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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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평화의 하나님

하나님은 전쟁과 파괴의 일면을 보이시고 있지만 그보다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파괴와 심판을 예언하지만 그것은 최종적 평화, 완성된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임을 끊임없이 장조하고 있다. 평화는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른 길을 걷는다면 그것이 바로 평화이고 평화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을 때 그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어 정의가 사라지고 자비가 없으며 과부와 고아, 나그네와 이방인이 핍박을 받고, 인간의 탐욕이 극대화 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런 사회를 평화롭다고 얘기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정직해지고 공의와 자비가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며 인간의 이상향, 유토피아로 그려질 것이다.

어느 부모나 자기 자식이 불화한 가운데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고 고백할 때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우리가 화평한 가운데 사는 것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당연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고 평화를 만드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만나서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한다. 샬롬은 ‘평화, 안녕’라는 뜻이다. 그것만 봐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평화를 기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화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극명하게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평화는 화목, 화해의 결과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위해서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그 불화를 화해로 만들어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평안하냐’는 인사말로 그들을 맞이하셨다.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요한복음 20,19]

바울은 예수님이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로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에베소서 2,14]

평화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평화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평화가 잇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곳이다. 평화가 없이 고통과 두려움만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라 하더라도 거짓을 경우가 많다.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인간적 당위성, 진실한 가치의 표현이다. 평화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순한 구호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주고 원하시지 않으면 안 주시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마땅히 가꾸고 추구해야 할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온 세계가 지금 얼마나 많은 다툼과 분쟁 가운데 살고 있는가! 인간역사에 얼마나 많은 전쟁의 기록이 있는가! 그로 인해 죽어간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불화와 미움, 다툼과 시기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이 땅에 마땅히 평화가 정착되어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헌신해야 하는 근본적인 종교성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평화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헌신의 결단이다.(미가서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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