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야기 6
대제사장 옷에는 왜 석류가 달려 있을까?
다산을 상징하는 석류
석류는 여성 호르몬의 일종인 에스트로겐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는 이유로 웰빙 바람과 함께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받았다. 한국에 들어오는 석류는 대부분 이란에서 수입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일곱 개의 식물 가운데 석류가 들어간다.
신명기 8:7-8
이스라엘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이 석류를 최음제로 사용했다. 이는 “석류 즙을 짜서 마시면 아이를 낳는다”고 하는 전통 때문이었다. 호로몬에 대한 의학 지식이 없던 시대에 이미 이러한 것을 알았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놀랍기까지 하다.
석류는 열매 안에 촘촘히 박힌 석류알들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여성이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석류는 다산을 축복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의 신년인 나팔절에 석류알을 먹는 전통이 있다. 이는 촘촘하게 박힌 석류알처럼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들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촘촘히 박힌 수백 개의 석류알처럼 613개나 되는 율법의 계명 한 개 한 개를 충실히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석류나무 가지는 수분이 많아서 잘 타지 않는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을 구울 때는 반드시 석류나무 가지에 양을 끼워서 굽는다.
대제사장 옷에 달린 유일한 식물, 석류
하나님을 섬기는 영화로운 직분을 맡은 대제사장의 옷에는 식물 하나가 유일하게 달려 있다. 과연 이 식물은 무엇일까?
출애굽기 28:33-34
석류는 그 생긴 모양과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과실로 뽑혀 왔다. 성막의 대제사장이 입는 옷은 고의, 반포 속옷, 에봇 받침 겉옷, 에봇, 견대, 허리띠 모자로 나뉘다. 이 가운데 청색으로 된 에봇 받침 겉옷의 끝에 석류와 금방울을 교대대로 달았다. 대제사장의 옷에 달려 있는 식물은 석류뿐이다. 이 어지 최고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성서 시대 유대인들에게 석류는 영화와 영광을 상징했다. 석류 열매의 모양이 왕관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석류는 히브리어로 리몬이라고 한다. 이는 높은 곳을 뜻하는 람에서 온 단어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 올립니다” 라고 말할 때 ‘높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람’이다.
광야의 성막에 기초해서 지어진 솔로몬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는 성소의 안쪽에 있는 지성소였다. 지성소의 기둥과 성전 안의 대표 문양은 석류와 살구였다.
역대하 3:16
영화를 상징하는 석류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구절에도 종종 등장한다.
아가 6:7
예수님이 사역했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그 전에 이스라엘 전 지역을 다스린 유대인 왕조는 마카비 왕조였다. 성전을 더럽힌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에 대항한 마카비 혁명(주전 167-164)으로 탄생한 왕조다. 마카비 왕조는 옛날 솔로몬 시대의 영화가 자신들의 왕조에서 대현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석류 문양을 넣은 동전을 만들기도 했다. 마카비 혁명으로 성전을 재봉헌한 날이 바로 예수님이 지키신 수전절이다.
요한복음 10:22-23
석류와 다윗의 별
두 개의 삼각형을 뒤집어서 만든 ‘다윗의 별’은 현대 이스라엘 국기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 육각형의 별이 석류의 문양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탈무드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온 랍비 유대교가 아닌, 유대교에서도 비주류에 속한 카발라주의자들이다.
오늘날의 유대교는 예수님의 사역하시던 당시의 유대교와 전혀 다르다. 신약 시대에는 유대교라고 하는 하나의 지붕 밑에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와 열심당과 나사렛파가 속해 있던 ‘한 지붕 다섯 가족’의 형태였다.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있었던 것이다.
나사렛파는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따르던 사람들이다. 바로 이들이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이다. 처음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교 배경에서 탄생한 기독교가 완전히 독자적인 종교로서 ‘자기 길’을 가게 된 것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하면서부터다.
오늘날의 유대교는 주후 70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로마의 진압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바리새파들이 만든 바리새파 유대교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생인 랍비의 가르침을 모은 탈무드를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토라와 함께 거룩하게 여긴다. 이런 흐름이 수백 년 가까이 내려오다가 중세 유럽에서 새롭게 시작된 분파 운동이 바로 카발라다.
카발라주의자들은 랍비 유대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탈무드를 도시 학자들이 지식을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배척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랍비의 가르침으로도 갈 수 없고, 어려운 학문과 지식을 아는 것으로도 갈 수 없으며, 누구든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개인적인 기도와 체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일종의 은사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카발라의 사상은 중세 유럽의 시골 마을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다.
미국의 할리우드 연예인을 중심으로 카발라가 많이 퍼지고 있다. 팝가수로 유명한 마돈나도 카발라주의자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이스라엘을 방문하면서 갈릴리 지역에 빌라를 사 두기도 했다.
카발라에서는 석유의 왕관 문양에 있는 6개의 별을 다윗의 별로 해석한다. 다윗의 별은 2개의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한 개의 삼각형은 예루살렘에서 절기를 보내야 하는 유월절과 칠질절과 초막절을 뜻한다. 다른 삼각형은 예루살렘에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되는 나팔절과 대속죄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아론의 지팡이에는 왜 살구꽃이 피었을까?
민수기 16장은 레위 지파인 고라를 중심으로 대제사장 아론의 권위에 도전한 반역 사건을 다루고 있다. 모세는 고라 일당의 교만을 이렇게 책망하고 있다.
민수기 16:8-11
하나님은 각 지파별로 지팡이 열둘을 취하게 하시고 그 지팡이를 지성소의 법궤 앞에 두게 하셨다. 다음 날 아론의 지팡이에만 아몬드꽃이 피고 아몬드 열매가 맺혔다. 이로써 하나님은 아론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다시 한번 세워 주셨다.
민수기 17:8
아론의 지팡이에는 수많은 꽃 가운데 왜 살구꽃이 핀 것일까? 개나리꽃이나 진달래꽃이 피지 않고 왜 특별히 살구꽃이 피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 살구는 잘못된 번역된 것이다. 살구로 번역된 식물은 아몬드다. 아몬드는 히브리어로 샤케드다. 이는 흔들어 깨운다는 뜻이다. 아몬드는 왜 흔들어 깨운다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일까?
긴 겨울잠을 깨우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아몬드 꽃
이스라엘에는 건기와 우기, 이렇게 두 계절밖에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리냐면서 이스라엘에도 봄과 가을이 있다고 따질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봄과 가을은 여름과 겨울이 교차하는 한 달 정도의 환절기를 말한다.
10월부터 4월까지의 우기 동안, 이스라엘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보낸다. 이는 한국보다 이스라엘 겨울이 더 추워서가 아니라 체감온도를 더 낮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로 예루살렘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해발 600-800m의 중앙 산지에 있는 예루살렘의 매서운 겨울바람과 추위로 고생한다. 대부분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유학생과 사역자들은 난방 장치를 돌리지 않고 긴 겨울을 보내는 때가 많다. 큰맘 먹고 난방을 돌린다고 해도 한국같이 온돌이 아니라 라디에이터로 공기만 덥히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그리 높지 않다.
성서 시대에도 예루살렘의 겨울은 추웠을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이스라엘은 다스렸던 헤롯 대왕은 추운 겨울을 예루살렘에서 보내지 않고, 사시사철 따뜻한 여리고에 겨울 별장을 지어 그곳에서 겨울을 나고는 했다. 헤롯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바로 여리고였다.
매섭게 추운 1월말과 2월 초에, 아몬드 꽃이 따뜻한 갈릴리 지역을 시작으로 핀다. 아몬드 꽃은 한국에서 보는 벚꽃과 비슷해서,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한국 성지 순례객들은 언뜻 보고 벚꽃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긴 겨울잠을 깨고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아몬드는 그 이름처럼 ‘흔들어 깨우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영적으로 흔들어 깨우기
성경에는 아몬드의 히브리어인 ‘샤케드’를 동사로 쓰는 구절이 종종 등장한다. 아몬드가 상징하는 것이 ‘흔들어 깨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를 알지 못하면 이런 말씀들은 아몬드와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다.
시편 127:1; 잠언 19:25; 마태복음 26:40-41
대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가? 자신이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함은 몰론이고,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백성들도 흔들어 깨워야 하는 것이 바로 대제사장의 직분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일어난 고라 일당의 반역을 마무리하려고 아론의 지팡이에만 아몬드꽃이 피게 하신 것이다.
예레미야가 환상 중에 본 나뭇가지
예레미야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다. 그는 남유다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끌던 요시야 왕 때부터 활동해서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멸망으로 치닫는 유다 말기의 혼란기를 함께 겪었다. 멸망 이후에는 유다에 남은 백성들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해 살면서 멸망의 아픔을 체험했다.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보면서 한없이 운 그야말로 눈물의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남유다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던 요시야 시대에 이미 예레미야에게 아몬드나무 가지의 환상을 보여 주셨다. 앞으로 닥칠 왕국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기의 칠흑 같은 어두움을 이겨 내도록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아 주신 것이다.
예레미야 1:11-12
하나님은 왜 굳이 환상 가운데 아몬드나무 가지를 보여 주신 것일까?
아몬드는 긴 겨울 동안 자지 않고 부지런히 깨어 있는 나무다. 이스라엘에 추운 겨울이 지나고 희망의 봄이 오는 것을 가장 먼저 알리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남유다는 므낫세 왕의 우상숭재와 죄악 때문에 바벨론에 팔리기로 예정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3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유다 땅은 형극과 질려가 나는 황무지로 변할 것이다. 모든 백성이 깊은 절망에 빠져 아무런 희망의 빛도 보지 못할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아몬드나무 가지의 환상을 미리 보여 줘서 닥쳐올 환난을 준비하게 하신 것이다. 포로기의 긴 겨울이 아무리 매섭게 휘몰아칠지라도, 아몬드가 겨울 동안 자지 않고 희망의 봄을 알리는 파수꾼이 되듯이, 하나님은 결국 포로기의 겨울을 끝내고 희망의 봄이 오게 하실 것이다.
희망의 봄을 알리는 아몬드
이스라엘 국회 앞에는 거대한 조형물인 일곱 촛대가 있다. 이 초대는 과거에 성막과 성전의 성소에 있던 메노라다. 메노라는 양쪽으로 세 개의 가지가 뻗어 나가 가운데 촛대와 함께 7개의 촛대를 밝히고 있다. 각각의 가지에 새겨진 대표 문양이 바로 아몬드꽃과 꽃받침이다. 이 역시 하루 종일 성전에서 타오르는 메노라와 모든 것이 잠자고 있는 겨울에도 자지 않고 깨어서 희망의 봄을 알리는 아몬드의 이미지를 연결시킨 것이다.
출애굽기 25:32-33
엘리야는 왜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구했을까?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구한 엘리야
열왕기상 18장에서 갈멜산 대첩을 승리로 이끈 맹장 엘리야의 모습과 19장에서 로뎀나무 밑에서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차이다.
엘리야는 불로써 응답하시며 친히 자신이 여화와인 것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격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깊은 절망과 우울에 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알 선지자들을 죽인 것을 보복하려고 이세벨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브엘세바까지 정신없이 도망쳤다. 지중해 북쪽 해변에 위치한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 쉼 없이 달렸으나, 말 그대로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달린 것이다.
엘리야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최저 강우량 선이 지나는 브엘세바에 사환을 홀로 남겨 두고, 광야로 하룻길을 더 들어갔다. 엘리야의 심정은 이미 죽기를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여호와께 차라리 죽기를 간구하고 있다.
열왕기상 19:4
비참한 신세를 상징하는 로뎀나무 그늘
이스라엘의 광야에서 자라는 로뎀나무는 성경에 종종 등장한다. 로뎀나무 아래서 햇빛을 피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신세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햇빛은 저주를, 그늘은 은혜를 상징한다. 로뎀나무는 빗자루같이 뻗어 있어서 그늘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로뎀나무 그늘에서나마 쉬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은 광야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상황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아래서 죽기를 간구했다니... 엘리야가 자신의 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상황을 100% 이해하고도 남는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있는 그를 만나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라.
열왕기상 19:5-8
이스라엘에서 만난 한 사모님에 관한 이야기다. 미술을 전공하신 사모님이 주일학교 교재를 만들려고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청한 엘리야’를 그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로뎀나무를 본 적이 없어서 느티나무처럼 큰 나무를 그렸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실제로 로뎀나무를 보고는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한참 웃으시는 것을 봤다.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라를 대신해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아이를 가졌다. 사라가 아들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닦달해서 얻은 결과였다. 하갈은 임신하자 스스로 안방마님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라에게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기 때문이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났다.
브엘세바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갈은 네게브 사막을 방황하다가 이스마엘을 떨기나무 아래에 두고 통곡했다.
창세기 21:14-16
여기서 떨기나무로 번역된 나무는 로뎀나무를 말한다. 광야에서 오갈 데 없이 방황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반드시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무가 로뎀나무이기 때문이다.
하갈은 불행의 씨앗을 낳고 교만했다. 자신의 신분을 잊고 스스로 주인행세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로뎀나무 아래라는 비참한 상황에서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은 그녀를 만나 주시고 살길을 열어 주셨다.
창세기 21: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