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7일 주보

by 좋은만남 posted Sep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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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기독교교육진흥주일, 왕국절 제4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5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상적 삶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실천을 부탁드립니다. 다음주일은 청년주일로 지킵니다.
2. 오늘 오후에 하기로 했던 남기평 목사님의  '기독교개혁 500주년' 관련 교육강좌는 참석인원 저조로 한 주 연기합니다. 다음 주일 오후에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3. 가을학기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리고 있습니다. 교재를 미리 읽어주시고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4. 2017년 가을학기 토마토학교가 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지역사회를 섬기는 한기연 청년들을 격려해 주십시오.

■ 목회서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서대학이 개강하였습니다. 이번 학기 첫 수업이 지난주 수요일에 열렸고 큰 이변 없이 지난 학기에 참석하셨던 분들이 이번에도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강의의 완성도는 물론이거니와 참여하는 교우들의 열의도 대단하여서 매시간 깊이 있고도 즐거운 대화가 오갑니다. 
첫 강의는 책의 내용보다도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적 자세와 고백에 대해서 폭넓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서의 문자에 대한 확신에 기반한 것인지, 성서의 문자적 내용에 의문을 가져도 되는지, 의문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지에 대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교회는 자유주의적 복음주의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전 담임목사로서 이것이 현대사회에 가장 적합한 신앙형태라고 생각하고 우리 교우들이 그런 신앙의 기준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모르겠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폐해와 해악은 배타성입니다. 기독교만 맞고 다른 종교는 다 틀렸다(다르다가 아닙니다), 우리 교파만 맞고 다른 교파는 다 틀리다, 우리 교회만 완벽하고 다른 교회는 다 부족하다! 그런데 이런 배타성이 과연 기독교 복음의 정수, 본질일까요?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고집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다 용납되어야 할 소중한 존재라고 확신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예수님을 따른다는 기독교는 이처럼 '다름'을 '틀림'으로 이해하면서 다른 생각, 다른 고백, 다른 신학을 틀린 것으로 몰아가고 이단으로 정죄하기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국 40일천하로 끝났습니다. 부활하셨지만 40일 후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부활의 본인은 사라졌고 부활의 증인만 남았습니다. 결국 부활을 목격하고 느끼고 경험한 제자들이 그 부활의 현실과 내용을 채워나갔습니다. 부활을 고백하고 그 내용을 채워나간 사람들이 한결 같이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고백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현실과 공동체의 신앙적 요구, 교육적 효율성 등을 반영하여 다양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원칙은 지켜져야 했습니다. 모두가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  다양성의 시대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담아 진솔하지만 풍요롭게 고백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0170917_002.jpg ■ 좋은만남 이모저모
“함옥분 장로님, 새집 이사를 축하합니다”
함옥분 장로님이 지난 9월 1일, 정들었던 등촌동을 떠나 김포 마산동의 신도시 한강센트럴블루힐 아파트로 이사하셨습니다. 새집을 예쁘게 단장하시고 먼저 교우들을 초청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새집 생활을 시작하시고자 심방을 요청하셔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심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창호 청년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교우 십여명이 공동식사를 마치고 일단 강화도로 향하였습니다. 시간이 넉넉하니 일단 바람이나 쐬자고 강화의 라르고빌이라는 카페에 갔습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삼아 시원하게 깔린 푸른 잔디의 카펫, 그 위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한 커플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작은 화분에 담긴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머리에 인 20170917_001.jpg 카페라테, 그리고 엄청난 가격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ㅎㅎ
강화에서 김포로 향하는 길이 좀 막히기는 하였지만 함께 하는 길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새집에서 더큰 복과 기쁨을 누리시라고 축복해드리고 부근 횟집에서 장로님과 두 아드님이 정성껏 대접하신 저녁식사를 맛나고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초대해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부디 행복이 넘치는 새집과 가정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95년 9월 19일    "국제 해적처럼 말하기 날"
믿기 어렵겠지만 매년 9월 10일은 '국제 해적처럼 말하기 날(International Talk Like a Pirate Day)'입니다. 이 독특한 기념일은 미국의 코미디언 존 바우어(늙은 첨버킷)와 팀 라우켈(선장 슬래피)이 소설 보물섬과 해적의 황금시대의 낭만적 관점을 모티브로 착안하여 제정한 날로, 이날 하루는 해적 말투를 쓰면서 놀자는 취지로 제정되었습니다. 해적 말투란 해적 소설에서 해적들이 사용하는 말투로 친구를 만났을 때 'hello'라는 인사 대신 'Ahoy matey(아호이 메이티)'라고 하고 'Yes(예스)'를 'Aye(아이에~)'라고 독특하게 발음합니다. 이날은 또 (실제로 그런 종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의 신자들이 성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주인 FSM(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이 해적을 '선택받은 자들'로 인정했기 때문에 그렇답니다.
외국인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념일을 지키며 멍청한 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한국의 중학생은 자사고와 특목고를, 고등학생은 스카이대학을, 대학생들은 취업을, 장년은 승진과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쉬지 않고 달려가느라고, 황금같은 시절을 다 보내고 늙어 힘 빠졌을 때 뒤늦게 후회하는 사회구조입니다. 때로는 멍청한 놀이도 해보고, 때로는 무모한 도전도 해보는 여유와 쉼, 여백은 인간에게 귀중한 활력소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엄숙주의, 권위주의, 형식주의, 성공주의, 물질주의를 되돌아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이탈  「죽음, 가장 큰 선물」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는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방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죽기를 바라시니, 우리 또한 서로를 이해 함께 죽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사람들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이별이다. 소중한 관계의 끝이고 고독의 시작이다. 참으로 죽음은 헤어짐이며 더 고약하게는 돌이킬 수 없는 갈라섬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우리 죽음은 더 이상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죽음을 합일과 통교의 길로 만들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는 우리 믿음이 만들어내는 급진적 전환이다. 그러나 그 전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그가 자신의 임종을 가족과 친구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사람, 죽은 자와 산 자를 자기 둘레로 모이게 하는 방편으로 삼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사람을 혼자 죽게 버려두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할 때 우리는 매우 깊은 신비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다른 존재와 통교가 필요하다. 생명의 통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돌아감  「영혼의 양식」
죽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으면서도 우리는 좀처럼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세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만 장차 무엇을 가지게 될지는 모른다. 
사후세계의 가장 매혹적인 모습을 상상해 봐도 죽음의 공포는 떨쳐버리기 어렵다. 인간관계가 힘들고 경제사정이 어려우며 건강이 극도로 나쁜데도 우리는 목숨을 부둥켜 잡으려고 한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가시를 뽑아버리고, 죽음이란 무서워할 것이 아님을 차츰 깨닫도록 도와주려고 오신다. 죽음은 우리가 진정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 진실을 온 몸으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은 신뢰의 몸짓을 이룰수록 이 진실에 가까이 다다가게 될 것이다.    

■ 1주1닼 - 이관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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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으로 ‘무엇’을 하고 싶니?”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故박종필 감독을 추모하며-

함께 일하던 동료 故박종필 감독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49일이 지났다. 지난 9월14일 모란 마석공원에는 그의 49재를 지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였다. 또한 그 날부터 오늘(9월 17일)까지 추모영화제도 진행되었다. 나로서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특히 ‘죽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그 대상이 박감독님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49재를 앞두고 감독님을 생각하면서 몇 가지 단상들을 적어 보았다. ‘추모’라는 말보다는 ‘기억’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듯하다.          

#1 작년 이맘 때였다. 박감독님께서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주셨다. 수년 전 ‘노숙인주말배움터’에서 함께 교사로 일하면서 서로 안면은 있는 터였지만, 나로서는 뜻밖의 연락이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다큐인> 활동을 제안 받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나의 오랜 바람은 별 다른 계획과 노력 없이 갑자기 현실이 되었다. 그 때 감독님께서 나의 무엇을 보시고 그런 제안을 하셨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영상’을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다, ‘영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물어보셨던 것이 기억난다.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감독님의 말씀에 주저하던 마음을 다잡고 이 일에 뛰어들 수 있었다.   
 
20170917_004.jpg #2 <다큐인>에 들어와서 처음 맡은 역할은 감독님이 연출하신 영화 <잠수사>의 조연출이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감독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것이 전부였다. 감독님은 평소 걸음이 무척 빨랐다. 함께 식사를 하러가거나 촬영을 위해 현장에 갈 때, 둘이 나란히 걷기보다는 대부분 감독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바쁘게 따라가기 일쑤였다. 나도 그다지 걸음이 느린 편은 아닌데, 감독님과 있을 때면 항상 걸음이 느린 아이가 되었다. 
 <잠수사> 첫 촬영 때 감독님의 걸음이 빠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 날은 故김관홍 잠수사님의 가족들이 한강 고수부지에서 나들이를 하고 있었는데,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날쌔게 뛰노는 잠수사님의 삼남매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축지법을 쓰듯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시는 감독님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계시다가 어느새 아이들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보여주시며 함께 놀아주시곤, 또 다시 아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카메라를 들고 계셨다. 마치 ‘촬영’을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아빠를 잃은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놀아주는 삼촌처럼 허물없이 온몸을 다해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뛰노는 모습 속에서 나는 감독님이 강조했던 ‘무엇’에 대해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그것을 위해서 한 걸음 더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기본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잠수사> 촬영과 박근혜 탄핵행동으로 눈코틀새 없었던 지난겨울 내내, 동분서주하시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따라다니면서 참 묵묵하고 분주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고 몸이 빠른 사람 옆에서 말이 많고 몸이 느린 내가 과연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의 든든한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지난겨울이자 마지막 겨울이 떠오른다.  

#3 <잠수사> 작업의 막바지 기간. 감독님의 컴퓨터에서 녹취 작업을 하던 중 우연찮게 메모를 하나 보게 되었다. 메모장에는 새해를 맞이하여 다짐하듯 적어놓은 올해와 내년에 해야 할 작업 계획과 목표들이 있었는데,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바쁜 작업 중에도 끊임없이 다음 작업에 대해 고민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의미 있는 일들을 계획하는 감독님의 면모는 보이는 그대로였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함께 녹색병원에 가서 간암말기 진단을 받던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그 메모장이었다.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고 ‘망했다!’고 읊조리시던 감독님의 모습 속에서 그의 계획과 목표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독님의 절망과 불안함이 순간 전이되는 듯 내 몸도 얼어붙었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눈 앞이 아득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었기에 연신 두 손과 마음을 모았다. 감독님의 평화를 기원했지만, 그 기도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확인했던 시간이었다. 다만 모았던 두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4 투병 중이셨던 감독님께서 급하게 찾으신단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병원으로 뛰어갔다. 단 몇 일만인데도 몰라보게 수척해진 모습에 몹시 놀랐으나, 표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감독님께서는 내 손을 잡고 편안한 미소를 지으시며 꼭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몇 번이고 하셨다. 마치 유언과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은 병석에서도 항시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하셨다. 자신의 투병생활이 혹여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다른 투쟁하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될까봐 외부로 알리시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고, 내내 다큐인의 미래와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하셨다. 또한 병원에서 도저히 손쓸 수 없었고, 심지어 웬만한 요양원에서조차 받아주지 않을 만큼 병환이 깊어졌는데도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마치 지난 20년간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그랬던 것처럼, 묵묵하고 분주하게 절망의 시간을 헤쳐 나가고 계셨다.     
 나는 결국 감독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 날은 감독님의 바램으로 준비 중이었던 용산역 텐트촌 다큐 작업의 제작지원을 위한 면접이 있던 날이었고, 감독님을 간호하고 있는 송윤혁 감독을 대신하여 면접을 치러야 했다. 면접을 마치고 감독님이 계신 강릉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나는 임종소식을 들었다. 그 때 강릉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기나긴 암흑 속에서 멈춰있었다는 것 밖에. 
                     
#5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감독님의 투병을 지켜보는 동안에도, 장례를 치루는 동안에도. 먹먹하고 답답했던 가슴 속 멍울은 이상하게 눈물과 통곡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난생처음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는데도 그것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감독님을 향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오열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이 낯설었고, 항상 든든하게 곁에 계셨던 분의 존재가 사라진 상황이 생경했다. 그렇게 장례가 끝났고, 감독님은 우리 곁을 떠났다. 
 눈물은 예상치 못한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폭발했다. 영화<택시운전사>를 보는 내내 나는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도무지 화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영화 속에 등장한 독일인 가자가 내 눈에는 ‘박종필’로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역사의 한복판에 있던 그 사람이, 수많은 이들의 눈물과 아픔을 기록하고, 온몸으로 진실의 현장을 고발했던 그 사람이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독님의 카메라는 항상 안에서 밖으로 향했다.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거리노숙인의 아픔을 다룬 그의 첫 작품 <IMF한국 그 1년의 기록, 실직노숙자>에서 그는 거리 노숙인을 관찰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살았고,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했으며 그들의 죽음을 묵묵하게 애도했다. <끝없는 싸움 에바다>에서도, <장애인이동권투쟁보고서, 버스를 타자>에서도 그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장애인을 차별하는 폭력의 현실을 기록했다. 그의 카메라는 투쟁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멸시와 냉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것과 대결했다. 그는 외부자가 아니라 내부자이자 당사자였다. 영상으로 ‘무엇’을 하려했는가? 그는 영상으로 차별받는 이와 긴밀히 연결되고자 했다. 차별이 난무하고 진실이 사라진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6 나의 첫 번째 조연출 작업이자 어느새 감독님의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잠수사>의 맨 마지막 장면엔 故김관홍 잠수사의 친구였던 이병도씨 인터뷰가 나온다.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감독님께서는 참 아끼셨다. 그리고 몇 번이고 그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해주셨다. “관홍아! 나도 이제 너처럼 살게.”
 감독님과 식사를 하며 영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어리버리 하고, 말은 많고 몸이 느린 초보 영상 활동가이다. 감히 박종필 감독님처럼 산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차별과 억압의 수렁에 빠져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기록했으며, 그들의 한을 담고 있는 감독님의 REC 버튼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큐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다큐감독들과 영상 활동가들이 그 REC 버튼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내가 잡은 카메라의 시선과 방향에 대해 면밀히 고민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으려고 한다. 말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몸과 마음은 좀 더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여 보려 한다. 
               
#7 장례를 마치는 날, 감독님을 모란공원에 모시고 서울 사무실로 오던 차 안에서 제작지원 최종합격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감독님께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내게 괜찮다 말씀해주시며 선물을 주신 느낌이었다. 헉헉거리며 그의 걸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았던 그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이 글은 <민중언론 참세상>의 기고 글을 편집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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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보수정권의 언론인 연예인 방송인 탄압과 차별의 실태가 하나둘 밝혀지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보기관이 개입해 국민을 사찰하고 모함하고 모욕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벌어졌지만 정치보복으로 몰아가며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악한 권력이 심판 받는 하나님의 정의를 이 백성에게 보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