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중 목사의 "그림으로 읽는 구약 이야기" 17

by 좋은만남 posted Sep 2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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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시간, 산헤립이 패배한 시간, 구약성서 그림으로 읽기
 
‘3분’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스마트폰의 시계 애플리케이션을 찾아 스톱워치 기능을 실행시킵니다. 시작을 누르는 동시에 눈을 감고, 하나 둘 셋 이렇게 3분을 세어봅니다. 그리고 3분을 모두 세었을 때 눈을 뜹니다. 스톱워치의 시간은 얼마를 가리키고 있나요? 
스스로 생각하고 세는 3분이라는 시간은 9-24세에는 3분 3초, 45-50세에는 3분 16초, 60-70세에는 3분 40초라고 합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의 길이가 실제의 시간보다 더 길어진다는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맹건(Peter Mangan)의 ‘생리 시계 효과’라는 연구 결과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으로 시간의 상대성을 말했다면 우리는 나이로 시간의 상대성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빨리 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셈입니다. 
 
성서 속에도 시간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의 긴 하루’(여호수아 10장 11-13절)이고 다른 하나는 ‘히스기야 왕의 물러선 그림자’(열왕기하 20장 1-11절)입니다. 그들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물러라! 달아, 아얄론 골짜기에 머물러라!” - 여호수아 10장 12절
 
여호수아의 기도입니다. 아모리 족 다섯 왕의 연합군과 이스라엘 군과의 전투에서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에게 명령했고 그대로 멈추었고 여호수아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시간 아니 우주의 시간이 하루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히스기야 왕은 병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죽음을 선고받습니다. 그는 삶을 구하는 슬픔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의 기도를 들은 야훼께서는 열다섯 해의 목숨과 앗시리아로부터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 믿을 수 있겠다고 합니다.
 
“해 그림자를 십 도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십 도 뒤로 물러나게 해주십시오.” - 열왕기하 20장 10절
 
시간이 뒤로 가는 것을 본다면 야훼의 말을 믿겠다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 여호수아가 만든 하루가 다시 아주 조금 그러나 보일 만큼 뒤로 갔습니다.
 
성서에서는 신에 의해 시간이 늘기도 줄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성서의 기록에 대해 어떤 이들은 객관적 사실로 또 다른 이들은 시적 사실로 이해합니다. 
 
히스기야는 솔로몬 이후 분열된 이스라엘 남유다의 13대 왕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당시의 예언자입니다. 히스기야는 전왕들과 달리 우상숭배를 금지하여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과 목상들을 부수는 등 왕국의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힘을 키운 앗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위협하자 침입에 대비해 국경 지방 성들의 방어에 힘썼습니다. 
마침내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남유다 왕국을 공격합니다. 앗시리아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성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철수를 부탁하며 금 삼십, 은 삼백 달란트를 제공하지만 예루살렘을 함락하고자 하는 그들의 생각을 바꾸진 못합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충고를 청하고, 이사야는 신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사건이 루벤스의 『산헤립의 패배』(“그 날 밤에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서, 앗시리아 군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죽였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에 그들은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열왕기하 19장 35절)입니다.
한 밤이 구름처럼 열리고 하늘로부터 앞장선 빛을 따라 천사가 내립니다. 다부진 손은 창과 같이 길고 구불구불한 날카로운 빛 덩어리를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갯짓은 땅을 향해 맹렬합니다. 성서 밖의 이야기는 가브리엘을 포함한 천사라 합니다.
두려움 앞의 군상입니다. 얼마 전까지 남유다에게 이천의 군마를 줄 테니 탈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조롱하던 그 기병들입니다. 어둠을 가른 빛과 천사들의 돌진, 인간들 사이 높이 들렸던 앗시리아의 깃발들은 이미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미 죽은 병사가 나뒹굴고, 살아있는 자들의 걸음과 부축은 불가능한 지도 모르는 도주를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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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산헤립의 패배』, 17세기 전반, 알테 피나코텍 독일 뮌헨.
 
그림의 가운데, 오른손으로 머리를 쥐고 뻗은 왼손, 어떤 무기도 들지 못하는 손으로 빛을 바라보지만 두 눈은 검은 동자를 상실했습니다. 터번을 쓴 눈은 하늘을 향하지도 못한 채,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고삐 잃은 손아귀는 갈퀴를 감아쥐고 있습니다. 그림 가운데, 등자를 놓친 발, 말에서 떨어질까 엎드려 힘겹게 끌어안고 빛을 피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시간’. 죽음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전제된 시간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또 멈추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남유다의 시간과 앗시리아의 시간은 같게 그러나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같고 다른 시간으로…….
 
 
‘시간’은 무엇일까? 확실히 시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경험할 수 없기에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과 같이, 어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단어 없이도 사건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시간이 반드시 있는 것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일어나 샤워하고 출근하고 글을 쓰는’ 계속되는 사건들은 시간이란 개념이 없이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의 시간은 해와 달이, 시계가 주기적으로 돌아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닙니다. 지나간 과거와 기대하는 미래가 오늘에 섞여 있는 시간입니다. 웃고 울고 먹고 마시며 사랑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경험적 시간입니다. 시간이란 열차는 승차하는 것이 아니라 운행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지나갔거나 다가오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쌓고 엮어내는 시간입니다.
 
“인간은 시적으로 거주한다.”(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 휠더린(Hölderlin)
 
우리는 시간의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