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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순종, 아브라함

 

obe2.jpg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대심판정에서 열린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에서 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습니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직위와 권한을 모두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 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습니다.”

박근혜의 네 마디 짧은 대답에는 판결에 승복한다는 말이 없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출발한 헌법재판소, 그리고 그 판결들. 개인적으로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합헌 결정 등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이번 결정은 입맛에 맞지 않나 봅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따르는 것은 자신의 입맛이 아닐까 싶어 언짢습니다.

 

‘순종’은 히브리어로 שָׁמַע(솨마), ‘듣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obedience인데, 라틴어 oboedire(오보이디레)가 어원입니다. oboedire는 ‘~앞에’ 라는 ob(옵)과 ‘듣다’라는 audire(아우디레)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나 라틴어나 ‘순종’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귀를 주다. 주의를 기울이다’입니다.

이 ‘순종’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억이 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에게 중요한 인물입니다. 세 종교 모두 그가 그들의 선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관련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게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내용이 있으니 바로 아브라함과 신과의 약속입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맺은 민족의 번성과 땅의 약속입니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5 이것은, 아브라함이 나의 말에 순종하고, 나의 명령과 나의 계명과 나의 율례와 나의 법도를 잘 지켰기 때문이다.” 창세기26장2~5절

 

이 약속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의 결과가 민족의 번성과 땅을 허락이라는 믿음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종’에 대한 신앙의 강조 때문인지 그리스도교는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많은 그림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에 대한 가장 불편한 부분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자식 이삭을 태워서 연기를 올리는 제사(번제)의 제물로 드리라는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장면일 것입니다. 이 그리고 이 장면은 창세기 26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순종’, 그 주요한 내용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obedience.jpg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렘브란트. 1635년. 193.5×32.8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로 ‘근대적 명암의 시조’ 또 유럽 동판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그림은 빛과 어두움이 스민 사람과 사물들, 특히 어두움을 적절하게 배치해 빛을 표현하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그는 개신교인으로 깊은 신앙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성서에서 그림의 소재를 구해, 《갈릴리 호수의 폭풍과 그리스도》, 《돌아온 탕자》 등 많은 걸작을 남겼습니다. 오늘 그림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도 그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은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조금 피하고 싶은 그림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가톨릭 개혁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은 가톨릭으로 이삭은 개신교로 비유하여 가톨릭은 개신교를 죽일 수도 있으나 살렸다는 의미를 담아 개신교를 가톨릭으로 재개종하고자 했던 신념이 담긴 이야기로 해석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신교적인 네덜란드에서 당시 가톨릭으로의 재개종이라는 이런 가톨릭적인 주제를 그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림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림을 보며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천사,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의 배치입니다. 위에부터 천사,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이렇게 S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배치를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곧 삼위일체로 해석하는데 이건 좀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제 눈에 들어온 그리스도교적 해석은 이삭의 허리에 두른 수건에서 출발합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른 이삭의 모습은 흡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는 예수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림의 과장입니다. 그림 속 천사는 이삭을 향하는 아브라함의 칼 든 손을, 손목을 제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서는 천사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런데 화가는 천사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손목을 잡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에 관여하게 합니다. 곧 신의 참여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십자가 고통을 상징하는 이삭, 아브라함을 막아서는 천사. 이 두 모습은 인간의 삶과 이를 두고 보지 않으시는 신 그리고 신의 개입과 구원이라는 그리스도 사건 곧 화가의 구원관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리스도 사건으로 해석하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순종’ 자체 보다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신적 사랑의 선언이라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자주 ‘순종’이라는 단어가 무비판적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그리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순종’을 말할 때, 우리는 몇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을 말하는 주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순종은 자주 힘을 가진 집단에 의해 사용됩니다. 오늘 시대를 구분하지 못하고 힘 있는 이에게 ‘공주’와 ‘마마’를 말할 때, 우리가 만나야 하는 ‘공주’와 ‘마마’는 위험합니다. 또 “나를 거역하면 10년 안에 알거지”라는 목사의 선언은 두렵습니다. 모두 힘 있는 자들의 폭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순종’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따라져야 하는 것일까? 이삭을 바치라는 내용이 과연 순종해야 할 내용일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따를 만한 것인지 묻지 않는 순종은 순종의 참된 의미와 멀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은 보험 판매로 충분합니다.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순종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그려진 예수의 순종 말입니다. 이 순종 사건은 구원 사건입니다. 결국 순종의 의의는 그것을 통해 드러날 구원 사건에 의해 나타납니다. 순종은 순종하는 이의 구원을 말하기에 정당하고 그러기에 순종의 내용이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복종 / 한용운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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