레크레이션과 토론회를 하였습니다만 둘째 날 오전에는 저지오름과 환상숲 곶자왈에 들러 생태환경 해설을 듣고 오후에는 제주4.3사건과 관계있는 지역들인 백조일손 현장, 알뜨르비행장, 섯알오름을 둘러봤습니다. 마지막 날에도 4.3평화기념관이라는 곳에서 1947년부터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 이야기를 듣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한가한 제주도 관광이 아니라 역사적 아픔이 배어 있는 현장으로만 다녔습니다. 해설자의 말을 들으니 관광객들이 돌아다니는 너른 곳이 대부분 제주도민들의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픔다운 폭포인 정방폭포도 학살 후 그냥 시신을 바다에 버린 현장이랍니다. 제주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착취와 억압, 강요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귤, 해산물 등 특산물 공출로 시달리고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도민은 물론 제주 땅도 엄혹한 착취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제주만이 아닙니다. 이 땅 곳곳에 억압과 착취, 살륙의 기억이 배어있고 그들이 흘린 피를 머금은 땅이, 아벨의 절규를 대신 부르짖었던 것처럼 오늘도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다지도 진취적이고 이렇게도 순수하며 선하고 바지런한 백성이 왜 그렇게 아파하고 고통 받으며 아픈 기억에 오늘까지 몸부림쳐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평화를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 되기를 갈망하듯!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19년 9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헌법 공포"
제1조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한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다.
제3조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국의 판도로 한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일체 평등하다.
1919년 9월 10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법은 동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이 제정한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내용을 대폭 보강하고 명칭을 '헌장'에서 '헌법'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총 10개조로 된 간략한 내용이 총 8장 58조로 확장되었고 '민주공화국'의 정치체제임을 명시하였습니다. 또 영토를 구 한국으 판도로 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7, 8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또 임시헌법 6조는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주권행사를 위임하였는데 이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단적 의사 결정은 불만을 증폭시켰고 결국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7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요즘 뉴라이트 등 일각에서 1948년을 건국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과 전통의 계승을 전면 부인하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두 친구가 이야기를 나누며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가고 있었다.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친구가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께 한 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그 친구는 신부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이기에 절대 그럴 순 없지.”
친구로부터 신부님의 답을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 보겠네.”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신부님에게 물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같은 사실을 두고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똑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용서받을 수도 있고 화를 더 돋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행복하고, ‘당신 정말 멋지네’라는 칭찬과 격려를 받을 때 힘이 납니다.
‘고마워’ 또는 ‘미안해’라는 한마디로 오랫동안 쌓여있던 감정들이 눈처럼 녹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표현하려면 쑥쓰러워집니다.
그럴 때, 이런 문자라도 보내면 어떨까요.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당신이 참 든든해요. 네가 내 옆에 있어 참 좋다. 너라면 할 수 있어. 네가 참 자랑스럽다. 고마워. 널 믿어. 당신이 내게 큰 힘이 됩니다. 당신은 참 소중한 존재입니다. 멋져요! 사랑해.”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죽음을 갈망함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 삶은 하느님 사랑에 ‘예.’라고 대답하도록 초대된 짧은 기회다. 또한 죽음은 그 사랑에 온전히 돌아가 안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는가? 아니, 오히려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 같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 매우 다른 태도를 보인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바오로의 간절한 원의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고 바로 그 원의가 죽음을 ‘이득’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바오로한테는 살아서 사명을 완수하려는 원의도 있다. 그 원의는 그에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삶을 위에서 내려다보라는 도전을 받는다. 진실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합일을 이루는 것이라면, 이 육신을 떠나 마지막 목표에 이르려는 원의 말고 다른 무엇을 품겠는가? 우리가 이 눈물의 골짜기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인생은 참으로 짧고 아프며 괴롭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해 결실 있는 작업을 할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은 임금님이 몸소 우리를 위해 시중을 드는 잔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 내리막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길은 곧 예수님의 길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다. 그 길에는 이상(異狀)이 없으며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한 즐거운 전망을 보여준다. 몸을 입고 살아있는 한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도록 우리 몸을 잘 보살펴야 한다. 마침내 임종할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우리를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부르시는 그분과 하나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폭로 「위로의 편지」
죽음은 모든 것을 단순화한다. 죽음은 어스름과 그림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죽음은 무엇이 문제인지 완전히 폭로한다. 그렇게 죽음은 우리에게 심판이 된다.
친숙한 손님, 죽음 「위로의 편지」
죽음과 벗하는 것은 다른 모든 벗하기의 기본인 것 같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진정 죽음과 벗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많은 의혹, 망설임, 갈팡질팡, 불안 등이 죽음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에 연결된다. 죽음을 겁주는 불청객이 아니라 친숙한 손님으로 대할 수 있다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북한의 6차 핵실험을 빌미로 지난 7일 새벽, 성주에 4기의 사드발사대가 임시배치되어 한반도의 평화가 아니라 위기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촛불로 세운 한국 대통령이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하라는 6자회담 회장국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고 제재와 협박, 사드배치만 주장하는 미국을 추종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한반도에 평화를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