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다름, 유다와 다말
선거 때가 되면 그리스도교인들의 표심이 중요해 지긴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어떤 지점에서는 반드시 자신의 입장을 말해야 하곤 합니다. 아래 기사는 19대 대통령선거 문재인 후보 측이 기독교 공공정책 발표회에서 밝힌 ‘동성애 동성결혼’에 대한 입장입니다.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측이 교과서 등에 동성애 동성결혼이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일보 2017년 4월 20일]

그런데 이 지점이 왜 꼭 그리스도교 공공정책과 연결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도 지점에서 말입니다. 갑자기 궁금해집니다. ‘동성애 동성결혼’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 말입니다. 그럼 감리교회의 시작인 영국 감리교회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같은 성의 사람과 결혼한 감리교회의 목회자들은 징계 절차들에 위험을 받지 않을 것이다. 감리교회 회의는 동성 결혼을 포함한 시민 결합에 대한 기존 정책을 확대하기로 합의한 이후 이렇게 결정했다. 또한 교회는 같은 성의 결혼자들에게 공적인 축복의 제공에 자유로울 것이다.” 『Church Times』 11 Jul 2014 《churchtimes.co.uk》
과거 영국 감리회는 전통적인 입장에 따라 동성결혼에 반대했으나, 2014년에 다시 검토하여 시민 결합을 한 커플에게 축복을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혼란이 생깁니다. ‘동성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무엇일까? 한국 감리교회가 옳다고 하면 영국 감리교회는 틀리게 됩니다. 한국 감리교회가 그것을 죄라고 하면 다른 모든 감리교회는 죄를 짓게 된 것일까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조금 예민한 시대 수평적인 다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오늘 이야기 유다와 다말은 시대 수직적인 다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유다와 다말에 대한 이야기는 다름에 대한 이해 없이 다가가면 반드시 어려운 문제에 빠지고 맙니다. 예를 들면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 유다와 다말은 ‘성서 최대의 섹스 스캔들’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38장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유다에게는 엘, 오난, 셀라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첫째 아들 엘을 다말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형 엘이 죽자 유다는 오난에게 “형수에게 장가들어 시동생으로서 형의 후손을 남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품고 형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려던 오난마저 죽게 됩니다. 그러자 유다는 다말에게 수절하고 어린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 약속하였고 이를 믿고 다말은 친정으로 향합니다.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내가 죽고 셀라도 장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는 약속처럼 다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와 같이 베일로 몸을 가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유다를 기다렸습니다. 다말이 창녀인 줄 안 유다는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약속하고 이에 대한 담보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주고 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유다는 친구를 지켜 담보물을 찾아오게 하려 했으나 다말은 그곳에 없었고 그는 사람들에게 신전 창녀가 어디로 갔느냐 물어 보았으나 그곳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부끄러움을 당할까 걱정하게 됩니다. 몇 달 후 유다는 다말이 임신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심하게 노한 그는 다말을 태워 죽이라 명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사람을 보내 도장과 끈과 지팡이 주인의 아이라 말합니다. 이 물건들이 자신의 담보물임을 알았던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니라”하고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다말은 쌍둥이 세라와 베레스를 낳았는데 이 베레스가 다윗으로 예수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러시아 제국(현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Surrealism) 화가입니다. 초현실주의는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학 이후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꿈과 상상을 예술의 방법으로 가져옵니다. 때문에 조금 이해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상상과 풍부한 색채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림에서 다말은 빨강의 옷과 검은 베일을 두른 채 그림 앞부분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비교적 작게 그려진 유다는 멀리서 지팡이를 들고 검은 시선으로 다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을 보며 다말의 빨강과 유다의 검정에서 상징을 봅니다. 다말의 빨강 치마는 성적인 유혹으로 유다의 검은 시선은 욕망의 음침함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다말의 손모양과 유다의 걸음에서는 대비가 느껴집니다.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다소곳이 놓인 오른 손의 검지와 중지가 보이는 정적인 모습은 다말의 어려운 결정으로 이끌고, 지팡이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왼 손으로 긴 옷매를 잡은 채 재촉하는 걸음에 나타나는 동적인 모습은 유다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보게 합니다. 이는 유다의 얼굴에 드러난 웃음과 다말의 가려진 얼굴에서 역시 그렇습니다.
샤갈의 감상을 뒤로 하고 샤갈에게 미안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유다와 다말에 대한 샤갈의 이해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해는 ‘성서 최대의 섹스 스캔들’이란 접근에 머물러 보입니다. 이 모든 오해의 출발은 이야기가 놓인 시대와 우리 시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서의 수혼법(嫂婚法, Levirate Law)이 그것입니다. 수혼법은 죽은 형의 부인을 동생이, 때로는 시아버지가 부인으로 맞는 법으로 가문의 대와 재산을 지키고 자식이 없는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결혼제도였습니다.
유다와 다말에 대한 오해는 샤갈의 눈 또는 우리의 시대로 그 시대를 직접 바라보는 한계 때문입니다. 지역적으로 수평적이든, 시대적으로 수직적이든 그 사건이 놓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오려내기 하는 것이 가져오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한 번 더 생각하면 샤갈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문화적 한계를 지닌 수평적 수직적인 한 생각을 교리로 만들어 모두가 따라야 한다고 억지 쓰며, 때로는 그 다름의 소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종교 권력이 보다 큰 문제입니다.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것 말입니다.
『화엄경』[華嚴經]이란 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이 『화엄경』은 산스크리트어로 ‘Gaṇḍavyūha Sūtra’라고 합니다. 주요한 내용은 부처의 깨달음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화엄경』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산스크리트어 ‘Gaṇḍavyūha’(간다뷰아)의 뜻이 재미있습니다. ‘Gaṇḍavyūha’는 ‘여러 가지 꽃’을 의미하는 ‘Gaṇḍa’(간다)와 ‘장관’을 뜻하는 ‘vyūha’(뷰아)의 합성어입니다.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한 세계’를 말합니다.
조금 있으면 지역 꽃 축제들이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의 꽃으로 가득한 꽃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언덕과 들엔 여러 꽃들이 모여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세계를 봅니다. 모든 언덕이 튤립이 아닌 세계, 장미가 개나리를 꿈꾸지 않는 세계, 가득한 꽃들이 야생화라 불리지 않는 세계, 모든 꽃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피어 모인 세계 어떤 가요? 다름이 받아들여지는 세상. 화엄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