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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야기

 

예수님이 내쫓으신 성전의 장사꾼들은 어디에 있었을까?_안나스 상점

대제사장 가문이 희생제물을 팔았다?

성전 벽 남쪽의 더블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면 왕의 행각 지하를 거쳐서 성전 뜰 밖으로 나오게 된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왼쪽에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가 직영하던 부스(상점)가 있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다.

누가복음 3:2

 

이 상점에서 성전제사에 필요한 물건, 즉 소, , 비둘기, 밀가루, 올리브 기름, 포도주, 나무 등을 팔았고,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이곳에 있었다. 이 상점은 대제사장인 안나스 가문이 직영으로 운영했고, 여기서 구입한 제물만 성전 제사에 적합한 규격품으로 인정받았다. 당연히 가격은 시중가의 몇 배나 비쌌고, 이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성전 뜰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행위를 할 수 없었지만, 아나스의 직영 상점은 원래의 성전 뜰인 마카베오 성전산의 바깥인 헤롯 성전산에 위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따지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이렇듯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종교적 기득권층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며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예수님의 사정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예수님은 이곳의 환전상을 뒤엎고 채찍으로 물건 파는 자들을 내쫓으셨다. 요한은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마태는 공생애 말기의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의 성전을 방문하셨고, 성전을 깨끗게 하신 사건은 성전 방문 때마다 한 연례행사였을 것이다.

요한복음 2:14-15, 마태복음 21:12

 

제사장 그룹은 친로마파?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수확물과 가축 가운데 흠이 없는 것을 가져와야 했지만, 안나스 가문은 자신의 상점에서 구입한 제물만 바치도록 함으로써 가장 수지맞은 이권에 개입하였다. 당시 이런 일은 일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과의 결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제사장은 로마 총독에게 엄청난 뇌물을 리베이트로 바침으로써 대제사장직을 얻을 수 있었고, 꾸준한 뇌물 공여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는데, 이처럼 극도로 타락한 종교 세력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예수님 사역 전후로 당시 대제사장의 임기는 다음과 같다.

 

안나스 6-15

엘르아살 16-17_안나스의 아들

가야바 18-37_안나스의 사위

요나단 37_안나스의 아들

 

특히 예수님이 당시에 실제적인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긴 임기가 눈에 띈다. 당시 로마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거룩한 날인 대속죄일에 입는 대제사장의 옷을 성전 북쪽에 있는 안토니오 요새에 압수하고 있었다. 대속죄일이 임박한 며칠 전에 대제사장복을 내어 줌으로써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다스리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비위를 맞추어 가며 그토록 오랫동안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것을 보면 가야바의 권모술수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민란이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피지배민들의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수장으로 하는 산헤드린 법정도 이스라엘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에만 유효한 것이었다. 따라서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자칫 민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보이자 가야바는 미연에 위험한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다. 이스라엘 자치권의 상징인 산헤드린 법정의 유지를 위해, 물론 그 속마음은 자신의 종교적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욕심이었지만, 가야바는 한 사람 예수를 희생시킴으로써 온 민족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다.

요한복음 11:49-50

 

당시에 제사장 그룹은 로마와 한패로 인식되었다. 66년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점령한 메나헴이 가장 먼저 제사장 가문을 학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유대 문헌인 <미쉬나>에는 당시의 부패한 대제사장 가문 네 곳을 언급하면서 조롱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안나스 가문이다. 당시에는 대제사장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이 아버지였다.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함부로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의 부패한 대제사장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마태복음 23:9

 

대제사장의 직무:종신직, 세습직

대제사장의 직무는 원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섬기는 종신직이었고, 그 자손들이 대대로 직무를 이어 나가는 세습직이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까지 1차 성전시대(기원전 960-586)에는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져 18명 대제사장이 직무를 이어갔다. 그러난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으로 이어지는 2차 성전시대(기원전 515-70)에는 85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2차 성전시대에는 그렇게 많은 대제사장이 있었을까? 이는 대제사장직이 뇌물을 통해 사고파는 부정부패와 권모술수의 온상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은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을 두 명 언급하는데, 이는 당시의 종교적 타락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한 시대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조재할 수 있는가? 한 명뿐이어야 할 대제사장을 어떻게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이는 특별히 의사요 역사가인 누가가 쓴 누가복음에서 잘 나타난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무려 64회 나타나는데, 이는 당신의 대제사장 직분을 둘러싼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표현이다.

누가복음 3:2, 22:66

 

예수님과 제자들은 왜 솔로몬 행각에 자주 모였을까?_솔로몬 행각과 왕의 행각

솔로몬 행각은 어떤 곳?

성전 바깥 뜰에는 사방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덮은 행각이 있었다. 이 행각 아래 그늘에서 순례자들은 휴식을 취하고 담소를 나누곤 했다. 유대인들은 기드론 골짜기와 접한 탓에 헤롯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동쪽의 행각을 특별히 거룩한 곳으로 여겼다.

동쪽의 행각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던 솔로몬 왕의 이름을 따라 솔로몬 행각으로 불렸다. 행각을 따라 늘어선 3열의 기둥들과 지붕은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고, 당시 주니어 랍비들은 이 솔로몬 행각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강론하곤 했다.

열두 살 된 소년 예수와 함께 방문한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렸다. 사흘을 잡듯 뒤져서 간신히 아들을 찾아내는데, 소년 예수는 성전에서 랍비들의 토라 강론을 들으며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이 아들 예수 찾은 곳이 바로 솔로몬 행각이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2:46-47

 

공생애 사역 초기에 예수님도 주니어 랍비로서 솔로몬 행각에서 제자들에게 토라를 가르치곤 하셨다.

요한복음 10:22-23

 

베드로와 요한 기도 시간을 좇아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 옆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만났다. 이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자 성전의 순례자들이 구름 떼같이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들었다.

사도행전 3:11

 

이후에도 사도들을 통해 수많은 표적과 기사들이 일어나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솔로몬 행각에 모여 기도에 힘썼다. 솔로몬 행각은 예수님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던 일종의 아지트와도 같은 곳이었다.

사도행전 5:12

 

왕의 행각은 만남의 광장

솔로몬 행각이 동쪽을 따라 늘어섰다면, 왕의 행각은 남쪽을 따라 늘어섰는데 실제로는 왕과 무관한 곳이다. ‘왕의 행각은 건물이 제왕다운 풍모를 따라 지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2개의 기둥들이 4열로 늘어선 이곳은 로마식 도시의 특징인 포룸으로 이용되었다. 포룸은 오늘날로 말하면 만남의 광장으로서 로마 시민들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대화를 나누고 각종 비즈니스를 하던 곳이다. 포룸은 극장, 경기장과 함께 로마식 도시에 갖춰진 세 가지 필수 요소 중 하나였다.

헤롯은 예루살렘 성전을 남쪽으로 증축하면서 포룸 용도로 쓸 왕의 행각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왕의 행각 좌우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곳은 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많은 경우 이 상점들을 마지막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게 하고 환전상의 테이블을 뒤집은 곳으로 혼동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주로 채권, 채무, 환전과 같은 세속적인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이던 안나스와 가야바 가문은 성전 제사와 관련된 종교적 비즈니스를 했는데, 이곳은 그 상점과는 다른 곳이다.

 

솔로몬 행각 VS 왕의 행각

성전 바깥을 따라 둘러선 동쪽의 솔로몬 행각과 남쪽의 왕의 행각은 모두 만남의 광장역할을 하던 곳이다. 그러나 두 장소에 모이는 사람들의 성향은 확연하게 달랐다. 솔로몬 행각은 로마에 적대적인 유대 민족주의자와 종교주의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반면 왕의 행각은 헬리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방화된 친로마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현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당시의 1세기 유대인 사회도 세속적 유대인들은 서로 섞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극히 종교적인 도시인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을 둘러싼 행각에 이방화된 친로마파 유대인들의 장소가 있었다는 것은 사뭇 충격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로 사역하던 갈릴리 지방과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유대 지방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갈릴리와 유대 지방 주에서 어느 곳이 더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이었을까? 이 질문을 전지면 흔히 유대 지방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정답은 갈릴리 지방이다.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갈릴리 지방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들이 가끔 등장한다.

요한복음 1:46, 요한복음 7:15, 사도행전 2:7

 

갈릴리 지역과 관련된 경멸의 표현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과 제자들을 배우지 못한 일자무식의 촌사람들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당시에 만연하던 갈릴리 지방에 대한 천대와 무시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갈릴리 지역은 아시리아의 다글랏 빌레셀에 의해 정복된 후(기원전 732)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의해 재정복되기까지(기원전 103) 오랫동안 이방 제국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별명도 이방의 갈릴리였다.

이사야 9:1

 

그러나 이곳을 정복한 마카베오 왕조의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이방화된 갈릴리 지역에 유대 지역 출신의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하는 정책을 폈다. 이로써 이방화된 갈릴을 유대 땅으로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갈릴리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종교적 성향이 강한 열렬한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아마도 이때 유대 베들레헴 출신의 요셉집안도 갈릴리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수때 인구조사를 위해 본적지에서 호적을 해야 했는데 그때 갈릴리 나사렛의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내려가야했다.

누가복음 2:1, 2:4-5

 

갈릴리는 오랫동안 이방회되었다가 예수님이 오시기 100년 전쯤에 열렬한 유대주의자들이 유입되면서 새롭게 탄생했다. 특히 종교적이고 민족주의적 성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기원후 1세기를 전후해서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에 반발하며 다섯 차례나 봉기를 일으켰는데, 항상 그 선봉에 섰던 지역이 갈릴리였다. 로마에 반대하는 반체제 운동을 이끈 열심당의 본거지도 갈릴리에 있었다. 이와 달리 예루살렘은 로마 제국에 편입된 메트로폴리탄으로서 국제화, 더 나아가 이방화된 지역이었다. 다양한 계층이 섞여 살던 예루살렘에 비해서 갈릴리는 유대교와 관련된 교육 수준에서나 권위 있는 랍비의 숫자에서나 유대 지방을 훨씬 능가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데려간 성전 꼭대기는 어디일까?_성전 꼭대기

성전 꼭대기: 나팔 부는 곳

왕의 행각 서쪽 타워는 성전 꼭대기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성전 내부에서 버러지는 일은 물론 예루살렘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전망대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팔 부는 곳으로 알려졌는데, 안식일과 월삭(새 달 초하루), 신년(나팔절)이 되면 이곳에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비잔틴 시대에는 왕의 행각 남서쪽 끝이 아니라 남동쪽 끝을 나팔을 부는 성전 꼭대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남동쪽 끝은 기드론 골짜기에 가깝고 사람들이 몰려 사는 도시에서 멀기 땜에 나팔 부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다. 도시에서 가까운 남서쪽 타워에서 나팔을 불어야 예루살렘 시민들이 모두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남서쪽 타워 밑에는 서쪽과 남쪽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들로 인해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성전 남서쪽의 타워가 나팔을 불던 성전 꼭대기임을 밝힌 사람은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벤자민 마자르다. 이것은 지붕과 타워에 올라간 사람이 자칫 실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또는 타워)난간에 새겨져 있었다. 이스라엘의 건축물은 신명기 율법을 따라서 반드시 지붕에 난간을 만들었다.

신명기 22:8

 

성전꼭대기: 메시아의 통치를 알리는 곳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나팔을 불며 모든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성전 꼭대기에 대한 특별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의 날이 도래하며 메시아가 이 성전 꼭대기에서 나팔을 불며 메시아의 우주적인 통치를 알릴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메시아 시대의 도래와 나팔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런 믿음은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 24:31, 데살로니가 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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