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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이야기 6

 

광야에서 목자는 양들의 능력과 한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양들을 탈진시키지 않고 목적지까지 인도할 수 있다.

창세기 33:13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면서 수시로 양들의 숫자를 점검해야 한다. 양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시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서 기력을 잃고 쓰러져 낙오된 양은 없는지 수시로 살펴봐야 한다. 대열에서 이탈한 양은 몇 시간만 방황해도 탈진해서 죽거나 맹수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할 때,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을 뜻하는 네페쉬는 성경에서 가끔 전 인격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단순한 영혼이 아니라 전 인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편 19:7

 

양이 탈진해서 쓰러진다면?

<그림> - 4단계

 

삯꾼 목자는 나쁜 목자일까?

요한복음 10:11-12

 

우리는 삯꾼 목자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있지만 성서 시대에는 삯을 받고 남의 양을 돌봐주는 삯꾼 목자들이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삯꾼 목자는 선한 목자와 대비되는 나쁜 목자가 아닌 것이다.

목축과 농경 문화가 혼재된 성서 시대에 소유한 가축의 규모는 부의 척도였다. 욥은 마온 땅에 살던 나발은 수많은 가축을 소유한 당대의 부호였다.

욥기 1:3, 사무엘상 25:2

 

당시 한 명의 목자가 감당할 수 있는 양 떼의 숫자는 30-75마리였다. 따라서 많은 양을 가지고 있는 소유주는 고용된 삯꾼 목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여기서 목자, 소유주, 양 떼의 삼각관계가 형성되고, 목자는 양 떼의 실제 소유주와의 관계 그리고 양 떼와의 관계를 모두 고려하면서 양들을 쳤던 것이다.

광야의 환경이 워낙 활량하고 척박하다 보니 양들의 주인은 삯꾼에게 양을 맡길 때 20%의 소실을 각오했다. 따라서 목자는 내 양으로서 책임감과 애착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허약해서 쓰러지는 양이 있으면 굳이 돌봐야 할 책임이 없었고, 20%의 손실에서는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예수님은 왜 선한 목자일까?

요한복음 10:11

지금도 유대 광야 길을 혼자서 걷는 일은 위험하다. 갑자기 베두인 강도 떼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온갖 위험에 노출된 유대 광야에서 양 떼를 몰고 목적지까지 인도하는 일은, 목자로서는 때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험준한 바위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긁히고 피가 나는 일은 다반사이다.

 

마태복음 18:12-13

성서 시대의 목축 환경과 목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그리고 삯꾼 목자들이 20%의 양들을 아무런 책임감 없이 광야에 버려두고 오던 상황을 생각하면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전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첫째, 한 마리 양을 찾고자 99마리를 두고 갔다는 사실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경제학적으로 한 마리 양이 소중할까? 아니면 99마리 양이 소중할까?

한국사람들은 양고기를 먹어 볼 기회가 거의 없고 또 양고기 냄새가 싫다는 사람이 많지만, 이스라엘 현지에서 먹는 양고기는 맛이 전혀 다르다. 특히 5개월 미만된 어린 양의 갈비를 바비큐해서 구워 먹으면 이후로 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만큼 맛있다.

<양의 경제학>

광야에서 양을 치는 베두인들한테 직접 양을 사면 숫양은 한 마리에 대략 100달러, 암양은 300달러 가량에 구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 한 마리의 평균 가격은 대략 200달러이다. 비유에 나오는 목자가 99마리의 양을 광야에 내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로 갔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 상당히 어리석은 행동이다.

 

둘째, 99마리 양을 다른 목자에게 맡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비유에는 잃은 양을 찾으러 간 목자가 나머지 99마리 양들을 다른 목자에게 맡겨 두고 갔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가는 목자의 어리석음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강조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뉘앙스에 집중하지 못한다. 이러한 표현은 1세기 당시 랍비들이 즐겨 사용하던 과장법적 표현이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가르치며 당시에 유행하던 과장법적 표현을 즐기셨다.

마태복음 5:29

 

예레미야 33:6

스가랴 8:7-8

예수님 당시에 백성의 목자가 되어야 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대부분은 삯꾼 목자처럼 행동했다. 이들은 20%의 양들을 광야에 아무런 주저함 없이 내팽개치고 돌아오는 삯꾼 목자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들을 버려두고 간 양들인 세리와 창기, 문둥병자와 같은 이들을 집중적으로 찾으셨다.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 사역의 대부분은 잃은 자를 찾는 시간이었다.

 

이사야 1:8

 

이름과 명예를 중요시 하는 사회

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성서 시대에는 한 마을에서 서로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그래서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이미 선한 목자로서 명성을 날렸고, ‘자기 이름과 명성에 걸맞게 양들을 잘 인도하였으며 한 마리의 양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을 입구에 있는 양의 우리로 돌아왔다.

산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광야의 언덕에는 가로 방향으로 수없이 이어지는 선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양들이 지나다니던 양의 길이다. 그리고 이 길이 본문에 나오는 의의 길이다.

의의 길은 히브리어 성경에 마아갈 쩨덱으로 나온다. ‘마아갈은 잘 포장된 정상적인 도로나 길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다녀 자연스럽게 생긴 길을 가리킨다. 마치 마차가 자주 다니는 선을 따라서 길이 파이고 트랙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의의 길은 자주 다니다 보니 길이 되었지만 결코 부드럽고 걷기 편한 길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3:12

 

의의 길은 옳은 길

의의 길을 영어로 표현하면 ‘path of righteousness'가 아니라 ’right path'. 옳은 길이라는 뜻이다. 광야에서 만나는 수많은 잘못되고 틀린 길과 달리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옳은 길은 한 개밖에 없다. 의의 길의 반대말은 불의의 길이 아니라 틀린 길, 잘못된 길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환경을 잘 전해줄 수 있는 바른 번역은 의의 길보다 옳은 길로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하다.

 

예레미야 50:6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한다라는 뜻은 광야에 나 있는 수많은 길들이 있다. 이는 착시 현상을 일으켜 열심히 길을 찾지만 결국 다람쥐 쳇바퀴 돌 듯같은 자리를 맴돌게 만든다. 이것은 광야 투어를 하는 여행객들이 길을 잘못 들어 결국 같은 장소를 맴돌다가 탈진해서 죽는 이유이기도 하다.

광야에서 길을 잃고 곁길로 가는 것은 같은 동심원 안을 반복해서 도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의 히브리어 원어가 바로 쇼바브인데 이것은 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왜 생길까?

유대 광야의 험준한 산지와 골짜기들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온 독특한 표현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한 중앙산지에서도 특별히 험준한 지역이 동쪽으로 펼쳐지는 유대 광야지역이다. 이곳은 요단 계곡과 가까운데, 요단 계곡은 아프리카 판과 아라비아 판이 충돌하는 교차점이라서 주변에 수많은 단층과 절벽들을 보여준다. 이곳을 작은 그랜드 캐니언이라고 한다.

유대 광야에 있는 골짜기들의 특징은 대부분이 남북이 아닌 동서로 험준하게 달린다는 것이다. 동서로 깊게 파인 유대 광야의 골짜기로 인해 한낮에도 골짜기의 내부는 빛이 없는 흑암 가운데 있게 된다. 한낮의 눈부신 태양빛에도 유대 광야의 골짜기는 음침한 흑암이 드리운다. 남북으로 달리는 골짜기라면 대낮에 중천에(남쪽) 떠 있는 햇빛이 골짜기 내분에까지 미치겠지만 동서로 달리는 유대 광야의 골짜기에는 골짜기의 바깥과 내부가 극명한 흑암의 교차를 보여준다. 눈부신 정로라 할지라도 골짜기 안은 완벽한 어두움으로 차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섭다고 회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들을 막일 수 있는 잔잔한 물가는 그러한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만나는 잔잔한 물가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골짜기에 형성된다.

광야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려면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골짜기의 좌우 길목에는 동굴들이 많은데, 그 안에는 한낮의 햇빛을 피하려는 맹수들이 쉬고 있는 경유가 많다.

 

광야는 어둠의 땅

성경은 곳곳에서 광야를 어두움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레미야 2:6, 예레미야 2:31

 

별빛만으로 충분히 광야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초보 여행객들은 종종 구름이 밤의 별을 가리는 광야의 어두움을 경험하고는 무척 당황한다. 이때는 실로 손으로 더듬어야만 하는완벽한 어두움이 임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0:21

 

광야는 절대적으로 어두움과 절대적 빛이 공존하는 곳이다. 동틀녘과 해질녘에는 빛과 어두움이 전환되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빛의 자녀와 어두움의 자녀들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었고,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외부 세계를 모두 어두움의 세계로 정죄하며 터부시하였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동어반복이 아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를 동어반복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어야 할 막대기까지 제대로 그려 놓은 성화를 본 적은 없다. 이것은 성화를 그린 화가가 광야에서 양들을 치는 목자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단서다.

 

지팡이: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

지팡이는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로 만든다. 이것은 무척 길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할 때, 바위턱처럼 위험한 고세서 안전한 곳으로 양들을 옮길 때 지팡이를 사용한다. 또한 양들을 물가로 인도한 후에 물의 깊이를 잴 때도 지팡이를 사용한다. 광야의 척박한 환경에서 지팡이는 양들을 인도하는 필수품인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는 점차 왕이 손에 쥐고 있는 규로 이미지가 확대되었다. 야곱은 넷째 아들인 유다를 축복하면서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했다. 이때 목자의 지팡이와 왕의 규가 같이 등장한다.

창세기 49:10

 

막대기 : 올리브 나무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

올리브 나무의 줄기에서 나온 가지로 만드는 막대기는 뿌리에서 나온 가지보다 훨씬 짧다. 막대기의 한쪽 끝이 뭉툭하게 두텁고 무겁다. 목자는 막대기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갑자기 나타난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를 물리칠 때 사용했다.

이사야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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