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대학] 현대의 하나님 이해

by 좋은만남 posted Jul 2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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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날의 하나님의 이름

구약시대 이후 신구약 중간기가 있었다. 이때부터 세계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돌아간다. 일반역사에서도 익히 잘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대인은 민족으로 남아 있지만 이스라엘이나 유다라는 나라는 더 이상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거대한 그리스 로마 세계 안에 민족공동체 혹은 국가공동체가 아니라 종교공동체로만 존속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세계상의 한 가운데서 탄생하셨다. 예수님은 식민지의 아들이었고 지배 받는 백성의 일부였다. 마치 일제 식민지인 한국인처럼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승천 이후 초대교회가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신약시대도 지속된다.

초대교회는 팔레스틴 지역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더 이상 유대인만의 땅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관점은 완전히 세계적이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시작한 예수운동의 모임인 초대교회였지만 그 교회는 더 이상 유대인만의 모임이 아니었다. 행 2장을 보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거리로 뛰쳐나간 성도들은 이방인의 말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방언을 들은 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교회에는 이방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최소한 이방땅에서 나고 자라 이방인처럼 사는 유대인들이 (뿌리를 찾기 위해 혹은 성지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전도를 받고 초대교회 모임에 들어간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원래 성도들과 새롭게 소속된 성도들 사이에 긴장도 있었다. 초대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선출하는 자리에서 일곱 일꾼(‘집사’가 아니다)이 뽑힌다(행 6,5). 이 상황에서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다. 이제는 다문화 상황으로 교회가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이 자리에서 선택된 스데반, 빌립, 브로고스, 니골라 등의 이름은 이방적인 이름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선택받은 유대인 백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회는 인종과 국적, 혈연을 초월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중요한 출발이 된 것은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알다시피 그리스 로마시대는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철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이다. 너무나 잘 아는 소크라테스나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철학을 발전시킨 이들이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BC 470경 아테네~BC 399)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때는 남유다왕국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지 100여년이 지난 시대이다. 이 당시부터 철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니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나 사도 바울이 이방 땅을 전전하며 전도하던 시절이면 이미 철학의 진전이 상당이 이루어진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으로 그리스의 아테네에 갔을 때에 이미 쾌락주의 철학인 스토아학파와 에피규로스 학파가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행17,18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좀 더 자세히 듣기를 원하여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의 눈에 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철학적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정도이다(행 17,21). 바울은 고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이 받는 율법교육만이 아니라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에도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수사학적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 수사학은 일종의 철학적 웅변술이다.

이제 바야흐로 단순한 종교체험에 의해 하나님을 이해하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 신을 철학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대두된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자신들이 믿는 바를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신앙체계를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것이 신학의 탄생이다. 하나님의 학문으로 자리 잡은 신앙적 진술인 신학은 학문의 특성상 한문적인 전개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철학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이후에는 또한 새로운 요구들이 있어왔다. 하나님이라는 이름, 신이라는 명사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이 이해하기에 합당한 용어들의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갖게 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스도 이후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을 시녀로 한 신학, 실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님의 표상을 찾고자 하는 갈망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새롭게 수정해갔다. 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의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a)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

토마스 아퀴나스는 1200년대에 살았던 천재 신학자로 인간의 이성으로 얻을 수 있는 진리와 이성 너머의 진리를 구별하여야 한다고 생각한 신학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5가지 방법을 채택하였는데 그 중의 한 방법을 논증할 때 하나님을 부동의 동자라고 지칭하였다. 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사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반드시 어떤 다른 것에 의하여 자극을 받아야만 움직이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최초의 힘을 부동의 동자, 즉 하나님이라고 이해했다. 부동의 동자는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지만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 만물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바뀌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으로써 모든 운동의 원인이라고 이해하여 하나님을 이렇게 불렀다. 여기서 이 운동의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b) 전적 타자(全的他者)

20세기 현대신학의 가장 큰 공헌자이며 세계 모든 교회와 신학에 가장 방대한 영향을 미친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하나님을 전적인 타자라고 불렀다. 세계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음에도 그의 스승 혹은 선배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자유주의 신학이 아무런 문제해결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이해의 길을 제시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 출발점과 종착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전적인 타자"(derganz Andere)라는 말은 하나님이 타계적 존재라든가 이 세상과 역사 밖의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온갖 인간적 노력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설정한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사색, 사변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신학, 곧 독자적인 인간의 사고에 의해 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 인식에의 노력에 포착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실 뿐이다.

바르트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 하나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선택하는 시간과 장소와 방식을 통해 인간에게 접근한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때와 원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신다. 다시 말하면 초월이란 하나님은 그를 파악하고 알려하고 만나려하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초월은 공간적 초월이 아니라 존재론적 초월이시다.

 

c) 영원한 일자

존 힉이라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혹은 영원한 실재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존 힉이 말하는 ‘영원한 일자, 하느님’의 의미는 유신론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사용하는데, 그리스도교, 불교, 힌두교 등의 종교인이 다같이 지칭할 수 있는 호칭으로 제안된다. 존 힉은 그리스도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유일성 주장이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힉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니케아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정된 예수의 신성(성부와 동일 본질이며, 참 하느님이시오, 참 인간이신 분)적 고백은 다원적 시대에는 알맞지 않은 개념으로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힉은 종교 다원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 대한 신앙의 유일성을 고백하면서도, 타종교에서의 그리스도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으며, 이러한 그리스도들을 통해 실재 자체이신 '하느님' 혹은 '신'이신 분에게로 향하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로서, 모든 종교들은 동등하게 대화하고 협력하여 인간 발전을 가져오게 하자는 취지를 볼 수 있다.

 

d) 존재의 기반(ground of being)

독일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나치와의 사상적인 마찰로 인해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와 철학적 신학연구를 하였던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을 존재의 기반(存在의 基盤)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틸리히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자유주의 신학이 제1차 세계대전을 책임 있게 막아내지 못하고 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하여 외면당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인간의 지식과 인간에 최대한의 가치를 부여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세계와 인간의 미래에 관하여 너무나도 낙관적으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경고하고 있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우상화와 교만, 죄성에 대하여는 자의적 타의적으로 외면으로 일관하였다. 그 결과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틸리히는 자유주의의 유산을 철저하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유산은 수용하면서도 부정적인 유산은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의 도움으로 수정하였다. 그는 종교 정치적으로 기독교사회주의의 이상을 품었다.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를 자유주의에서 전승받아 사회주의를 표방했다면 인간이 가진 죄성과 한계는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으로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라는 틀을 전제하게 된 것이다.

틸리히는 그의 신학을 ‘흔들리는 터전’과 같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종종 언급하였다. 틸리히에 따르면 인류는 과학과 현재문명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의 신비와 세상의 원리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이 인간구원의 열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실 과학으로 발견된 세상의 원리에는 발전과 진보를 향한 가치와 능력뿐만이 아니라 파괴를 향한 본성도 숨어 있다. 과학은 존재의 존재함을 위해 복무할 뿐만 아니라 존재의 파멸을 가능하게 하는 힘 또한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위한 긍정적인 역할보다는 부정적인 역할, 즉 파멸과 파괴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두 번의 세계대전이다. 과학이 존재의 기반이라고 믿어왔으나 그 믿음은 깨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시작된 잘못된 출발이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신의 존재가 더욱 고립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신에 대한 간절한 요청이 인류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현실적인 영적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간이 내면에 가진 창조주를 향한 본능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단단한 물리적 물질세상이 존재의 기반이 되지 못하고 예로부터 믿어왔던 신이 바로 우리 인간존재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외적인 과학의 열매가 존재의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 존재의 기반이 되시는 것이다.

 

e)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궁극적 관심(窮極的 觀心)’이라는 개념도 역시 폴 틸리히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존재의 기반과 비슷한 출발점을 가진다. 말 그대로 사람이 가장 깊이, 가장 최종적으로 관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최종적인 관심사항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돈, 명예, 사랑, 성공, 지식 둥둥 많은 것을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관심과 목표는 엄밀하게 말하면 표피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피하지 못하고 마주치게 되는 존재의 위기 앞에서는 위에 열거된 것들은 사실 아무런 궁극적인 관심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의 위기란 가장 우선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결국 인간 자신의 문제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하는 문제는 인간이 그 삶을 통틀어 피할 수 없는 문제이며 가장 기본적이고 깊이 있는. 즉 궁극적인 관심이다.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보면 피할 수 없이 만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내면에 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실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끝에 다다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궁극적 관심이 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