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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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맞는가, 하느님이 맞는가?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가톨릭은 전에는 천주님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아마도 개신교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부르건 같은 존재를 부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는 가톨릭의 호칭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차별성은 선교경쟁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는 경우이다. 하느님은 하늘 혹은 크다는 뜻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강조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맞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에 몇백 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에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빼앗긴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하느님, 상제, 하늘님에 대한 신앙이 있었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선교에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경우에 “너희들이 믿고 기도하는 그 하느님(하늘님)이 바로 우리가 선교하는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같은 존재를 서로 다르게 부르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의 예를 든다면 어떤 한 사람을 부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누구는 나를 ‘방현섭’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나를 ‘방한섭’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분명히 나에 대한 실례일 것이다. 한국사람은 나의 이름을 방현섭이라고 부르지만 미국식으로 이름을 쓰면 Bang Hyunsup라고 쓰는데 이를 읽을 때는 ‘뱅휸숩’이라고 읽는다. 이런 경우에는 그럴 수 있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둘 중 누구 하나는 잘못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둘 다 맞거나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전에는 하나님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만큼 우리의 사고의 틀이 넓어 졌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라고 번역된 성경의 내용이 일반적인 ‘신’,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번역된 것임을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말은 사실 보편적인 신,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정확하게 우리가 믿는 성경의 신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유대인들이 불렀듯이 ‘야웨, 야훼, 혹은 여호와라고 불러야 맞는 것이다.

신의 정확한 명칭을 부른다는 것은 이미 유한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감히 부를 수도 없고 그 이름을 안다고 해도 감히 그 더러운 입에 함부로 올릴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논쟁은 맞지도 않는 웃기는 일일 수 있다. 이미 칼 바르트가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그분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 인식했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그러나 막연하게 혹은 체험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 신을 부르기 위한 인간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지를 놓고 다투고 논쟁하는 것은 어쩌면 쓸데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엔도 슈사꾸의 ‘깊은 강’이라는 기독교 소설책을 보면 거기에 무신론자와 기독교신자와의 논쟁이 나온다.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왜냐하면 무신론자에게는 하나님이건 하느님이건 별 의미가 없으며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부르는 것이니 탐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기독교신자와 대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양파’라고 부르기로 했다. 하나님을 양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후반에 가면 이 무신론자가 깊은 내면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양파로 부르는 것은 가장 적절한 이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양파는 껍질을 까도 까도 계속 껍질인데 껍질과 속살의 경계가 무의미 할뿐 아니라 껍질을 계속 벗기다 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실체가 있어서 눈물이 나게 하지 않는가? 결국 유인 듯하면서 무인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나 하느님이야 하는 것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그 분은 무엇이라고 부르든 어쨌건에 존재하시는 분, 있는 듯 없는 듯 계시는, 스스로 계신 분, 그 자체이신 분, 그분 마음대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인간의 말과 생각을 넘어서 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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