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시기까지2
홍영의 전도사(중계교회)
5. 헬라문명
알렉산더의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헬라 문화를 보급하려는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정복된 도시들 곳곳에서 헬라 극장과, 체육관, 도서관, 신전 등이 세워졌으며, 헬라 관습을 받아 들였다. 즉, 헬라의 옷을 입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헬라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예수시대에는 헬라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헬라어는 국제적 상업과 정치를 위해 필요한 필수 언어가 되었기에, 신약성서도 헬라어로 기록되어졌다. 이스라엘 민족이 있는 팔레스타인에도 헬라화가 진행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지켜왔던 신앙과 대조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반감을 표했으며, 또 상류층의 유대인들은 헬라 문명을 쉽게 포용하였다. 반감을 표했던 무리들일지라도 헬라의 영향을 벗어난 건 아니다. 갈릴리의 평민들도 자녀들에게 '빌립'이란 헬라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6. 안티오쿠스 4세 (이스라엘 종교와의 충돌)
안티오쿠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163년까지 통치한 통치자였다. 그는 매우 열광적으로 헬레니즘(헬라문명)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이 과정 중에서 유대인들의 종교문제에 간섭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친-헬라파와 반-헬라파 사이의 기장이 고조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안티오쿠스는 모든 중 중요한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 자리, 정치 지도자 자들을 친-헬라파 사람들에게 모두 넘겨준다. 이 과정에서 현 대제사자인, 야손의 친형제의 직위를 해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야손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안티오쿠스는 야손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3년후에 대제사장 가족이 아닌 메네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한다. 그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내에서의 유대교의 실행을 금하는 칙령을 발표하고(B.C 167년)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를 위한 신전으로 바꾸었다. 할례를 포함하여, 유대 율법의 준수를 모두 금하였다. 안티오쿠스의 이러한 행동은 큰 무장봉기로 들어나게 된다. 마타티아스(제사장 가족)는 자신의 마을에서 행해지는 이방 신에게 드리는 희생 제사를 거절하고, 그 자리에 참석한 동적과 군사들을 살해한 후에 산으로 도망하여 때를 기다린다.
7. 예루살렘 회복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안티오쿠스 왕권은 시리아 북부로 부터 몰려드는 로마 군대를 막기 위해 곳곳에 퍼져 있던 군사를 한군데로 모은다. 이 때 예루살렘에 배치되었던 군사들도 대부분 철수하게 된다. 마타티아스의 아들(별명- 망치[마카비]을 중심으로 B.C. 164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게 되며, 164년 12월에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 다시 봉헌되었다. 이 때를 기념하기 위해 아직도 유대절기중 하나(하누카)로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침내 정치적으로도 해방을 얻을 수 있었으며 마카비 형제인 시몬의 통치 밑에서 새로운 왕조가 탄생된다. 하스모니안 왕조는 BC 142년부터 63년까지 팔레스타인을 통치하였다. 시몬과 그의 후손들은 때때로, 로마의 도움을 얻어 그들의 영토를 확대하였다. 작은 유대 국가의 영토는 북으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서쪽으로는 이두매, 그리고 요단 강 동쪽으로도 여러 지역들을 포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