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옷 이야기 3 8. 혈루증 앓던 여인은 왜 겉옷에 손을 댔을까?
홍영의 전도사(중계교회)
7. 옷과 관련한 선한 사마리아의 재해석
우리들 시대에도 옷은 그 사람의 문화와 나라와 위치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북한 사람을 해외에서 만났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북한 사람들은 옷에 김정일 빼지를 달고 다니는 것으로 한눈에 구분 할 수 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한 번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인 것을 알아봤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 4:9) 무엇을 기준으로 한눈에 알아 봤던 것일까? 바로 겉옷 네 귀에 달려있는 옷술 때문이다. 1세기에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던 예수님도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술이 달려 있는 겉옷을 입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성화나 영화를 보면 겉옷에 술이 달려 있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로마, 영국, 미국을 거쳐 서구화된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옷에 술이 달린 겉옷을 입고 다닌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서 이단을 아니다.
많이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말씀도 옷과 관련된 배경을 이해하고 읽는다면 새롭게 와 닿을 것이다.
비유에서 나오는 강도 만난 자는 강도에 의해 옷이 완전히 벗겨졌고, 너무 맞아 반죽음 상태에 이르렀다.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사회적 적 신분과 출신을 알아보았던 당시에 강도 만난 사람은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유대인인줄 알 방법이 없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정결법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할 길 없는 그 사람을 도울 수 없었다. 자칫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여 자신이 부정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이 없는 사마리아 인은 법이 아닌 마음으로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시며, 중요한 것은 법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고 고침 받은 이야기에서 어떤 이들은 여인의 이 믿음을 가리겨 '저스트 원터치' 믿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노력은 없고 단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만하라고 가르친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믿음이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한번 비벼주면 완성되는 것일까? 동전을 넣고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상품을 얻을 수 있는 자동판매기처럼 말이다. 이 혈루증 여인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예수님을 만진 것이다. 혈루증 여인은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있다. 부정한 자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만질 수 없거니와 길로 다니지도 못하고, 마을에 들어와 있어도 안 된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중 옷술에 손을 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님 시대에 옷단의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세기의 랍비 문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 그래서 아무나 함부로 남의 옷술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랍비문헌에도 이와 관련된 처벌도 명시되어있다. 그런데 이 혈루병 여인은 부정한 몸으로 옷술에 손을 댄 것이다. 이것은 목숨을 담보로 한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