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조회 수 44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인물이야기 1

 

구약- 최초의 인류

1) 아담 / 사람, 붉은 흙

(성서 안에서) 아담,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흙으로 빚으신 최초의 인간이다.

- 창세기 2:7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아다마 즉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니쉬마트 하임생명의 호흡을 뜻한다. 생기, 즉 생명의 호흡을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시니 아담은 생령’, 네페쉬 하야가 되었다. 생기는 신적인 영역에 기원을 둔, 생명을 주는 불꽃 혹은 생명력이다. 히브리 전통에서는 몸이 인간 자체임을 의미하며, 대중적인 그리스 사상에서 말하듯이 몸을 영혼의 감옥이나 무덤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구약성서는 인간에 대한 통전적 이해를 보여 주며, 하나님이 생명의 호흡(생기)을 불어넣으신 점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인 동물과 구분케 한다고 전한다.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 바깥으로 나올 때 쉬는 첫 숨은 들숨이다. 숨을 들이마심으로써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다 마칠 때는 날숨으로 끝난다. 마지막 숨을 내쉼으로써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아이가 첫 숨을 들이마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니쉬마트 하임,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이다.

-창세기 2:22

생기의 주입으로 생령이 된 아담에게서 하나님은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다. 이로써 집합명사로 표현된 한 인간 아담에게서 남자인 잇쉬와 여자인 잇샤로 분화되었다.

인류의 조상이자 원형인 아담이란 이름이 이나 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아다마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흙과 인간의 관계성을 잘 표현해준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란 흙의 속성을 닮은 형상이다. 흙처럼 모든 것을 품고, 용서하고,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살아가는 일치일 터이다. ‘겸손을 뜻하는 라틴어 후밀리타스가 흙이나 땅을 의미하는 후무스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피조성을 깨닫게 할뿐 아니라, 겸손해야 함을 가르친다.

 

2) 하와 / 생명, 여자, 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와의 본래 이름은 아담이었다. 태초에는 남녀 동등하게 아담(인간)’으로 불렸다. 여성이 하와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죄로 하나님께 벌을 받은 직후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산의 고통 가운데 아이를 낳았을 때였다.

-창세기 1:27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는 여성이 우성이요 평균 수명이 7-10년 더 길다고 하니, 진흙으로 빚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그의 가슴에서 취한 갈빗대로 만들어진 여자 하와는 이미 운명이 처음부터 갈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진흙과 갈빗대, 어느 것이 강한가?

하나님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셨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구해낸다는 뜻의 에제르다. 하나님은 아담을 고독에서 구해내고 그를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삼기 위해 여자를 만드셨다.

 

3) 라멕 / 능력 있는 자

구약성서에서 살인을 자행하고도 그것을 무용담 삼아 보란 듯이 자랑하는 이가 있다. 인류 최초로 살인을 자행한 가인의 7대 자손 라멕이다. 라멕은 일부다처제를 최초로 시행하여 두 아내를 두었는데, 이들에게 검가(라멕의 검가)를 부른다. 내용인즉, 나이 어린 소년이 어쩌다가 라멕에게 상처를 입혔는데, 그것에 대한 보복으로 라멕은 그 소년을 가차없이 죽였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이유는 암흑가의 잔혹한 보스처럼, 자신을 건드리는 놈은 몇 배로 되갚아 주겠다고 하는 무자비한 복수의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힘을 숭배하는 폭력주의자 라멕은 두 아내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다. 그의 아들 야발은 목축업을, 유발은 예술을, 두발가인은 철기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인류 문명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문명은 야만을 몰아내는 과정이었다고 자처하지만 실상 둘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문명은 본디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였다.

 

신약

1) 마리아(미리암) : 가장 높으신 분, 존귀한 분

-시편 103:8

 

위 구절에서 나오는 긍휼은혜인자와 관련된 세 히브리어 단어는 각각 라훔, 하눈, 하세드이다. 모두 하나님 사랑의 다양한 표현이다. 이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세 겹줄이다.

갈릴리 지방 촌락인 나사렛의 한 소녀는 열두세 살의 어린 나이에 목수인 청년 요셉과 정혼하게 된다. 이후 이 시골 여인의 운명은 갑작스레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이 여인의 이야기는 기독교 2천여 년 역사에서 음악, 미술, 문학, 영상 들 다양한 매체로 표현되었다.

어느날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소식이란 마리아가 장차 한 아들을 잉태케 된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통고였다. 정혼한 지 보통 1년 혹은 그 이상이 지나서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하던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것은 추문이요. 그 추문 하나로도 유대 사회는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녀는 수태고지를 받아드렸다.

피에타(연민, 경건한 마음)라는 작품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여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릎에 놓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했다. 어머니의 사랑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모태, 즉 자궁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히브리어에서는 하나님의 긍휼과 어머니의 모태(자궁)’는 어원이 같다. 즉 자궁을 뜻하는 라함과 긍휼을 뜻하는 라하밈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단어이다.

 

2) 엘리사벳 : 하나님은 나의 맹세

기적은 그것을 추동케 한 예수라는 인격을 만나게 하고, 희망 꺾인 세상 속에서 그가 꿈꾼 세상을 함께 열 수 있게 하는 힘과 용기를 준다. 그러나 그러한 힘과 용기는 기적 자체에서 오기보다는 그것이 함의하는 상징과 만날 때 생긴다. 그러기에 기적은 그 넘어에 있는 상징과 만나야 한다. 이것이 기적이 지닌 메시지고 힘이다. 기적은 의미 있는 신적인 퍼포먼스요 메시지다.

석녀 엘리사벳은 유대의 사제직에 있던 사가랴를 남편으로 둔 최초의 제사장이었던 아론 가문의 여인이다. 특히 아들 없는 과부는 재혼하여 여자로서 임무를 다하기 전에는 수치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자식 없는 과부로 그리기도 한다. 석녀였던 엘리사벳의 태가 열린 사건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새 시대 동텄음을 알리는 여명과도 같았다. 이것은 불가능한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승리를 뜻하는 영어의 빅토리의 v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일단 실패하여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와야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신앙은 역설이다. 신앙의 두께는 불가능한 가능성이라는 역설의 깊이를 이해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이해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현실을 그리스도 안에서가능함을 믿고 실현해 나가는 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