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지혜의 방향, 솔로몬의 심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33명 그런데 0.33333이면 0.5미만이니 135명이면 통과다.’ 1954년 우리나라 제3대 국회에서 일어난 상식을 초월한 국회 역사상 가장 창피한 사건입니다. 당시 개헌안의 핵심은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 금지 조항 삭제’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을 유지시키고 싶었던 이들의 의지입니다. 투표 결과,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통과를 위한 136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게 됩니다. 그러자 자유당은 136명이 아니라 135명 내림이라는 억지 주장으로 이를 통과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반올림의 이론적 배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로 최윤식 박사입니다. 그는 당시 국내 최초의 수학 박사, 서울대 교수, 그리고 대한수학회 회장이었습니다. 스스로든 시켜서든 그는 결국 국회를, 역사를 코미디의 장으로 만들었으며 결국 4.19혁명의 한 원인이 됩니다. 그의 지혜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 그가 기브온 산당 제단에서 신에게 바친 번제물의 수가 천 마리가 넘었습니다. 신은 그에게 나타나 무엇을 바라는가 물었습니다. 지혜라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은 지혜에 더불어 부귀와 영화, 장수까지도 허락합니다.(열왕기상 3장 4-14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솔로몬의 지혜는 자신의 아이임을 주장하는 두 창녀 중 친어머니를 찾는 재판(열왕기상 3장 16-28절)입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3장 1절부터 읽는 솔로몬의 지혜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솔로몬은 이미 지혜롭게 이집트 파라오의 딸을 아내로 맞는 혼인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신의 뜻을 묻고 따르는 그것이 안정의 기반이라는 이스라엘의 전통에는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력 안정에 보다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결정에는 신도 없고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지혜로운 왕일 뿐입니다.

루벤스, 『솔로몬의 심판』, 1617, 코펜하겐 국립미술관.
바닥에 누인 죽은 한 아이와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는 다른 한 아이가 있습니다. 감겨진 눈을 하고 있는 아이와 달리 신하의 손에 들린 아이의 눈과 입에 두려움이 고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서 셀 가치도 없는 계집아이가 아니라 사내아이입니다. 소중한 아이입니다.
오른쪽,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성은 두 팔을 걷어 올렸습니다. 두 손은 치마를 꼭 붙잡았습니다. 그녀의 결정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결단은 어머니가 아니군요. 뒷모습만을 보이는 여인. 아이의 죽음보다는 아이의 삶을 바라고 있습니다. 흰 드레스를 향하는 그녀의 오른팔과 펴진 손바닥은 ‘저 여인에게 그리고 아이의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을 든 신하의 눈빛은 과장되어 있습니다. 검게 그려진 눈동자. 그것은 분명 자기가 들은 명령, ‘정말 잘라 두 여인에게 나누어야 할까’ 솔로몬의 명령을 의심하는 눈빛입니다. 분명한 딜레마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판결을 지켜보는 이들. 과연 솔로몬 왕은 어떻게 결정할까? 그들의 관심은 아이의 생명보다 솔로몬 왕의 지혜입니다. 아이의 삶과 죽음보다는 왕의 지혜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아이의 삶과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솔로몬의 심판’입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관심하고 있습니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벨기에 화가)에게 요구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그림의 화가 루벤스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플란다스의 개』(A Dog of Flanders). 영국의 소설가 마리아 루이즈 드 라 라메(Marie Louise de la Ramee)가 1872년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 1975년 후지TV 애니메이션, 우리에게는 마지막 장면이 추억입니다.

『플란다스의 개』, © 1975 Nippon Animation, Co. Ltd.
크리스마스 날 아침 네로와 파트라슈가 성당에서 죽은 채 발견되자 아로아의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마을 사람들은 교회의 허가를 받아 네로와 파트라슈를 제단 아래에 장사지냅니다. 네로가 그렇게 보고 싶던 바로 루벤스의 그림이 있던 곳입니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보고 있는 그림은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노트르담 대성당 여행의 팁입니다. 네로와 파트라슈가 묻힌 곳을 찾으시면 안 됩니다. 소설의 설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 열왕기상 3장 9절
신을 향해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요청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지혜로운’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שָׁמַע 샤마’입니다. 본래의 뜻은 ‘듣다’입니다. 지혜는 곧 들음에서 온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시대는 그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왕권을 얻기 위해 배다른 형제 아도니야, 그리고 요압과 시므이 등 다윗 시대의 중요 인물들을 죽입니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이방과 결혼 정책을 폅니다. 성서는 그의 아내의 수를 후궁과 첩을 합쳐 1000명이라 기록합니다.(열왕기상 11장 3절) 또한 그는 대규모 건축 등을 위해 과도한 부역과 세금을 걷기도 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다른 측면입니다. 그의 지혜는 왕권 강화와 통치의 안정을 위해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 지혜에는 결정적인 것이 제외되었습니다. 그가 신께 구한 ‘들음’, 곧 신과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은 그를 버리고 솔로몬 이후 통일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됩니다.
민주주의의, 영어 ‘democracy’의 어원은 그리스어 ‘δημοκρατία 데모크라티아’입니다. 시민을 뜻하는 ‘δημος 데모스’와 권력을 뜻하는 ‘κρατία 크라티아’의 합성어입니다. 모든 권력이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모든 권력이 시민들로부터 나오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시민들의 이야기 듣기입니다. 그리고 듣기는 바로 집단 지혜의 시작입니다. 듣기가 없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국 지혜의 방향은 듣기와 시민이어야 합니다.
지혜의 방향이 권력을 위해 비민주를 향하던 시대, 지혜의 방향이 권력의 유지를 위해 권력을 지향하던 시대, 모두 이해하기 어려우며 우리가 다시 지혜와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제 잘못된, 강요된 지혜를 따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영국의 팝가수, ‘Sting 스팅’의 노래 ‘당신이 쉬는 모든 숨마다 Every Breath You Take’의 가사가 심상치 않습니다.
Every breath you take 당신이 쉬는 모든 숨마다
Every move you make 당신이 만드는 모든 움직임마다
Every bond you break 당신이 깨뜨리는 모든 약속마다
Every step you take 당신이 걷는 모든 걸음마다
I’ll be watching you 나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