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국가란 무엇인가, 사사의 때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인류란, 보이지 않는, 비록 아무리 힘센 앞발로도 파괴할 수 없는 좁은 우리 속에 갇혀 있음을. 그 우리에 생각이 미치자 호랑이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인간이야말로 천한 노예다. 그들이야말로 짐승이다. 그러나 인간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으면 누군가 그들을 노예처럼, 짐승처럼 대할 것이다. 그들은 또 누구란 말인가?”
- 바실리 예로센코, 길정행 역, 「호랑이는 지쳤다」,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슬픔』
(하늘아래, 2007)
바실리 예로센코(Vasilli Yakovlevich Eroshenko, 1889~1952, 우크라이나 오부코브카). 모든 종류의 권력과 지배를 부정하고 거부하던 아나키스트였으며, 그런 세상을 꿈꾸던 사회운동가였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 의지와 열정을 담은 시와 동화를 쓴 작가였습니다.
동화 속 호랑이는 인간이 만든 ‘우리’, 성城이 가진 위험 다시 말해 안정이라는 착각, 자유의 양도, 박탈, 진정한 자유의 상실 그리고 그 실제인 계급, 차별, 억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 가나안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그리고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지역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사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등과 같이 대부분 가나안 정착하는 과정 속에 야훼에 의해 세워진 일시적 군사 지도자였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네 이야기는 그 기간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그 요약과 같은 본문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17장 6절)
결국 ‘이스라엘의 혼란은 왕이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왕에 의한 통치가 이뤄져야한다’라는 왕정에 대한 변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세우신 일시적 지도자 사사의 시기를 지나 권력의 세습이 이루어지는 왕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저자가 기록한 왕정의 필요성과 다른 이야기가 사무엘서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장로들이 가나안의 다른 나라들과 같은 왕을 요구합니다. 야훼는 그들에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왕의 권한과 그것이 미칠 영향을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당신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합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당신들이 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입니다. 그는 당신들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입니다. 그는 또 당신들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당신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당신들이 스스로 택한 왕 때문에 울부짖을 터이지만, 그 때에 주님께서는 당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 11~18절)

윌리엄 블레이크, 『사울에게 나타난 사무엘의 유령』, 1800년 무렵,
국립 미술관 워싱턴 D.C. 미국.
한마디로 야훼는 왕에 의한 통치를 반대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폭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모두 전해 들었음에도 장로들은 왕이 있어야 하며 그는 자신들을 다스려야 하고 또한 이끌고 전쟁에 나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백성들의 뜻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백성들의 뜻이 정말 그럴까요? 백성들은 왕이 없던 사사 시대, 야훼와 함께 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야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왕정을 요구했다는 것은 억지스럽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장로들은 왕이 있든 없든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지배자들입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설명은 장로들이 왕정이 백성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가나안의 지배자들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지키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시작된 왕정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야훼가 경고한 왕과 여전한 지배자들에 의한 백성들을 향한 폭력의 시작이었습니다.
블레셋 군의 진영을 본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게다가 더 이상 야훼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사무엘의 예언이 그립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을 부를 수 있다는 무당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무당은 죽은 사무엘을 불러냅니다. 이렇게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을 꾸짖습니다. “이제 왕위는 다윗에게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패할 것이고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사울은 두려움 끝을 향합니다.
그림의 왼쪽, 사울은 붉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 권위자임을 묘사합니다. 그는 사무엘의 예언을 듣고 놀라 넘어집니다. 왕권의 박탈, 이스라엘의 패배와 자신의 집안의 죽음을 선언을 듣는 자리, 그대로 서 있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입니다.
양 손가락을 펴 다가올 그 두려움을 막아서고자 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가운데 서 있는 사무엘, 양손의 손가락 하나씩을 펴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추락하고 추락할 것이다.” 사울이 경험할 완전한 몰락 선언의 강조는 아닐까?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밝게 그려진 사무엘의 배경 그가 가진 야훼의 권위를 보여줍니다.
오른쪽의 기괴해 보이는 사람은 무당일 것입니다. 죽은 자 사무엘의 이야기가 하늘의 뜻임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조금 실수가 있습니다. 사무엘을 불러낸 무당은 사실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림은 남성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사울 위 두 사람의 표정도 생각해 볼만합니다. 과연 그들이 놀라움과 두려움은 무엇일까? 사무엘의 예언 때문에? 조금 다른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사울 왕이 무당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는 장면에 동행한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사울에게는 중요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다윗이 새로운 왕으로 들어설 것이라 예언합니다. 새 왕의 등극이 자신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들 역시도 사울만큼 두려웠을 것입니다.
화가가 그린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 사무엘과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만남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시작과 그 필요성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있습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리바이어던』[Leviathan]입니다.
홉스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항해 싸우는 ‘자연 상태’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 계약을 맺어 국가를 세우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모아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계약’을 통해 『구약성서』의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은 인간의 역사 속 무시무시한 권력을 지닌 ‘세속의 신 Mortal God’으로 우리에게 등장합니다.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생각은 이제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홉스의 정의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국가에 의해 개인의 다툼이 줄었을지는 모르나 그 국가들에 의해 안정이란 이름으로 대규모의 전쟁으로 그 개인들은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국가가 진정으로 보호해왔던 것은 무엇일까’입니다. 역시 대다수의 국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우리에게 의무를 부여할 수 있지만, 우리는 국가를 향해 어떤 요구도 또 부여된 의무에 대한 거부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 거부는 개인들을 향한 국가의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국가의 뜻이 아닌 저마다 자기가 옳은 대로 신의 뜻을 물으며 신이 주신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 사무엘이 야훼의 뜻을 대언한 왕정의 폭력과 오늘 그 국가에 의한 또 다른 폭력을 경험하며 묻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서 국가 없이 신중심적이며 그래 무권력 상태로 서로 사랑하고 돕고 살아가는 세상을 살짝 들여다봅니다.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으로…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