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성서대학 - 광야이야기 세 번째 / 남기평

by 좋은만남 posted Mar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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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이야기3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지만 다윗은 사울 왕의 시기로 인해 과양로 쫓겨났다. 그때부터 다윗은 도망 다니는 현상 수배범의 삶을 살게 되었고, 불안한 삶이 기약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엔게디 광야(황무지)의 한 동굴에서 쉬고있을 때 도망자의 생활을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울 왕이 발을 가리우러다윗이 쉬고 있던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발을 가리운다는 표현은 용변을 본다는 말이다. 사울은 모든 수행원을 뒤로한 채 혼자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점잖게 항문에 힘을 주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없앨 수 있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였지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자른 채 살려서 돌려보냈다.

 

다윗 추종자들의 서로 다른 반응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을까? 이 질문을 하면 거의 십중팔구 나오는 대답이 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기 때문에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의 추종자들도 사울 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이스라엘의 삼척동자도 다 알지 않던가?

그런데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의 행성은 전혀 달랐다. 다윗의 추종자들은 발을 가리우러 혼자 동굴에 들어온 사울을 보면서 당장 죽이자고 제안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도록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하나님이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일종의 우문현답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이 벌어진 엔게디에 숨겨진 비밀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와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바로 본문의 공간적 배경인 엔게디광야(황무지)라는 사실에 숨어 있다.

사무엘상 23:29-24:1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사건, 특히 사무엘서와 같은 역사서는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기록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성경 저자는 본문이 일어난 사건의 공간적 배경으로서 두 번에 걸쳐 엔게디라는 지명을 언급한다.

성경은 절대로 의미없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여러 마을을 들어가실 때 대체로 마을 이름을 특별이 언급하지 않지만 간혹 특정한 마을 이름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 마을의 이름 자체가 본문 속에 숨겨진 영적 비밀을 캐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인성에 들어가서 죽은 청년을 살리신 사건 나인이라는 도시 이름 속에 본문 해석의 중요한 열쇠가 담겨 있다.

누가복음 7:11

나인은 히브리어로 하면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나임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기에 도시 전체가 장래 행렬에 참여할 정도로 슬픔에 잠겨 버렸다. 이처럼 즐거움을 나타내는 도시 이름과 청년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진 도시 분위기를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본문의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광야 한복판 엔게디 폭포

다윗이 숨어 있던 엔게디 과야는 어떤 곳인가? 이곳은 해발 400m에 위치한 곳으로 지구에서 가장 낮은곳이다. 타는 듯한 광야 한복판에 있으며 물고기조차 살 수 없는 활양한 가해를 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 한복판에 한여름의 건기에도 물줄기가 끊어지지 않는 엔게디 폭포가 있다. 폭포 위쪽에 있는 엔게디 샘이 그 수원인데, 이글거리는 태양빛을 받아 모든 생물이 타들어가는 광야의 환경과 드라마틱한 대조를 이루는 무척 인상적인 곳이다. 엔게디 샘은 주변의 광야를 여행하는 광야 투어객은 물론, 광야에 사는 동물들의 목숨을 지탱해 주는 생명수다.

 

샘물을 마시며 은혜의 바다에 풍덩빠진 다윗

엔게디는 을 의미하는 들염소를 의미하는 게디가 합쳐진 목합명사이다. 즉 들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다.

유대인의 개념상 은 인간의 노력과 수고 없이 얻어지는 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특별히 광야 한복판에 위치한 에게디 샘과 그 주변의 동굴에서 있었던 본문의 사건은 다윗이 어떻게 사울을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가에 대한 영적 비밀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겨 있었고 그런 충만한 은혜 때문에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시험을 능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은 보통 사람들이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기도처를 찾던 바울은 왜 강가에 갔을까?

아시아로 향하려던 바울의 전도 여행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마게도냐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급격하게 서쪽 무대인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본문으 유럽의 첫 관문인 발칸 반도에 위치한 도시 빌립보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16:13

 

안식일에 바울은 기도처를 찾기 위해 강가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났고, 그녀는 이후 바울의 사역을 돕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한국문화에서 강가는 여인들이 삼삼오오 빨래하는 곳으로 이해된다. 빨래판을 신나게 두드리며 각종 수다를 떨면서 여인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곳이 강가였다. 유대인들에게 강가는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강가에서 기도하라

당시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닌 회당을 중심으로 예배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런데 회당을 짓고 아도나이를 부르며 기도문을 낭송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만 13세 이상의 성인 만자 열 명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성인 남자 열 명의 정족수를 미니안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이러한 정족수를 미달되는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 1세기 랍비 문헌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성인 남자 열 명 미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는 강가에 가서 기도하라.”

강가는 회당을 세울 수 없는 디아스포라 유대 공동체를 위한 최적의 기도처로 권해진 곳이다. 강가는 사람의 수고가 없어도 생명의 원천인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역시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가진 물에 대한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본문이다.

 

양은 좋은 동물, 염소는 나쁜 동물일까?

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9개나 되는데, 이는 광야에서 양 떼를 치는 광야의 민족 이스라엘에게 걸맞은 언어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그 중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이다.

성경에 언급된 양은 특별히 꼬리가 굵고 넓은 ‘Ovis Laticaudata’라고 불리는 종류의 양이다. 이 양은 꼬리의 무게만 무려 11kg에 달한다. 성서 시대에 양의 기름진 꼬리는 손님을 대접하는 최고의 식사였을 뿐 아니라 성전의 희생 제사에 바쳐질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기름진 꼬리로 성경에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알리야라고 한다.

출애굽기 29:22, 레위기 3:9

 

양은 좋은 동물, 염소는 나쁜 동물?

성경은 광야에서 목축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 가운데 양과 염소의 이야기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흥미 있는 주제도 없다.

이스라엘 광야에서 목축을 할 때 염소 없이 양만 데리고 목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서는 양 세 마리당 염소 한 마리를 섞어서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스라엘에서 염소는 양들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염소는 이스라엘 광야라는 환경에서 목축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양은 좋은 동물, 염소는 나쁜 동물이라는 등식은 광야의 민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사무엘상 25:2

 

양들은 왜 뭉쳐 다닐까?

양은 뭉쳐 다니고 염소는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양들이 뭉쳐 다니는 이유는 양들이 더위에 무척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더위에 약한 것과 뭉쳐다는 것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스라엘 광야의 태양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 만큼 뜨겁다. 이때 더위에 약한 양들은 다른 양의 그림자속에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음으로써 나름댈 해결책을 찾는다. 태양이 뜨겁지만 건조한 광야의 날씨로 인해 그림자 밑은 시원하기 때문이다. 반면 더위에 강한 염소는 광야의 태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개별 플레이를 하며 돌아다닌다.

양과 염소의 또 다른 특징은 목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양들과 달리 염소는 목자 앞에서 다닌다는 것이다. 먹고 싶은 풀이 있으면 목자의 도움 없이 제멋대로 앞서 가는 이런 염소들로 인해 목자들은 늘 바쁠 수밖에 없다. 나는 광야 여행 중에 염소들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최후는?

개별적으로 돌아다니는 염소에 비해서 늘 무리를 지어 다니는 양들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 그러나 순한 양들도 때로는 대열을 이탈해 목자의 애간장을 태울 때가 있다. 양은 남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순한 동물이지만 호기심이 많이 쉽게 무리에서 이탈한다. 양들은 위험이 극대화되면 양들은 시퍼렇게 겁에 질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침묵모드로 들어간다.

목자는 염소가 앞서 가는 것을 용인하지만 목자의 시야에서 벗어날 정도가 되면 물맷돌을 던져 염소에게 주의를 준다. 처음에는 일종의 경고 사격으로 염소의 발 앞에 던진다. 이때 염소는 목자를 쳐다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며 고민한다. 그리고 물맷돌을 던져 살이 많은 부위(엉덩이 중심)부터 맞추기 시작한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다리를 맞춘다. 이런 염소는 흔치 않지만 성경에 비유로 든 염소들은 이런 돌연변이 염소를 두고 한 말이다.

 

염소를 섞어 키우는 이유

첫째, 초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스라엘의 광야는 많은 양의 비가 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에 양들이 뜯어먹을 충분한 양의 풀이 없다. 그러므로 유대 광야에서 초장을 보호하는 것은 목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이는 양과 염소가 풀을 뜯어먹는 습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염소는 다 자란 풀의 잎사귀만 살살 뜯어먹는다. 반면, 양은 어린 잎과 다 자란 잎을 구분하지 않고 뜯어벅는다. 게다가 잎사귀만 살살 뜯어먹는 염소와 달리 줄기째 다 뜯어먹는다. 유대 광야에서 양들만 목축할 경우 초장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내년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소수의 염소를 섞어서 키우면 다수의 양들이 염소를 따라 한다는 사실이다. 염소가 잎사귀만 살살 뜯어 먹으면 양들이 염소를 묵묵히 따라한다. 결국 염소를 섞어서 키운 초장은 이듬해 우기가 되어 비가 오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둘째, 광야의 험한 길과 높은 바위를 지날 때 염소의 역할이 필요하다. 유대 광야는 산과 골짜기, 때로는 험준한 낭떠러지가 이어지는 위험한 곳이다. 이런 환경에서 목자는 많은 양 떼를 이끌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야 한다. 이 때 염소가 돌격대 역할을 하며 나선다. 이에 양들은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