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이야기 7
예레미야의 절망과 희망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뚜렷이 볼 수 있는 렘브란트의 성서화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이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불과 24살에 그린 것으로 깊은 절망을 형상화하고, 희망의 출처를 밝혀놓았다. 이 그림이 제작된 1630-1631년에 렘브란트는 동료이자 암묵적 경쟁자인 얀 리번스의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이 시기에 바울이나 성 제롬 혹은 욥 등을 그렸는데, ‘그림1’의 인물은 그들과 닮아 있다. 따라서 그가 성서 혹은 성서와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은 높다. 한편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헬라클레이토스와 유사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에 그림 속 인물을 특정한 철학자로 추정하기도 했으나 그 자세만으로 그림 속 인물을 철학자 혹은 사상가로 단정하기 어렵다. 헤라클레이투스를 그리면서 라파엘이 모방한 것 같은 미켈란젤로의 <예레미야>를 떠올려보라. 하여 그림 속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평론가들은 그림1에서 왼편 장면에 주목했다. 그곳에는 불타는 성과 눈이 멀어 어쩔 줄 모르는 한 남자가 그 성을 등지고 있다. 또한 슬픔에 찬 그림의 주인공이 괴고 있는 책에는 ‘Bibel'이라는 글자가 써 있다. 이것이 결정적 단서이다. 이 인물은 불타는 성을 배경으로 통치자로 보이는 눈먼 이를 옆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괴고 앉아 애탄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가 ’예레미야‘가 아니라면 누구랴.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예언자로 활동했다. 다섯 왕의 통치를 겪으며 40년에 걸친 긴 세월을 예언자로서 보낸 그에게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칭이 따라 다닌다. 그러나 사춘기적 감상주의이나 열광주의적 신앙 감수성이 그 눈물의 출처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유다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 앞에서 그를 ‘견고한 성읍, 쇠기등, 놋성벽“과 같이 만들었다.
예레미야 1:18
그런 그가 흘린 눈물은 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서 전체를 대신한 혹은 전체와 함께 흘린 눈물이다. “예언자란 남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며 다른 이의 고통에 신음을 내는 사람이 아닌가.
그림 속 불타는 성은 예루살렘이다. 예레미야는 부름을 받을 때 ‘물이 끓는 가마’가 팔레스타인 쪽으로 재앙을 쏟아내는 환상을 보았다.
예레미야 1:13-15
얼마 안 가 그 재앙의 근원지가 바벨론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예수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멸을 두고 눈물을 흘린 것이 확실해졌다. 예수가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멸을 두고 눈물을 흘린 것처럼 예레미야도 바벨론에 의해 망한 예루살렘 앞에서 울고 있다.
예레미야 9:1
예레미야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다. ‘회개’(히브리어로 슈브)는 문자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그 외침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충실히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미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을 비판하며, 하나님을 떠난 유대인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향한 이 당연한 외침은 핍박받았다. 선지자는 탄식한다.
예레미야 15:10
온 세상과 시비 붙고 싸움을 하여 생명을 위협받던 예레미야는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런 비참한 처지에 놓인 예레미야는 자신을 예언자로 선택하고, 자신에게 예언의 말을 맡긴 하나님과도 싸웠다.
예레미야 20:7-9
결국 예레미야의 사역은 성공하지 못했다. 유다는 바벨론의 통치 아래 들어갔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요시야의 막내아들 맛디니야를 시드기야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꼭두각시 왕으로 앉혔다. 유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이를 살리지 못했다.
렘브란트는 이 이야기를 그리며 성서 외에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고대사>의 도움을 받아 예술적 상상력을 풍성히 하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바벨론의 왕은 예레미야를 풀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온갖 값진 선물을 선사했다고 한다. 물론 바벨론에 가서 호화롭게 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역사의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는 것을 거절했지만, 렘브란트의 예레미야는 선물을 주는 느부갓네살의 호의마저 야박하게 물리치지는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렙브란트의 이 그림을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구별해주는 또 다른 특징은 예레미야의 자세이다. 렘브란트의 예레미야는 오른손과 오른발을 모두 몸 뒤로 감추고 있다. 오른손과 오른발은 ‘힘’을 상징한다. 렘브란트의 예레미야는 ‘힘’을 잃은 조국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왼팔은 근심과 고민에 잠긴 턱을 괸다. 남아 있는 기력은 비통을 어렵사리 견뎌내는 데에 모두 쓰인다. 드러난 왼발은 빛을 받고 있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갈 목적지를 잃었다.
절망과 비탄 가운데 예레미야가 몸을 지탱한 책은 성서이다. 사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맡긴 말은 “맹렬하게 타는 불”이며 “바위를 부스는 망치”였다.
예레미야 23:29
예레미야는 정해진 불행에 슬퍼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맡겨준 말씀이 ‘세우며 심는’것임을 확신하는 데에 희망을 걸었다.
예레미야 1:10, 31:17
예레미야와 같이 암울한 절망의 기운에 휩싸인 우리 역시 미래로부터 오는 하나님 외에 다른 희망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주 우리의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은 불타는 성을 배경으로 한 희망의 믿음이자, 믿음의 희망이었다.
예레미야 3:23
사도의 절망, 배신자의 희망
누가복음 5:8
렘브란트는 베드로의 간구가 간절했음을, 두 손을 꼭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는 베드로의 자세를 통해 보여준다. 이후 다른 그림에서도 보겠지만 이는 회개나 간절한 바람을 표현할 때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하던 자세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규정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현시하는 예수가 떠나주기를 바랐을까?
그 죄를 규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은 죄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도 않고, 그의 회복을 소망하지도 않은 죄이다. 하나님의 미래보다는 인간의 현재를 ‘믿으며’ 그저 일생을 체념과 자조 속에 안주하려고 한, 간혹 못 견디게 찾아오는 비애를 달래려고 한 죄이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통치의 현현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떠나달라는’ 어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고 선언한다.
누가복음 5:10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인생의 바다에서 간신히 숨 붙어 있는 사람들을 낚는 어부, 그건 애당초 갈릴리의 어부가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그는 한낮에 바다 깊은 곳에 가서 사람을 낚을 그물을 내려야 하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외쳤다. “주님 만일 그대시거든 나에게 명령하셔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마태복음 14:28
초기 작품의 베드로는 구해달라는 청원의 다급함보다는 무엇인가를 뉘우치는 모습니다. 걸어오라는 예수가 아니라 풍랑을 바라본 자신을 자책하는 듯하다. 반변 후기 작품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오른팔을 필사적으로 붙든다. 후기의 렘브란트는 구원자가 예수밖에 없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이는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렘브란트가 상상력을 발휘해 묘사한 장면의 차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물 위를 걸었으나 바람을 보고 무서움에 떤 베드로의 작은 믿음을 꾸짖는다. 새로운 현실을 살아보겠다는 베드로의 초심이 그린 견고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마태복음 14:31
예수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신문을 받으러 끌려갔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멀찍이 따라 그 집에 들어가 자신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준 선생의 운명과 가까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작은 용기도 얼마 가지 못했다. 집의 한 여종이 불빛을 향하여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가 예수의 제자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예언대로 베드로는 자신과 예수의 관계를 부정했다. 이후 두 번이나 그러한 일이 반복되었고 곧 닭이 울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닭이 우는 그때 예수가 돌이켜 베드로를 보았다고 전해준다.
누가복음 22:61
여종은 모닥불이 아니라 들고 있는 촛불로 베드로를 살핀다. 렘브란트 그림에서 빛은 으레 은총이나 베드로의 정체를 탐색하는 도구이다. 여종의 손에 들려 있는 촛불이라도 그 빛은 진실을 밝혀준다.
배신자의 희망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지 않는 데에 있다. 몰트만은 절망, 체념, 게으름과 비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교만의 다른 측면임을 지적했다. 옳은 말이다. 희망의 상실이 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약속에 합당한 존귀한 존재로 여기셨건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를 신뢰하지 않는다.”(몰트만) 베드로보다 적극적으로 배신을 도모한 가룟 유다의 근원적 죄 역시 배신 그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변화시키는 능력을 무시하고 스스로 절망한 데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이 모든 일이 별거 아이닌 가볍게 털고 일어나라는 값싼 격려는 아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들으려 무릎을 꿇어야 한다. 둘째, 배신자는 열쇠를 내려놓아야 한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에 대한 참된 인식을 허락했고, 예수는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선사했다. 물론 그 열쇠는 땅과 하늘 사이에 매고 푸는 권세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렘브란트의 베드로는 열쇠를 차마 손에 들고 있지 못한다. 그는 지금 희망을 구하는 중이다. 베드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비통에 잠겨 있다. 이 장면은 바리새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회개를 떠오르게 한다.
누가복음 18:9-14
토빗의 기도
토빗서는 외경에 해당한다. 토빗은 납달리 지파 출신으로,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 포로가 되어 악명 높은 성 니느웨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는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총애를 받아 왕에게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는 벼슬을 맡게 되었다. 하나님게서 주신 이런 좋은 기회를 활용하여 토빗은 동포에게 적극적으로 자선을 베풀었다. 그의 아들 산헤립이 앗수르 왕이 되어 유다를 침공했는데, 이 때 토빗이 죽은 유대인들을 매장해 줌으로써 산헤립의 눈 밖에 난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게 되었고, 그의 모든 재산은 몰수당했다. 토빗이 시력을 상실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자 그의 아내 안나는 손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베를 짜서 주인에게 갖다 주고 삯을 받았다. 이 장면을 렘브란트는 토빗이 기도하는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해서 유화로 그렸다.
토빗의 머리 위에 조롱과 양파 뭉치를 그려 넣었다. 위치는 창문 바로 옆이기도 한데, 작은 조롱이 벽에 걸쳐져 있다. 이 조롱과 조롱 안에 있는 새는 부부관계를 상징하는 장치다. 그 아래로 마늘 뭉치가 매달려 있다. 질병을 막아 준다는 믿음을 상징할 수 있다. 한편 마늘을 벗기면 눈물이 나기에 신뢰를 상실하여 서로 다투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도 하겠다.
아래쪽 양쪽 모서리에는 지팡이와 모닥불이 있다. 왼쪽 모서리 렘브란트의 서명 바로 위에 놓인, 토빗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는 그가 장님이라는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강아지와 관련된 장치일 수 있다. 강아지는 신뢰를 상징하지만 그 강아지 목에 어릿광대들의 벨을 달아 놓음으로 어리석은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오른쪽 맨 아래 타오르는 모닥불은 토빗의 먼눈과 관련해서 그의 마음을 결코 밝혀 주지 못하는 불, 어리석은 불을 상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