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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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벨 혼란 욕망

황교안 “4·19혁명은 혼란, 5·16쿠데타는 혁명”

2015년 5월 한겨레신문의 기사입니다. 기사에서 황교안 총리가 2009년 저술한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한 바 있다고 합니다. 조금 어의가 없지만 그는 다음 한국어 사전의 정의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혼란’에 대한 다음 한국어 사전의 정의입니다. ‘일 따위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뒤섞여 어지러움.’입니다. 조금 더 친절하게, ‘갈피’의 정의는 ‘겹치거나 포개어 놓은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를 뜻합니다.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니 ‘혼란’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구별할 수 없는 것, 뒤섞여 있는 것, 어지러운 것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 녹아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혼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바벨’(בָּבֶל)과 함께 떠오릅니다. 그 유래는 다음의 성서 구절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세기 11, 9

‘바벨’이 ‘혼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랄’(בּלל) ‘혼란하다’라는 동사를 어원으로 할 때입니다. 그러나 ‘혼란’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바벨’은 ‘문’을 뜻하는 ‘밥’(בב), ‘신’을 뜻하는 ‘엘’(א)의 합성어로 ‘신의 문’이라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 자리 잡은 수메르 사람들은 높은 곳에 ‘지구라트’(Ziggurat)라는 탑을 쌓았는데, 그들은 이 탑 ‘바벨’을 신이 땅으로 내려올 때의 받침대 또는 하늘과 땅을 통하는 문처럼 여겼습니다. 바벨탑은 바로 이 전통 속에 있습니다.

brueghel1.jpg

대(大) 피터르 브뤼헐, 추수하는사람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대(大)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de Oude, 1525-1569)은 브라반트 공국(현 네덜란드 지방)의 화가입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화가로 농민 생활에 대한 사랑과 유머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농민의 브뤼헐'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그린 바벨탑은 현재 두 점이 있는데 그 크기 차이로 〈큰 바벨탑〉, 〈작은 바벨탑〉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번 그림은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큰 바벨탑〉입니다.

brueghel2.jpg

대(大) 피터르 브뤼헐, 바벨탑,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그림에서 바벨탑의 배경을 보면, 건설 장소는 탑을 만들 자재 운송을 수로로 할 수 있는 연안입니다. 탑 뒤에는 거대한 시가지가 그려져 있습니다. 거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탑의 모습은 성서의 묘사처럼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듯 웅장합니다. 왼쪽의 아래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당시 바벨론의 통치자 니므롯이 신하들과 함께 석공들의 작업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니므롯의 발아래는 한 노동자가 있는데 양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보통 서양에서는 통치자 앞에 한 쪽 무릎, 중동에서는 양 무릎을 꿇는다고 하니 화가는 오늘 그림이 중동의 이야기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바벨탑의 내부를 보겠습니다. 원추 모양의 탑은 로마의 콜로세움이 떠올라서인지 익숙합니다. 하늘을 바로 향해야 할 탑이 약간 기운 듯 오르고 있습니다. 또 이상하게도 아래층이 미처 만들어지기 전에 위층을 올리는 뒤바뀐 건축이 보입니다. 어떤 불길함이 스칩니다. 이 불길함은 화가가 담고 싶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건축과 붕괴를 한 화폭에 넣기 위한 의도, 그는 이 기움과 뒤바뀜을 통해 이 탑이 결국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시대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 역시도 기움과 뒤바꿈으로 그려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인간의 욕망 앞에 사회의 긍정성을 표현해야할 그래프는 기운지 오래 되었고 가치는 전도 되어 버렸습니다. 환경의 파괴부터 빈부격차의 그래프가 그렇고 자본 앞에 뒤바뀌어 버린 생명의 가치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애써 부인하는 시대입니다. ‘혼란’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답은 달리 찾고 싶습니다. ‘혼란’이 가진 부정적인 어감을 넘어 긍정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위험함이라는 것의 원인이 사실 ‘혼란’이 아니라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욕망’이 만들어낸 ‘제도’들이 질서를 가장해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질서가 위협 받을 때 혼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애초 혼란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너무도 대립되어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는 ‘혼란’은 다름의 다른 이름이고 다름은 다소 무질서해 보이지만 새로움으로의 나아감의 출발입니다. 모두가 같을 수도 없지만 모두가 같다면 더 이상의 변화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혼란’에 조금만 용감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오늘 조금 혼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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