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 - 구약후반~신약시대
a) 고대 서아시아의 지혜자료를 수집하여 흡수함
구약성경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오경과 역사서, 성문서, 그리고 예언서이다. 성문서는 우리가 흔히 지혜문학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지칭한다. 시가서를 지혜서와 구분하여 분류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크게 보면 성문서에 시편들과 잠언, 욥기, 전도서 등의 지혜문학이 포함된다. 우선 이스라엘의 시편들은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하였지만 독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만연된 고대동방 서정시의 일면들이 시편의 많은 시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양식이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상당부분 고대 서아시아 지역의 유산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시들을 많이 인용하고 모방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마찬가지로 지혜문학도 이방문화의 지혜전승을 잘 알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마아트 전승, 페니키아의 지혜전승 등이 그렇다. 지혜는 일차적으로 볼 때 요즘으로 말하면 처세술, 교약에 관한 격언들을 일컫는 말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궁정에서 국가제도를 교육하는 지혜학교가 있었고 여기에서 국가관리들을 교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교육한 지혜가 단순하게 이스라엘 자체에서 솔로몬의 지혜로 만들어낸 내용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솔로몬이 지혜의 왕으로 추앙 받는 것은 그 개인적 총명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서아시아 지역의 모든 지혜문학과 전승들을 수집하여 집대성한 능력 때문이기도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솔로몬을 중심으로 하여 수집되고 정리된 지혜는 외국, 즉 이방문화의 유입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의 철학사조와 문명이 들어올 때 당연히 그 개념들과 가치관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세계관은 그 지평을 확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주로 관심하였지만 세계 각국의 지혜문학을 접하고 세계관이 확대됨에 따라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햐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방신들과 티격태격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보다 넓은 세계의 풍조와 사상, 종교들과 경쟁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솔로몬이 집대성한 지혜문학 및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하나님에 대한 확대된 관점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b) 포로기를 겪으면서 지평이 넓어짐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곧바로 앗시리아의 식민 이주정책에 따라서 앗시리아 제국 내의 다른 지역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약 120여년 뒤 남유다 왕국도 주전 586년 경에 신바빌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 솔로몬 치하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에 국력이 많이 쇠퇴하기는 하였지만 주전 8세기 경에는 과거 솔로몬 시대에 필적할만한 영화를 누렸던 이들의 멸망은 종교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였다. 자기들의 신이었던 하나님이 이방인의 신들에게 무릎을 꿇게 된 것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이 새로운 관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팔레스틴,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던 지역과 그 부근을 활동영역으로 삼는 지역적 신에서 세계를 관장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신적 상황에서 이방신들과의 경쟁 가운데 전적인 하나님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가 세계라는 무대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백성들에게까지 맹위를 떨치시던 분이였지만 이제는 팔레스틴의 패권자뿐만 아니라 서아시아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으로 그 지경을 넓게 이해하였다. 그래야만 앗수르와 바빌론, 그 이후에는 그리스, 로마까지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복속시킬 수 있었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결과이기는 해도 이스라엘 백성으 포로생활이 그들의 세계관의 지평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였고 포로로 끌려간 그 땅에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함에 따라 하나님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c) 예언서, 묵시록, 역대기의 관점이 확대됨
이 과정에서 예언자들이 새로운 관점을 많이 제공하였다. 이사야에 의하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하나님의 분노의 막대기요 심판의 몽둥이였다(사 10,5). 그리고 앗수르는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결과 다른 몽둥이로 두들겨 맞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에스겔은 알려지지 않은 북방의 나라 마곡과 곡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예언한다(겔 38:2;39,6).
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물론 포로로 끌려가기 이전부터 활동하던 예언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팔레스틴 지역을 넘어서 멀리 있는 강대국들의 세력 확장과 정복전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이방신들과 하나님의 경쟁이 아니라 유일신이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은 그동안 이해하였던 것보다 더 크신 분, 이방신들과 비교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구약성경의 유일한 묵시록(예언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록으로 분류된다)인 다니엘서도 역시 팔레스틴 지경을 넘어서 이방나라의 왕들을 통해 고백을 받으시는 분으로 묘샤된다. 팔레스틴 지역에서 사용하는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벨드사살이라는 바빌론의 이름으로 개명된다. 이제는 요셉이니 야곱이니 하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드락, 메삭 등의 이방적 이름이 하나님 신앙 안에 포함된 것이다. 바빌론 왕의 꿈은 바빌론의 술객들이나 점쟁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에 의해서 풀이된다. 금신상에 절하지 않은 댓가로 풀무불 속에 던져지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구해주시며 사자굴에 던져져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게 된다. 오히려 다리우스 왕의 입술을 통해 고백을 받으신다(단 6,26-27).
이처럼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라는 관점은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편집되고 성경목록에 오른 역대기에도 반영되어 있다. 역대기는 포로기 시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신앙으로 잘 교육하고 망국민의 한을 신앙과 접목시켜 미래적 독립의 비전을 품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그러므로 이전의 역사서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역대기는 족보로 시작하고 있다. 이 족보는 장장 9장에 걸쳐 나열된다. 다른 성경도 물론 족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처럼 연속하여 길고 상세하게 족보를 서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족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니라 그 근방의 모든 민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장의 족보는 거의 대부분의 민족을 망라하고 있다. 마곡, 두발, 메섹, 구스(이디오피아), 이집트, 스바, 가나안, 하맛, 아람 등등 당대의 원근각처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 이름이 열거되고 있다. 게다가 1,19은 에벨로부터 세계 인종이 나누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세계의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시작되고 갈라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은 팔레스틴 지역,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세계의 하나님, 세계를 움직이시는 유일한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이해하는 폭은 신앙인의 관점, 세계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대시대에는 민족, 영역에 국한된 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한다. 정복전쟁의 시대에는 전쟁의 신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세계관이 확대됨에 따라 세계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결국 신앙인의 세계관에 따라서 하나님의 인식의 폭도 넓어진다. 초등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와 중고등학생, 대학생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범위는 비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우리의 관점이 성숙하고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더 넓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식이 제한되어 있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은 미미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넓은 사고는 하나님을 더 맣이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하는 도구가 되고 환경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만큼, 생각할 수 있는 만큼 넓으신 분이다. 아니 무한하신 분이시지만 그분을 이해하는 우리에 관점에 따라서 우리는 풍요로운 하나님, 혹은 빈곤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5)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할 때 이전과 현재의 차이점이 있는지 한 번 말해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이 얼마나 편협했었는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고 이 과정을 공부한 후에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된 내용이나 알게 된 내용, 하나님을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각에 관하여 생각을 나눠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