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중 목사의 "그림으로 읽는 구약 이야기" 18

by 좋은만남 posted Oct 1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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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야훼의 정의, 이사야

2011년 「노숙인 등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노숙인복지법」)이 제정, 2012년 6월부터 시행되고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 부랑인 복지서비스와 노숙인 지원 대책이 있었지만, 홈리스를 위한 독자적인 법률이 없어 홈리스 복지와 인권 지원에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노숙인복지법」은 다음과 같의 의의가 있습니다. 먼저,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복지권이 ‘노숙인 등’으로 불리던 이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하위법에서 구체화하였습니다. 둘째, 노숙인 등에 대해 ‘상당한 기간 동안 주거로서의 적절성이 현저하게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자’로 이해를 넓혀 잠재적인 홈리스들까지 포함하였습니다. 셋째, 주거를 포함, 제공되어야 할 복지서비스와 시설을 체계화하였습니다.
「노숙인복지법」은 의의와 함께 또한 여러 가지 보완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홈리스에 대한 차별 금지와 인권보장을 보다 구체화하여 실질적으로 시설을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정책 대상에서 여전히 소홀한 여성과, 18세 이하의 홈리스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지자체로 이원화되어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지원을 중앙정부차원에서 통합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홈리스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홈리스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문제입니다. 홈리스에 대한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보다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정의 צְדָקָה(쩨다카)’는 예언자 이사야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사야는 기원전 740/739년과 701년 사이의 국제적 위기 상황에 활동한 유다 출신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북)과 유다(남) 두 왕국의 완전한 멸망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두 왕국의 위기는 주변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나의 포도원을 망쳐 놓은 자들이 바로 너희다.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너희 집을 가득 채웠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의 백성을 짓밟으며, 어찌하여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갰느냐?” - 이사야서 3:14-15

야훼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선언하는 두 왕국이 멸망하게 되는 근본 이유입니다. 통치자들에 의해 사람들의 권리가 방해받고 훼손되는 것이 널리 퍼져 있으며, 그들은 부와 권력을 짧은 시간에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훼께서는 스스로 알려준 정의를 포기하고 무시하는 지도자들,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의미 있는 개혁을 단행하지도 않는 그들, 따라서 정의에 대한 전망을 거의 또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왕국이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1564년)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가 익숙합니다. 그리고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 선거회의(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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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이사야」, 1510년 경,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이탈리아.

미켈란젤로는 1508-15012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일곱 명의 예언자를 그렸습니다. 오늘 그림은 그 중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낯선 것은 오백여 년의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림은 회칠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회화 기법인 프레스코로 그려졌는데, 시간으로 인한 훼손을 피할 수 없어 1980년부터 무려 십여 년 동안 복원한 결과입니다. 


야훼의 정의를 거부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이로 인해 몰려올 멸망을 이사야는 예견합니다. 어떤 부름에 돌린 고개 그리고 그 턱을 괴었을 듯한 왼 손은 그의 고뇌를 여전히 검지와 엄지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책의 한 부분에 갈피로 남긴 오른 손의 새끼손가락은 어디쯤을 가리키고 있을까? 그렇게도 찾고 싶은 희망이었다면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시편 23편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눈썹과 눈썹 사이, 잔뜩 일그러진 미간은 어떤 부름이 달가워 보이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발이 가장 인상적입니다. 잔뜩 긴장한 채 구부러져 있는 발가락들, 오른발과 왼발의 꼬임은 그가 멸망에의 부르심 앞에 내딛지 못하는 그의 갈등과 긴장은 아닐까?
이 부름 곧 야훼의 부름은 천사로 표현됩니다. 어린 아이의 순결함 거짓 없음으로... 그러나 부릅뜬 천사의 눈빛은 평범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사야에게 강렬한 임무가 주어질 것입니다. 굳게 다문 입은 다급하고 신중하고 결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 같지 않은 근육질의 팔을 따라가면 야훼의 의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선언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훼께서 선언하시는 멸망입니다.
 
야훼께서 선언하시고자 하는 근원적인 뜻은 무엇일까? 멸망일까? 아닙니다. 야훼의 뜻은 정의의 회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사야 יְשַׁעְיָה’이름의 뜻은 ‘야훼께서는 구원’입니다. 이사야의 이름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그를 부른 야훼의 뜻입니다.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NISI20170214_0012687937_web.jpg

별 차돌맹이는 부서지면서
산산이 깨져 나가면서 저렇게 눈부신데
행여 손끝 하나 바그라질까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는
이 한심한 영혼아
네가 자랑하는 순결은 이제는 너무도 낡았구나
(중략)
산산이 부서져라 
그렇게 깨끗이 부서지고 씻겨 나가서 
진실의 알통이 
그 알통의 허연 뱃살이 찰지고 맑고 흐벅지고 
그래서 그 결결이 은은하게 눈부시건 말건
부서지는 그것 그대로
켜켜 샅샅이 아름다운 먼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
산산이 부서져라

- 조영관, 『먼지가 부르는 차돌멩이의 노래 조영관 유고시집』(서울: 실천문학사, 2008), 39-41. 

조영관(1957년-2007년, 건설 일용 노동자와 용접공 등 노동운동 현장에서 글을 씀)의 시가 이사야의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야훼의 정의와 그 뜻 앞에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오늘이 가져올 결과를 이사야도 조영관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