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제를 죽이다 (3)
(창세기 4:1-8)
* 제물에 담긴 마음과 정성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생활을 하고 싶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으며, 매일매일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어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엑스트라가 아니라 인생의 당당한 주역이 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구상하고 계획했던 일들이 잘 되어나가길 바라지요. 아담과 하와에게도 “이제 우리가 비록 에덴을 떠났지만, 한번 열심히 살아봅시다. 이렇게 아이들도 자라고 있지 않소” 라며 기뻐했을 거예요.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제몫을 할 만큼 장성하지요. 창세기는 그들의 장성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을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창세기 4:2)
이 대목을 우리는 이제 농경과 유목 문명이 각기 분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이는 문화인류학적 해석입니다. 또는 각기 나름의 생활방식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건의 발단은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창세기 4:3-4)
여기에서 “세월이 지난 다음에” 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야 곡식도 자라고, 양들도 자라니까 그렇겠거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그 정도쯤이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 아담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땀을 흘리며 노동을 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아담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들 대로 내려가 가인과 아벨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제사를 지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뭔가 좀 정신을 차리고 여유가 생겨서 이 감사를 표현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 셈이지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