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
I. 머리말 | |
II. 논리의 전제: 하느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 |
1. 인간의 타락상(1:18-2:29) | |
2.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다(3:1-20) | |
III. 은혜의 믿음을 통한 하느님의 의(3:21-4:25) | |
1. 명제: 믿음을 통한 의(3:21-26) | |
2. 논쟁: “유대인이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3:27-4:25) | |
IV. 하느님의 의가 나타난 결과(5:1-8:39) | |
1. 죽음으로부터의 자유(5:1-21) | |
2.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6:1-7:6) | |
3. 성령 안에서의 자유(7:7-8:39) | |
V. 구속사에서의 유대인 문제(9:1-11:36) | |
1. 사도의 비탄(9:1-5) | |
2. 하느님의 선택의 자유와 섭리(9:6-29) | |
3. 이스라엘의 죄와 타락(9:30-10:21) | |
4. 구속사의 비밀(11:1-36) | |
VI.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생활(12:1-15:33) | |
1. 일반적인 훈계(12:1-13:14) | |
2. 직접적인 권면: 서로를 용납하여 하나가 되라(14:1-15:13) | |
3. 바울의 사도직(15:14-21) | |
VII. 맺는 말(15:22-16:27) |
• 성서에서 만난 억울한 사람 16,13
13 Greet Rufus, chosen in the Lord; and greet his mother -- a mother to me also.
성서에서 만나는 몇몇은 참 억울합니다. 그 중 하나는 나귀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위해 제자들을 미리 보내게 되는데, 제자들은 주께서 쓰라하신 나귀를 만나게 됩니다. 이 나귀는 스스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인의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나귀 없는 예수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말입니다. 그러니 뜻하지 않게 참 귀히 쓰인 것 같습니다.
또 한 사람으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있군요. 로마의 식민지, 식민지 백성들은 로마 군인의 요청에 의해 강제로 부분적 노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10리를 가지고 하면 100리를 가라.’라는 말은 이 10리가 바로 식민지 백성의 의무가 되는 거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지요. 길을 가다가... 그런데 단순한 것이 아닌 게 하필 십자가인가?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그러나 이 시몬은 그 십자가를 어찌되었던 지게 되었고 어쩌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최초의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문자적으로...
오늘 루포는 시몬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시몬의 부인입니다. 그 구레네 사람 시몬의 십자가는 바로 믿음의 사람들을 낳게 되었으니 참 귀한 십자가입니다.
• 자기의 배를 섬기는 사람들 16,18
18 For such people do not serve our Lord Christ, but their own appetites, and by smooth talk and flattery they deceive the hearts of the simple-minded.
어른으로 살기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른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시대의 어려움은 역시 어른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디어를 보며 두려운 것은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떤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자기네 배를 채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추구할 만한 삶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이 배우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대신에 자기의 배만 섬긴다는 말은 방종과 방탕과 같은 극도로 타락한 세상의 육을 따른 삶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이 은유가 보편이 된 세상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로 보여야 할 것이 보다 분명합니다. 시대가 자기의 배만 섬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함께 나누는 이야기
먼저 행하라 유대교 랍비인 힐렐(Hillel)에게 한 개종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힐렐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하기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율법 전체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그 주해에 불과합니다. 가서 배우십시오.” 우리 사회에는 먼저와 나중의 논리가 팽팽합니다. 한쪽은 이해해주면 존경하겠노라 하고, 다른 한쪽은 존경하면 이해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문제 해결보다, 대립이라는 영원한 평행선이 있을 뿐입니다. 평행선의 분리와 충돌은 그 어느 쪽도 비극입니다. 이 같은 순환 논리에 빠지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집니다.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존경받고 싶으면 먼저 존경하십시오. 이해받고 싶으면 먼저 이해하십시오.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하십시오. 섬김을 받고 싶으면 먼저 섬기십시오. 방법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행동하는 것이다. 신앙의 행위를 사랑하라.” - 마틴 루터 (1분의 지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