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이야기 2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 인류 구속사의 파노라마
절기 안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프로그램이 암호화되어 있고, 예수님의 공생애 타임 스케줄도 절기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시작해서 심판으로 종결될 구속사의 프로그램은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다. 유월절부터 칠칠절까지,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부터 오순절 성령강림까지의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나팔절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향해 가고 있다.
수전절 | 그리스도의 탄생 | 성탄절 |
유월절 | 그리스도의 죽음 | |
무교절 | 그리스도의 친교 | |
초실절 | 그리스도의 부활 | 부활절 |
칠칠절(오순절) | 그리스도의 성령의 임무 교대 | 성령강림절 |
나팔절 | 그리스도의 강림 | |
대속죄일 | 그리스도의 속죄 | |
초막절 | 그리스도의 심판 | 추수감사절 |
왜 벳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셨을까?
요한복음 6:4
유일하게 예루살렘에서 보내지 않은 유월절
예수님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어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다. 하지만 오병이어 기적은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디베랴) 바다에서 일어났다.
요한복음 6:1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 벳새다였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누가복음 9:10
오병이어 기적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유일하게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지 않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성서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최고의 명절인 성전을 방문했고,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는 절기마다 성전에 모습을 보이셨다. 그런 예수님이 왜 이번에는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지 않았을까?
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신 그 해에 메시아적 이미지를 가지고 구름 떼와 같은 군중을 몰고 다니던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다. 세례 요한이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예수님에게 일거에 몰려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적 기득권층이 득세하는 예루살렘을 방문한다는 것은 사지로 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갈릴리에 머무셨고, 특별히 건너편의 벳새다로 사역의 본부를 잠시 옮기셨다.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던 가버나움은 세례요한을 죽임 헤롯 안티파스의 영역이다. 당시 로마가 꼭두각시 분봉왕으로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티파스는 군종이 몰려다니는 것 자체가 대단히 신경에 거슬렸던 것이다. 정통성이 없는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처형한 헤롯 안티파스의 서슬 퍼런 칼날이 머지 않아 자신을 향해 올 것임을 잘 아셨다. 게다가 세례 요한을 따르던 무리가 그의 참수형과 함께 예수님에게로 몰려들면서, 예수님은 헤롯 안티파스 공안 당국의 ‘지명수배 1호’에 올랐다. 이러한 헤롯 안티파의 의도가 누가복음에 분명히 기록되었다.
누가복음 9:9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했다.’ 이 부분을 무심코 읽으면 그 의미가 놓치기 쉽다. 당시는 우리로 말하자면 박정희 대통령 말기의 긴급조치가 발령된 상황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즉 ‘지명수배 1호’에 오른 ‘반체제 인사’를 중앙정보부에서 ‘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자 했다는 말씀은 그러한 살 떨리는 긴박함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로 자리를 피하셨다. 벳새다는 헤롯 빌립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헤롯 안티파의 마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특히 빌립의 아내 안티파스가 취함으로써 이복형제 사이는 급속도로 소원해진 상황이었다. 세례 요한의 죽음도 안티파스의 불륜적 결혼이 부당함을 지적했다가 빚어진 일이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를 피해 떠나는 예수님에게 최고의 망명지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14:3
헤롯의 아들들인 분봉왕들에 의해 나누어진 로마 지배하의 유다: 분홍색이 헤롯 안티파스 통치지역, 황토색은 필립왕의 통치지역, 노란색은 빌라도 총독이 관할인 자치도시지역 데카폴리스, 연초록은 헤롯의 형인 아르켈로루스 통치지역
벳세다 지역은 과연 ‘빈 들’인가?
벳세다는 갈릴리 바다로 유입되는 상부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자리 잡은 어촌으로, 예수님 당시에는 가버나움과 함께 갈릴리 지역에서 손꼽히는 어촌 중 하나였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동쪽에 있는 골란 고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다.
성경에는 ‘바산’으로 언급되는 골란 고원은 풍부한 강우량으로 인해 목초지가 많아 성서시대부터 소를 방목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부자들을 바산 지역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고 살이 찐 ‘바산의 암소’로 비유하였다.
아모스 4:1
이곳은 헬라어로 ‘에레모스’, 우리말로는 ‘빈 들’로 변역된 황량한 광야와는 거리가 먼 비옥한 목초지였다.
마가복음 6:35
그런데 성경의 저자는 왜 이곳을 가리켜 빈들이라고 묘사했을까? 그것은 또 다른 ‘빈 들’인 시내 광야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유월절과 ‘빈들’로 번역된 광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지 않은가? 유월절 즈음에 벳새다 지역에서 일어난 오병이어 기적을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는 유월절과 연결 짓기 위해 비옥한 목초지를 의도적으로 황량한 ‘빈들’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선포했을까?
유월절 즈음에 일어난 오병이어 기적을 유월절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선포하셨다.
이는 애굽에서 나온 이후 시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은 이스라엘 민족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시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과 벳새다 빈 들(광야)에서 오병이어 기적으로 떡을 먹은 것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6:31-33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준 것 같이 예수님은 벳새다 빈 들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 백성을 먹이심으로 제2의 모세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유월절을 준비하나?
구석에 박힌 누룩을 제거하다.
유대 달력으로 첫 달인 니산월(4월경) 14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유월절준비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그 전날인 13일 저녁부터 집안 구석구석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이다. ‘누룩을 제거한다’고 하면 얼른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말은 누룩이 들어간 빵가루 등을 찾아내서 불에 태우는 것을 뜻한다.
누룩을 제거하는 일은 그야말로 철저함이 요구된다. 성서시대에는 올리브 램프를 밝혀 가며 구석구석에 박힌 누룩을 완벽하게 제거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낸 누룩은 일정한 장소에 모아 두었다가 성전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동시에 태워야 했다. 누룩을 제거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전함과 거룩해짐을 상징하는 의식이다.
고린도전서 5:6-7
아울러 이는 출애굽할 때 누룩으로 반죽이 부푸는 것을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게 애굽을 벗어났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출애굽기 12:39
유월절 전야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올리브 램프의 불을 밝혀 누룩을 찾아내는 의식을 이하고 나면 스바냐 선지자의 말씀이 와 닿게 된다.
스바냐 1:12
니산월 14일 아침이 되면 성전에서는 사람이 잘 보이는 곳에 두 개의 진설병을 가지런히 놓는다. 이중 하나를 치우면 이때부터 누룩이 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라는 신호다. 이후 남아 있는 진설병마저 치우면 집 안에 모아 둔 누룩을 일제히 불태우라는 신호다.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이어지는 무교절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무교병만을 먹는 절기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슈퍼마켓은 제빵 코너가 폐쇄된다. 이때에만 나오는 ‘마짜’로 불리는 무교병으로 식사를 대신한다.
마가복음 14:1-3
유월절을 이틀 앞둔 상황에서 예수님은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였다. 저마다 유월절 준비를 위해 육신의 정결과 누룩 제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때 예수님은 부정한 나병환자의 집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하셨다. 누룩을 제거하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기념하는 유월절이 임박했을 때 예수님은 기쁨의 절기에서 소외된 나병환자를 심방하신 것이다.
<누룩을 제거하는 데 일주일씩이나 걸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절기들은 현대 이스라엘의 명절로서 법정 공휴일이다. 이중 유월절 명절이 되면 3주간의 긴 휴일이 이어진다. 이 정도면 거의 방학과 진배 없으며 이스라엘의 최고 명절이라 부를 만하다. 웬만한 직장도 유월절에는 2주 정도의 휴일을 갖는다. 유월절과 무교절로 이어지는 절기가 기본적으로 일주일간 이어지고, 유월절을 앞두고 집 안에 있는 누룩을 제거하는 별도의 시간으로 일주일이 주어진다.
유월절을 앞두고 대부분의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온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엎는 대청소를 한다. 일단 물에 들어가서 부풀려지는 곡물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 평소 아침 대용으로 먹는 겔로그 시리얼 조각도 구석구석 뒤져서 찾아내야 한다. 소파, 장롱 등 자리를 옮겨 가며 구석구석에 있는 누룩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낸다. 바쁜 현대 유대인들을 위해 이러한 누룩 제거를 대행해 주는 회사도 있다.
유대인들이 가구를 바꾸는 기간도 이 즈음이다. 대청소를 하는 김에 아예 새 가구를 장만하는 것이다.
회칠한 무덤은 무엇일까?
유월절 한 달 전(아월달 15일)부터 성전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준비에 들어간다. 성전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올라오는 모든 길들을 보수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도로보수’와는 다른 개념이다. 성서시대의 가난한 자들은 땅을 대충 파서 시체를 묻었는데,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는 흙을 조금만 파도 석회암 바위가 나오기 때문에 깊이 팔 수가 없었다. 이들의 무덤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 ‘평토장한 무덤’이었고 깊이 파서 묻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 뼈들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몸이 무심코 무덤이나 시체에 닿았다가는 레위기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되고, 그런 상태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 파견단은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에서 이러한 평토장한 무덤을 찾아 회칠로 표시하는 일을 했다.
마태복음 23:27
누가복음 11:44
정결한 물이란 무엇인가?
유월절 행사 가운데 신비한 의식은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 정켤케 하는 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드는 레시피는 민수기 19장에 잘 나온다.
민수기 19:2-7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에 있는 감람산에서 행해졌던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통해 만들어진 정켤케 라는 물의 용도는 말 그대로 시체 접촉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성전 파견단이 순례자들이 다니는 길목에 있는 무덤들에 회칠을 하고 표시를 해 두었지만 이를 보지 못하고 무심코 무덤을 지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7일 동안 부정해져서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이때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로 만든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리면 7일을 기다릴 필요 없이 즉시 정결해질 수 있었다.
민수기 9:11-12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암송아지의 재’는 바로 정켤케 하는 물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9:13-14
정결케 하는 물은 우슬초 가지를 묶어서 부정한 자에게 뿌렸는데,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드린 회개의 기도문 속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나온다.
시편 51:7
남은 재는 다음해에도 쓸 수 있었는데, 이 행사는 50-60년을 주기로 행해졌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두 12회 실시됐다고 한다.
집안에 그릇을 정결케 하다.
유월절에는 집 안에 있는 모든 그릇을 정켤케 하는 의식을 갖는다. 돌그릇과 놋그릇은 정결탕에 가져가서 씻기만 하면 되지만, 흙으로 만든 질그릇은 부정해지면 깨뜨려 버려야 했다. 정결한 새 그릇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모디인’이라는 마을에서 주로 판매했는데, 제사장 가문이 많이 사는 모디인의 질그릇은 특별히 정결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6
가나 혼인잔치의 연회장 밖에는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돌항아리 6개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 돌항아리를 놓아 둔 것은 부정해지더라도 정결탕에서 깨끗하게 씻으면 재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흙으로 만든 항아리를 둘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부정해지면 매번 깨뜨려 버려야 했다. 그러면 항아리 값으로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얀 수건, 유월절 빈방 있음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월절에 25만 6,500마리의 양을 성전에서 도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마리의 양을 최소 10명이 함게 먹어야 한다는 당시의 랍비 문헌이 있는 것으로 보면, 유월절 기간 동안 최소한 10배에 해당하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성서시대에 예루살렘 주민들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객식을 내주어야 했다. 이때 객실료 명목으로 돈을 받게 되면 산헤드린에 즉시 고발되었다. 객실료는 돈이 아닌 순례자들이 가져온 그릇, 모피, 유월절 양의 가죽 등으로 대신했다. 집집마다 객실이 있었는데, 이 객실에 손님을 받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다는 표시로 집 앞에 하얀 수거늘 걸어 두었다. 더 이상 공간이 없다면 하얀 수건을 거두어 들였다.
누가복음 22:8
유월절 양을 잡다
유월절에 도살한 양은 최소 4일 전(니산월 10일)에 골라 두어야 했다.
출애굽기 12:3
유월절에 쓰이는 양은 생후 8일 이상 1년 미만의 것이었다. 유월절 양은 최소 10명, 최대 20명이 함께 먹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함께 유월절 만찬을 했다면 당시 랍비들의 규약에 잘 맞는 숫자가 모인 것이다.
유월절에 먹을 양은 성전 안에서 의식에 따라 도살되어야 했다. 성전의 번제단에는 두 줄로 늘어선 제사장들이 양의 도살을 도왔다. 한쪽 줄은 은그릇을 들고 다른쪽 줄은 금그릇을 들고 제물의 피를 받았다. 번제단이 있는 제사장의 뜰에 30명의 순례자가 들어서면 입구인 니카노르 게이크가 굳게 닫혔다.
이후 제사장 찬양대가 은나팔을 세 번 부는 것을 신호로 양이 도살되었다. 유월절 양은 각자가 도살하고 피는 번제단에 두 줄로 늘어선 제사장은 마지막으로 피를 받아서 제단 밑에 부었다. 성전에 도살한 유월절 양은 가지고 나와 석류나무 가지에 끼워서 화덕에 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