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야기 2
스바여왕은 무엇을 타고 솔로몬을 찾아왔을까?
열왕기상 10:1-2
솔로몬 왕의 과시욕과 허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솔로몬의 통치기는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된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방의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열방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몰려오게 된다.
열왕기에열방의 대표로서 ‘북방’의 두로 히람 왕과 ‘남방’의 스바 여왕이 는 예루살렘을 찾아온 등장한다. 성경은 열방의 국가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 없이 남북의 두 지도자 방문으로 열방에 우뚝 선 솔로몬 제국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알려진 세계에서 남쪽 끝에 위치한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의 남서쪽 변장으로 오늘날의 예멘에 해당한다. 스바는 주전 2000년 중반부터 북쪽에 있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교역을 했다. 이곳은 홍해를 배로 건널 때 동아프리카와 인도를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해, 당시 황금과 맞먹는 값어치가 있던 향품과 유향의 중개무역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3대 왕으로 등극하고 홍해에 인접한 이스라엘 최남단의 에시온게벨(현 에일랏 항구)을 새로운 교역 중심지요 항구로 개발하자 스바의 대상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스바 여왕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한 솔로몬과 우호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스바 여왕은 향품과 금은보석을 낙타에 가득 싣고 예루살렘까지 2,200km에 달하는 장거리 여행을 했다. 아라비아 반도 끝에 위치한 스바에서 아라비아 사막을 뚫고 게다가 빈손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낙타(약대)를 언급하고 있다. 낙타는 언제부터 사육되어 사막의 주요한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을까?
낙타, 최고의 보상품
주변의 사막이 많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낙타만큼 이들의 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동물도 없다. 낙타는 히브리어로 ‘가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보상하다’를 의미하는 ‘고멜’에서 파생된 단어다. 유대백과사전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세 번째 글자인 ‘김멜’이 낙타의 목과 유사하다고 언급한다.
낙타는 농사를 지으며 정착할 수 있는 땅보다 모래사막이 압도적으로 많은 근동 지방의 주민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보상품’으로 여겨졌다.
낙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주인을 이롭게 하는데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유와 고기를 제공한다. 낙타 우유는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이다.
둘째, 낙타털이다. 낙타의 털은 유목민이 거주하는 텐트와 몸에 걸치는 겉옷의 주된 재료다.
셋째, 낙타 똥이다. 낙타 똥은 나무를 구하기 힘든 사막에서 유목민들에게 주된 연료로 사용된다.
이러한 모든 유익도 충분한 양의 물을 체내에 저장해서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불가사의한 능력에는 감히 견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들 가운데 오직 낙타에게만 주어진 능력이다. 낙타는 한번에 28갤런(약 106L)의 물을 마실 수 있고 이 물을 3실로된 위에서 제1위에 저장한다. 이 물로 낙타는 사막의 길을 8-10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도 행군할 수 있다. 게다가 500kg의 짐을 싣고 하루 95km-120km를 여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낙타는 ‘사막의 배’라고 불린다.
낙타는 음식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 가시와 덤불이 많은 사막의 식물들도 낙타는 거뜬히 먹고 소화시킬 수 있는데, 입술과 혀, 구개 등이 강하고 두터운 피부로 덮여 있어서 가시로 인한 통증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능력과 함께 낙타는 사막에 수시로 일어나는 모래바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빠른 속도로 움직여 피난처를 찾아낸다. 이러한 천부적인 능력은 자칫 사막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주인을 살려내는, 그야말로 주인에게 최고로 요긴한 ‘보상품’인 것이다.
낙타는 성격이 온순하고 주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동물이지만 발정기가 되면 굉장히 사나워진다. 탈무드에는 주된 재산 목록인 낙타가 발정기에 사나워져서 다른 집 소유의 낙타를 공격해 죽인 사례가 종종 언급되어 있다.
낙타는 언제 어디서부터 사육되었을까?
낙타는 쌍봉낙타와 단봉낙타가 있는데, 중근동 지방은 단봉낙타가 주종을 이룬다. 단봉낙타는 목이 길고 몸통이 다소 짧으며 몸빛의 변화가 많다. 달리는 속도가 쌍봉낙타보다 빠르며 발바닥이 부드러워 모래땅을 걷는 데 더 적합하다. 반면 쌍봉낙타는 목과 다리가 짧으며 단봉낙타에 비해 발바닥이 단단하고 강해 바위나 자갈이 많은 구릉지를 걷는데 적합하다.
주전 3000년경부터 남동 아라비아에서 사육된 단봉낙타는 아라비아 서부 해안을 따라 향품과 유향을 실어 나르는 대상 무역에 주로 사용되었다. 아라비아 상인들에게 낙타는 최고의 부가가치와 부를 창출해 내는 동물이었다. 아라비아 남방에서 낙타를 이용해 향품과 유향의 대상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들에 기록은 성경에서도 확인된다.
이사야 30:6, 이사야 60:6, 예레미야 6:20
낙타는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주로 전쟁에서 다량의 군수품을 나르는 데 사용되었다. 막상 전투 현장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이는 큰 덩치로 인해 적에게 쉽게 노출되어 타격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최초로 낙타가 보급된 것은 아라비아보다 한참 후인 주전 12-11세기경. 이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에 해당한다. 사사 기드온이 활약하던 당시에 이스라엘을 괴롭힌 적은 낙타를 탄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내 사막과 아라비아 사막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유목민들이었다. 이스라엘 농부들은 난생처음 보는 거대하고 기괴한 동물인 낙타를 보고 적과 싸우고자 하는 의욕마저 상실했다.
사사기 7:12
많은 학자들은 사사기에 낙타가 등장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족장시태에 낙타가 등장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창세기 12:26, 창세기 24:63, 창세기 31:34
낙타털 옷을 입은 세례요한
마태복음 3:4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맨 세례 요한의 의상은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선지자들의 대표인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열왕기하 1:8
엘리야의 의상으로 인해 털옷은 선지자의 대표적인 복장이자 유니폼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선지자의 유니폼으로서 털옷은 스가랴서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스가랴 13:4
옷감의 재료로 사용되던 낙타절은 부위별로 가격과 품질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다. 가장 비싼 부위는 낙타 배 부위의 털로 곱고 부드러워서 왕궁의 고관대작들이 입었다. 반면 낙타 등 부위의 털은 거칠고 두터워서 가격이 무척 저렴했는데, 엘리야나 세례 요한이 입은 낙타털 옷이 아마 이 부위의 털로 만든 옷일 것이다. 예수님은 낙타 배 부위의 곱고 부드러운 털로 만든 고급 옷을 다니던 왕궁의 상류층에 대해 지적하신 바 있다.
마태복음 11:7-8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
낙타는 레위기의 정결법상 부정한 동물이어서 식용과 희생제사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중근동 지방에서 고가품이요 요긴한 동물이었기 때문인지 낙타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두 번이나 등장한다. 두 말씀에는 모두 당시 랍비들이 주로 사용하던 과장법적 표현이 등장한다.
마태복음 19:23-24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유대 지도자와 후원자 가운데 상당수가 부유층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으면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제조건으로 자신의 부를 가난한 자들과 나눌 것을 제시하였다.
마태복음 23:24
이 비유에 등장하는 하루살이와 낙타는 모두 레위기 정결법상 부정한 것들이다. 당시 레위기 정결법을 충실히 따랐던 바리새인들은 팥알보다 큰 곤충은 정결을 위해 음식에서 확실하게 건져 냈다(레위기 11:32,34).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팥알보다 작은 하루살이는 부정함에서 제외시켰는데, 예수님의 과장법적 비유에 등장하는 이 바리새인은 하루살이조차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사람들이었다. 그러 그들이 이스라엘의 육상동물 중 가장 크고 의식적으로도 부정한 낙타는 꿀꺽 삼킨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한 이 비유의 말씀은 종교를 직업 삼아 살아가는 성직자들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말씀이 아닌가 싶다.
이세벨의 시체를 왜 개가 뜯어 먹었을까?
열왕기하 9:30-36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를 보면 다윗, 솔로몬 왕의 전성기를 지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뒤 빠른 속도로 타락해 가는 모습을 본다. 남유다는 그래도 덜한 편이다. 북이스라엘은 아합 왕 때 이미 여호와 신앙이 무너져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가 백성의 생활 깊은 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북이스라엘이 이렇게까지 타락한 데는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한몫 했다.
하나님은 결코 이세벨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으셨다. 예후를 왕으로 세우시고 아합의 집안을 모두 숙청하신 것이다. 특히 이세벨의 최후는 그동안 타락해 가는 북이스라엘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독자들에게 묵은 체증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선사한다. 이스르엘 성 밖으로 던져진 이세벨의 시체는 머리와 손발만 남긴 채 개가 모두 먹어치웠다. 이스라엘 백성을 우상숭배로 격동시킨 이세벨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묘사하면서 성경기자는 ‘개’를 등장시킨다.
성경에 등장하는 개는 현대인들이 키우는 애완용 개의 이미지가 아니다. 두 종류의 개의 이미지가 성경에 나오는데 야생 개와 목자와 함께 양 떼를 지키는 개가 그것이다.
야생 개, 썩은 고기를 먹는 야수
고대 근동 지방에서 개는 길들여진 가축이기보다 야생 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개는 성 밖(혹은 성 안)이나 쓰레기 더미에서 몰려다니며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탐욕스런 동물이었다. 특히 썩은 고기와 시체를 먹어치우는 야수였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자신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은 시체와는 절대 접촉을 금했다. 하나님은 죽은 시체의 고기를 개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
출애굽기 22:31
다윗은 시편에서 자신을 쫓는 원수들이 성을 두루 다니는 개처럼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시편 59:14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개가 그 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셨다.
출애굽기 11:7
개는 오늘날의 쥐처럼 달갑지 않고 성가신 존재로 여겨졌는데 무리를 지어 배회하는 야생 개들은 조금만 미씸쩍어도 마구 짖어대며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던 날 개들이 짖지 못하도록 재갈을 물리셨고, 평소와 다른 무서운 고요와 적막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내는 애굽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야생으로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개는 ‘탐욕’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개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성경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사야 56:11, 요한계시록 22:15
최고의 모욕, 개가 시체를 먹어치움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육체와 영혼은 ‘하나’라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매우 주의 깊게 다뤘다. 죽은 당일 합당한 절차에 따라 장례를 치러 고인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했고, 후손들은 매년 고인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을 마땅한 의무로 여겼다. 이런 사고를 이해할 때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야생으로 돌아다니는 개가 뜯어 먹도록 방치하는 것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과 수치를 상징했다.
열왕기상 14:11, 21:23, 22:38
겸손한 포현 VS 조롱하고 경멸하는 표현
스스로 개라고 표현하는 것은 겸손의 표현이지만, 상대방을 개라고 부르는 것은 극단적인 조롱과 경멸의 표현이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표현
사무엘상 24:14, 열왕기하 8:13
성경뿐 아니라 고대 근동 문헌 중 하나인 아카드 문헌에도 자기비하적인 겸손의 표현으로 자신을 ‘죽은 개’나 ‘길 잃은 개’로 비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남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표현
사무엘하 16:9, 사무엘상 17:43, 사무엘하 3:8
양떼를 지키는 용맹한 개
양떼를 지키는 개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덕목은 ‘용맹’이다. 히브리어로 개를 ‘켈렙’이라고 하는데, 애굽에서 나온 1세대 가운데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에 들어간 갈렙은 히브리어로 ‘칼렙’이라고 하며 개를 뜻하는 이름이다. 갈렙의 부모는 개의 용맹을 배우라고 의미로 그렇게 작명한 듯하다.
욥은 자신을 조롱하는 젊은이들을 양 떼를 지키는 개보다 못하다며 비난하고 있다.
욥 30:1
이사야 선지자는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을 맹수가 나타났는데도 짖지 않는 ‘벙어리 개’에 비유했다. 양 떼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은 마땅히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함에도 ‘벙어리 개’처럼 자신의 직무와 역할을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 56:10
집에서 키우는 애완용 개
마가복음 7:27-28
개와 관련된 복음서의 말씀 가운데 수로보니게 여인과 관련된 말씀은 너무나 유명해서 빼놓을 수가 없다. 개에 대한 유대인들의 두 가지 이미지, 즉 야생 개와 양 떼를 지키는 개와 달리 이 말씀은 개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는 주인이 먹는 상 밑에 있는 애완용 개의 모습이 엿보인다.
유대인들에게 개는 버려진 음식을 먹는 청소부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헬라의 관습에 익숙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헬라의 영향을 받은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도 종종 애완동물로서 주인의 식탁 밑에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특히 많은 음식 가운데 빵은 당시 식습관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의 유대인들은 텁수룩한 수염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는데 한 가지 문제는 식사할 때 음식이 자꾸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식사를 마친 후에 빵으로 수염에 묻은 음식을 닦아 냈다. 그러니까 이때의 빵은 오늘날의 ‘냅킨’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염에 묻은 음식을 빵으로 닦고 그 빵을 상 밑에 있는 애완용 개에게 던져주는 것이 당시 부유한 유대인들의 식습관이었다.
흔히 본문을 해석할 때 예수님이 이방인을 ‘개’라고 모욕했으나 수로보니게 여인은 전혀 굴하지 않고 예수님께 간구했다고 보지만 문화적 해석은 이와 차이가 있다. 본문의 개는 유대인들이 경멸해 마지않은 개가 아니라 헬라 문화에 영향을 받은 애완용 개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식사할 때 우선권을 설명하신 것이다. 곧 자녀가 먼저 먹은 후에 개가 먹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차피 조금 늦을 뿐이지 개도 빵을 먹게 될 것임을 주지시켜서 개가 먹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강변한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권세의 부스러기만으로도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에 감동하셨고 딸을 고쳐 주셨다.
마가복음 7:29
고양이 감싸는 동물
고양이는 히브리어로 ‘하툴’이라고 하는데 어근 싸다를 의미하는 ‘하탈’이다. 쉬거나 잘 때 몸을 굽히고 스스로를 감싸는 고양이의 습관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신생아를 싸는 포대기를 ‘하툴라’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강보’로 번역되어 있다.
에스겔 16:4, 욥기 38:9
성서시대에는 고양이가 사육된 적이 없어 성경에는 고양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유대인들에게 고양이는 청결을 상징했는데, 늘 혀로 자신의 털을 핥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겼다. 또 ‘중용, 겸손’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몸을 늘 조심스럽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고양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