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중 목사의 "그림으로 읽는 구약 이야기" 7

by 좋은만남 posted Apr 1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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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곳에, 야곱

세월호가 3년 만의 '마지막 항해'를 마쳤다. 세월호 인양을 염원해온 미수습자 가족들 입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힘들었다”라는 탄성이 나왔다. 세월호는 7만2,000톤급 반잠수식 선박인 화이트 마린(White Marlin)호에 실려 최고속력 10노트(시속 약 18.5㎞)의 속도로 105㎞의 바닷길을 항해했다. 31일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반 화이트 마린호는 오후 1시 전남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데일리즈.1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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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한겨레신문 2017.4.4.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경선 후보가 지난달 31일 경기 하남 신장시장을 방문한 뒤 “국민들의 요구가 있으면 위원회에서 다룰 내용”이라고 말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 중앙일보 12017.4.4.

두 기사를 보며 ‘여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여기’가 세월호의 진실을 수용할 수 있을까? 이런 ‘여기’에서 세월호의 진실이 다시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갈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신은 ‘여기’에 계신가?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창세기28장16절

물음에 대한 야곱의 대답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복을 가로챈 후,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충고에 따라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몸을 피하려고 합니다. 하란으로 피하던 중 한 곳에서 돌을 베고 누워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오르는 사다리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을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다리의 맨 위에서 신은 야곱에게 그가 누운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곳’에서 장소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מָקוׂם’(마쿰)입니다. 이 ‘장소’를 성서의 이야기를 따라 칭하게 된다면 ‘בֵּית אֵל’(벧엘) 곧 ‘신의 집’입니다. 야곱은 ‘이 곳’에서 신을 경험하고 본래 이름이 루스였던 ‘이 곳’을 ‘신의 집’이라 부르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성서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따르면 신적 경험이 있으니까 단순히 ‘신의 집’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적 경험이 이루어지는 ‘이 곳’이 야곱에게는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야곱의 삶을 가로지른 ‘이 곳’은 공포의 공간이고 절망의 공간입니다. 그 한복판입니다. 그러니 ‘이 곳’이 이제 ‘신의 집’이라 부르게 되는 사건은 모든 것이 다시 해석되고 이해되는 신적 경험 곧 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어떤 희망의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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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 <야곱의 사다리>, 1805, 런던, 대영박물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이자 시인입니다. 그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Steven Paul Jobs)에게 영감을 준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보이는 그대로를 복사하는 듯한 그림, 감동을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하는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사색과 신비의 형태로 그림에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나면 우리와 동시대의 그림이 아닐까 할 만큼 현대의 그림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블레이크는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욥기>, <신곡> 등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오늘 그림 창세기28장16절 야곱의 신적 경험에 대한 그림,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얼핏 공상과학영화를 상상하셨다면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환상과 신비, 그의 특징이니까요. 그림을 보면 태양처럼 빛을 퍼뜨리는 동그란 것으로부터 바벨탑이 연상되는 나선형의 계단들이 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계단을 따라 성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사가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음식을 나르는,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의 손을 잡고, 서로 안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은 그가 본 환상 가운데 최고의 행복 모음이겠지요. 계단을 내려와 야곱의 자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 피곤해 보입니다. 풀어헤쳐져 외투 밖으로 들어난 두 가슴, 쭉 뻗고 있는 양 팔을 보면 누웠다 보다는 널브러졌다가 더 적당해 보입니다. 그 동안의 고단한 삶을 뒤로한 어떤 해방감까지 느껴집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습니다. 중세에는 하늘과 땅을 중개하는 성모 마리아의 역할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상징으로 읽었습니다. 사다리를 예수의 상징으로 보기도 했는데 이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내주셨다(요한복음3장16절)는 성서의 구절들 때문입니다. 또는 인류의 길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성화(聖化) 곧 거룩함에 이름이라는 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블레이크는 야곱의 신적 체험을 노랑과 검정의 대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대비는 흰색과 검정보다 더 강렬합니다. 그림은 신이 위치한 곳의 밝음과 인간이 자리한 곳의 어두움, 신은 이 현장에서 태양과 같이 빛을 내리신다는 신학적 상상으로 이끕니다. 그가 인간 실존의 고통을 담은 <욥기>을 그린 것이나 말년 죄와 벌, 기다림과 구원에 대한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의 <신곡>을 목표했던 것도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곱의 ‘이 곳’,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며 몸서리치게 두려운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 곳’을 생각합니다. 촛불이 승리라는 프레임은 ‘이 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미래를 닫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환상이 그립고 ‘이 곳’에 신이 있다는 그의 고백을 갈망합니다. ‘이 곳’에 신은 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장소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מָקוׂם’(마쿰)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קוּם’(쿰), ‘서다’라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곳’에 ‘서 있’고 ‘서 있을’ 것입니다. 조금 억지스럽게 선언을 요구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서 있는 곳에 신이 있다. 그리고 서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눈물의 중력 / 신철규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눈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너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 질 때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못 박힐 손과 발을 몸 안으로 말아 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