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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이야기 6

 

종교 예술, 특별히 기독교 미술은 인생 항해의 생념(生念)을 일으키는 다른 힘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믿음이다.

 

갈릴리 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

 

바다,

넓이 끝없이 까만

깊이 한없이 아득한

바다 또 바다

저 바다 너머는 또 무엇이 있나?

_함석헌의 수평선 너머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 모두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렸다. 그중 마가복음서 4:35-41을 본문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보자.

여느 때와 같이 그날 낮에 예수는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다. 무리를 상대로 비유를 전한 후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를 설명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저녁이 오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한다. 무슨 다급한 일이 있어서 해가 떨어진 이후 바다를 건너가자고 했을까? 어떤 이들은 기적을 계속해서 요청하는 무리를 피하기 위함이라고, 다른 이들은 예수가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고자 했다고 추정한다. 둘 다 개연성 있는 추정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바는 어둠바다라는 시공간적 배경이다. 이 시공간적 배경은 앞으로 나올 기적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는 문학적 장치이다. 예수가 탄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예수를 따르나 고난 받는 한 공동체를 상징한다. 마가는 곧바로 밤바다를 가로지르던 그 배를 향해 큰 광풍이 불어왔다고 보도하여 비유의 상징성을 또렷이 알린다.

갈릴리 바다는 평온하다가 갑자기 요동치는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는 바다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강한 바람이 산 사이를 휘돌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수 당시에는 이와 같은 과학적 설명보다는 악마적 세력을 그 광풍의 주인공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어쨌든 악마가 일으킨 광풍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왔고, 이내 배에 물이 가득 찼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이 피던 배는 사탄의 공격 앞에 가볍게 부스러질 일엽편주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고물에서 베개까지 베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예수의 을 두고 크게 두 가지 통상적 설명이 있다. 한 해석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완전한 신뢰를 강조한다. 예수의 잠은 안전에 관한 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믿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낮에 종일토록 일하고 지쳐 잠든 예수의 인간적 연약함을 동정적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 이야기에서 예수의 잠은 그의 백성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취한 침묵과 유사하다. 성서 전통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자비의 부족보다는 백성들의 인내와 믿음의 부족을 드러내곤 하였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분의 침묵을 깨고 역사하실 때를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예수의 잠 역시 예수의 무능과 무관심을 나타내지 않는다. 도리어 제자들의 조바심과 믿음 없음이 예수의 잠으로 인해 폭로된다.

 

제자들은 다급히 예수를 흔들어 깨우며 말한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에(혹은 파괴되는 것에) 마음을 쓰지 않으십니까?” 글에서 어조를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제자들의 말에 선생님을 향한 정중함을 찾기는 어렵다. 제자들은 아마 선생을 흔들며 다그치듯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드디어 예수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마귀를 꾸짖듯(에피티마오) 바람을 꾸짖고는, 바다를 향해서도 고요하고, 잠잠하라.”고 말했다. 바람은 이내 잦아들었고, 바다에는 큰 고요함이 찾아왔다. 귀신 들려 광포한 사람에게 온전한 정신이 찾아왔듯(5:1-20), 밤바다의 혼돈에 질서가 깃들었다. 제자들의 선생은 사람들의 마음만이 아니라 바람과 바다에도 권위를 가진 이였다. 밤바다에 평화를 가져 온 뒤 예수는 제자들을 훈계한다. “왜들 무서워하시오? 아직도 믿음이 없단 말이오?” 질책은 두 가지나 요지는 하나이다. 있을 때도 되었는데 아직도믿음이 없는가이다. 그런데 무슨 믿음일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위대한 기적 수행가인데, 그것을 믿지 못하느냐고 힐난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예수의 잠’, 곧 예수가 부재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도 예수가 그 배에 함께 있다는, 그래서 예수는 배에 있는 제자들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믿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한다는, 그래서 예수가 광포한 사탄의 세력마저 잠재울 수 있다는 믿음이 예수가 말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영광과 평안의 시간에도 예수가 그 배에 함께 있었듯이, 시련과 고통의 때에도 예수는 그 배에 함께 있었음을 제자들은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통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림1의 전체구도는 배가 처한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돛대의 끝과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는 안정적인 삼각형을 이루지만 그 뱃머리가 엄습하는 파도로 인해 45도 정도 들려 있다. 세찬 물결은 배에 부딪혀 하얀 거품을 낸다. 흰 파랑은 화면에서 제일 밝은 부분이다. 그렇다. 개인이나 공동체 모두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가 가장 눈에 띄는 법이다.

뱃머리의 다섯 명은 자신들에게 닥친 격랑에 최선을 다해 맞선다. 렘브란트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종종 배와 폭풍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투쟁을 그렸는데, 다섯 명이 그런 그림 전통과 관련되어 있다.

그림의 렘브란트와 예수 사이에는 다른 다섯 명이 있다. 화면 맨 위의 사람은 지금 일어난 위기 때문에 겁에 질렸다. 그 아래 사람은 예수의 몸을 흔들어대며 항의하고, 그와 함께한 사람은 예수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는지 아니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보라고 간청하는지 알 수 없지만, 둘 모두 선생을 공경하는 태도는 아니다. 그 다음 인물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한다. 이전 둘이 적극적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한 사람은 소극적으로 구세주가 깨어나기를 기도한다. 그 아래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은 배멀리를 이기지 못하고 배 밖으로 음식물을 쏟아낸다. 그의 육체는 문제를 대면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할 정도로 연약하다. 배의 후미에서 가까스로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은 키를 쥐고 있으나 배를 조정하지는 못한다. 반면 예수는 이제 막 깨어난 듯 자신들에게 항의하는 두 제자를 바라본다.

렘브란트는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매우 생생하게 성서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에 닥친 밤바다의 푹풍 속에서 감상자 당신은 어떤 인물과 유사한지를 물어온다.

렘브란트의나 감상자들 모두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예수는 폭풍 속의 배에 함께 있어 제자들과 운명을 같이 했고, 마침내 상황을 놀랍게 정리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을 알고 있는 우리는 고통의 상황 속에서 을 예감하고 믿음을 갖기보다 상황에 압도당하게 마련이다.

 

나사로의 소생

나사로의 소생은 1633년 갈릴리 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보다 2-3년 정도 앞선 작품으로 요한복음서에 나온 7개의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이자 가장 위대한 표적으로 평가된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베다니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았다. 그들은 남매로 예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었다. 물론 그들 또한 예수를 사랑하였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깊었다. 그는 예수께 향유를 붓고, 여자의 명예인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씻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예수와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이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모신 배에 풍랑이 들이닥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볼 때에 그 병은 사소한 질명이 아니라 죽음에 이를 정도로 위중하였고, 그들의 판단은 옳아 보인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다. 그러나 예수의 진단은 달랐다. 그 병은 죽음에 이를 병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 또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그러낼 병이다.

요한복음 11:4

 

예수가 움직이는 ’, 더 나아가 하나님이 움직이는 는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에게 달려있다. 요한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는 믿음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및 예수와 사랑하고 사랑받음에도 불구하고 이 들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말라는 것, 또 주님이 행동하시는 그 는 주님에게 속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가 되면 그분이 반드시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따라 움직이신다는 것.

 

마르다의 부름을 받고 온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위해 곡하러 온 유대인들 역시 예수 앞에 섰다. 마리아의 첫 말 역시 마르다의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마리아와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은 예수 앞에서 통절한 눈물을 흘리며 애곡하였다.

요한복음 11:33

 

원통하고 분하다는 의미를 지닌 통분은 그리스어 엠브리마오마이의 번역이다. 이는 신약성서에 5번 쓰였는데, 그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의 감정보다는 분노와 경고, 불평 등의 감정과 통한다. ‘답답하고 딱해 걱정스럽다는 뜻의 민망은 신약성서에서 약 17번 정도 쓰인 타라소의 번역으로 격정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그리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분히 여긴 것일까? 바로 목전에 부활과 생명을 두고도 죽음 때문에 우는 청맹과니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곡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생명수 한가운데서 목말라 죽어가는 그들의 어리석음, 생명의 떡 잔치에 굶어죽는 그들의 아둔함에 예수의 안타까움은 어느덧 통분으로 바뀌었고, 통분과 민망함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렘브란트는 나사로의 소생을 각각 유화와 에칭으로 제작했다. 이렇게 각기 작업한 데에는 상업적 목적도 있겠지만, 특히 여러 작품을 찍어낼 수 있는 에칭의 경우-그보다는 젊은 렘브란트의 마음이 이야기에 매료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작업실을 함께 쓰던 얀 리번스도 나사로의 소생을 그리며 경쟁적으로 본문 해석과 그림 솜씨를 견주었다.

렘브란트 그림의 독특성은 동일한 작업실에서 경쟁하던 리번스의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렘브란트가 빛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예수,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나사로를 연결한 반면, 리번스는 예수와 사람들이 각기 달리 빛을 받는 것으로 처리했다. 리번스의 빛은 예수와 사람들이 각기 다리 빛을 받는 것으로 처리했다. 리번스의 빛은 예수와 사람들을 연결하기보다는 각 인물들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게 한다. 그러나 리번스의 작품에도 렘브란트의 그림은 물론 다른 여느 작품과 비교해보아도 도드라지는 독특성이 있다. 리번스는 나사로의 소생 자체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오로지 예수와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만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나사로는 그림에서 미미하게 처리되는데, 화면 왼편 아래쪽에 나사로의 두 손이 위로 삐죽 나와 있을 뿐이다. 리번스가 보기에 이 사건에서 나사로의 소생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결정적이다. 리번스의 해석도 일리가 있다. 되살아난 나사로는 또 다시 죽게 된다. 나사로의 육적 소생 자체보다는 생명과 부활의 주와 그를 향한 믿음이 나사로의 소생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더욱 값진 교훈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수가 사라지고 사람들만이 그림의 주인공처럼 등장한 그림도 있다. 렘브란트를 흠모하던 반 고흐의 작품이 그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병과 사투를 벌였다. 평생 고흐와 함께 하던 그의 동생 테오는 그런 형을 극진하게 생각하여 평소 고흐가 존경하던 렘브란트의 그림 중 나사로의 소생 에칭화를 보내주었다. 테오는 그림 속 나사로처럼 형이 예수를 통해 소생하기를 간절히 바란 것이다. 고흐는 그 에칭화를 보고 작품을 만들었다. 태양을 제외하면 그림에는 나사로와 그의 두 누이만이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나사로의 턱수염을 근거로 고흐가 나사로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생각한다. 고흐는 그렇게 하여 정신병과 싸워 이기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고, 동시에 그 일로 감격할 동생의 모습을 마리아의 모습에 투영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사라진 이 그림에서 모종의 슬픔과 좌절이 감지된다.

 

스데반의 순교

렘브란트가 6개월 만에 고향 레이든으로 돌아와 곧바로 독립화가의 길을 걷는다. 더 이상 도제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렘브란트가 독립화가가 되어 최초로 서명하고 날짜를 명기한 유화를 그렸으니, 그것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다.

스데반의 순교는 스데반이 그의 고백으로 인해 순교하는 순간의 극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유화가 제작된 해가 1625년이니 렘브란트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이다. 렘브란트가 여린 모습을 채 벗지 못했을 때다. 이 작품은 그의 이후 작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띠는데, 한동안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박물관 창고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다. 이 작품에 이미 대가다운 예리함의 싹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스데반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쳐 들고 있다. 얼굴은 땀에 흠뻑 젖었지만 환하게 빛나고 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 놀랍게도 스데반의 눈에는 하늘로부터 비치는 영광이 밝히 보였다. 고백으로 인해 순교하는 장면은 중세 로마교회가 신자들에게 즐겨 들려주고 보여주던 주제다.

렘브란트는 스데반의 순교에 수많은 사람을 겹쳐서 그렸는데, 그 가운데 자신의 얼굴도 있다. 스데반의 머리 뒤, 돌을 든 두 사람의 겨드랑이 사이로 그의 얼굴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의 표정을 보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지 않음을 애써 강조하는 듯하다. 아니, 렘브란트는 스데반의 죽음을 너무나 슬퍼하며 애통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렘브란트는 이 순교 장면을 목격한 자로서 자신을 등장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심장을 담아내고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최초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자화상을 실험해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렘브라트는 지금은 복제품만 남아 있는, 스승 라스트만이 그렸다는 스데반의 순교를 참고해서 자신의 작품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 복제품에는 스데반이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돌러싸여 두 손을 모은 채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또 다른 화가의 그림을 보면 돌에 맞은 스데반이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자신을 죽이도록 사주 했던 말 탄 바리새인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스데반은 빛과 어둠을 가르며 천사들이 내려오고 있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렘브란트는 이 군인을 어둠 속에 배치시킴으로 이 사람이 바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당시는 로마가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범죄자에게 자신들의 종교법에 따라 돌로 치는 형을 언도하더라도 로마의 허락 없이는 이런 일을 하지 못했다. 또 한 사람이 어둠 속에서 분명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등을 진채 돌을 던지려 한다.

그림의 배경으로 가보자. 오른 위로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있고, 바리새인들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성벽에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전과 건물들은 폐허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흉측하게 그려져 있다. 당시 유대교는 모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제의와 규례들에 집착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폐허로 그린 것은 의도적인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유대교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강하 상징인 셈이다.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순간 증인으로 있었던 사울이라는 청년일 것이다. 당시 사울은 정통 바리새파 사람이요. 유명세를 떨치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워 랍비가 되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미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최초로 주님이라고 부른 고백의 사람이 된 것이다. 사울도 동시에 그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로마교회는 신자들이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지 못하도록 인문주의자들과 화가들을 동원해서 순교자들을 그려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순교자들을 성자의 반열에 세워 신자들을 위한 구원의 중재자로 등장시켰다. 그때 같이 어수선한 혼란기에는 더더욱 전통에 근거한 고백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을 향한 순교의 각오가 필요하다고 자극했던 것이다.

스데반의 복장을 잘 보라.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폭에서는 순교하는 스데반의 복장이 가장 화려하다. 그는 로마교회의 주교들의 옷을 입고 있다. 외투는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법복이고, 그 아래로는 무늬가 선명하고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하의를 받쳐 입고 있다.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고 증인 노릇을 한 사울은 어떠한가? 그는 당시 예루살렘 산헤드리 공의회 회원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젊은 나이에 공의회 회원이 될 정도로 사울은 학문과 신앙의 열정에서 유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사울이 장로들과 한 군인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목을 감싸는 무거운 망토를 입지 않았을 뿐, 사울도 화려한 복장을 한 채 앉아 있다. 머리에 교황처럼 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데반과 사울이 경쟁하듯 화려한 법복을 밉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렘브란트는 비참하게 죽어 가는 스데반에게 순교자가 받을 영광에 걸맞은 옷을 미리 입혔다. 또한 렘브란트는 율법의 고귀함, 산헤드린 공의회의 고귀함을 반영하듯이 사울에게도 화려한 옷을 입혔다. 우리는 이런 장치를 통해 개혁자들의 복식 논쟁을 연상할 수 있다. 렘브란트가 암스테르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무렵, 잉글랜드에서 열린 웨스터민스터 대회에서도 이 복식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사울의 고상한 복장은 로마교회의 고귀함을 보여 주려는 것이고, 스데반의 화려한 복장은 하나님께서 그를 개혁의 주교로 세우셨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개혁의 직분자가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닐진대 사제의 복장이 아예 없애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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