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안未安 그리고 안녕安寧의 선언, 예레미야, 구약성서 그림으로 읽기
노동자들이 매일같이 일하는 공장촌 위로, 연기와 기름 냄새 메케한 대기 속으로 사이렌이 전율하며 울려 퍼지면, 이 경적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흡사 놀란 바퀴벌레마냥 기계적으로, 숙면을 취하지 못해 미처 근육이 풀리지 않은 몸을 이끌고 자그마한 회색 집들로부터 음울한 표정을 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차갑고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이들은 공장을 에워싼 높다란 돌담벽락 옆으로 난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었고, 공장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냉랭하게,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수십 개의 정사각형 눈으로 진창길을 비추며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막심 고리키, 김현택 역, 『어머니』(범우사, 2004), 13쪽.
러시아 소설가 고리키(1868~1936)가 그린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 자본주의의 암울한 모습입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 공황, 실업자의 증가, 임금 저하, 지가 폭등 등으로 민중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집니다. 그러나 시대의 개선을 위한 합법적인 방법은 불가능해 보이고 결국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머니』는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이자 어머니 펠라게야 닐로브나 블라소비가 노동운동가 아들 빠벨의 삶을 보며 그에 대한 사랑으로 평범한 어머니에서 혁명가로 변화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그녀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견디어 내며 절규합니다. “피바다를 이루어도 진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489쪽)
러시아 제국 민중의 안녕安寧하지 않은 삶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고리키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혁명의 본질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어머니』는 김지하의 『오적』이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처럼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였습니다. 진정한 안녕을 세우려 했던 혁명적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안녕을 향한 바램은 잠시 막을 수는 있어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펠라게야 닐로브나 블라소비의 마지막 절규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 13년(기원전 627년)에 시작된 그의 예언 활동은 대략 기원전 58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바빌로니아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한(기원전 587년) 후 몇 해를 더 예언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왕국은 주변의 강대국인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내부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설교입니다.
“힘 있는 자든 힘 없는 자든, 모두가 자기 잇속만을 채우며, 사기를 쳐서 재산을 모았다. 예언자와 제사장까지도 모두 한결같이 백성을 속였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 예레미야 6:13-14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 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내가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 하도록 준 이 땅, 바로 이 곳에서 너희가 머물러 살도록 하겠다.”
- 예레미야 7:4-7
예레미야는 모두가 썩어버린 나라를 향해 성전 지도자들이 말하는 ‘괜찮다’(히브리어 שָׁלוֹם 샬롬)는 안녕의 선언을 거짓 안녕이라고 말합니다.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마르지 않는 눈물 앞에 안녕의 선언은 거짓을 넘어 폭력입니다. 그리고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지 않고 야훼 외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안녕이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림] 지거 쾨더, 「예루살렘의 패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 『Kinder Bible』(Katholisches Bibelwerk, 2015).
지거 쾨더(Sieger Köder, 1925-2015)는 독일의 사제 화가입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한 후에 사제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많은 성서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 하느님의 말씀을 친숙하게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예루살렘의 패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야」은 예레미야 38장이 배경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도성(예루살렘)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넘어간다.”(예레미야 38:3)고 예언합니다. 바빌로니아의 공격 앞에 유다 왕국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한 정치지도자들은 그를 죽이고자 물웅덩이(히브리어 ‘בּ֣וֹר 보르’는 감옥이란 뜻이기도 합니다)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의 잘못을 알고 있는 에티오피아 출신 환관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근위대의 뜰 안에 머물게 됩니다.
물웅덩이에 앉은 예레미야. 바빌로니아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한 그는 두려움에 더 이상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생명까지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색 천으로 두텁게 둘려진, 그도 모자라 얼굴을 격하게 움키고 있는 오른손입니다. 그는 암흑의 물웅덩이 안에 갇혔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위. 붉고 거친 불꽃이 일어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한 숲을 태우고 있습니다. 이미 타버린 나무들은 날카롭게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숲으로부터 오르는 짙은 연기는 온 하늘을 향해 자라나 짙은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심판처럼 마른번개가 하늘을 갈라 땅을 내리칩니다.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떨어지는 잎사귀는 웅덩이를 향합니다. 애처롭게 불길을 피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왼손 위로 오른 것들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것일까요?
야훼의 정의와 뜻을 저버린, 야훼의 참된 안녕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들이 맞이하는 패망입니다.
‘안녕’. 편안할 안安, 편안할 녕寧입니다. 일상적으로는 “안녕하세요.” 형태의 인사말인데, 안녕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의 가벼운 인사말 보다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의 정치적 혼란기인 전국시대 철학자 장자(壯者, 기원전 369 ~ 기원전 289?)가 꿈꾸는 ‘안녕’입니다.
不苛於人불구어인, 不忮於衆불기어중, 願天下之安寧원천하지안녕, 以活民命이활민명, 人我之養畢足而止인아지양필족이지. 남에게 가혹하지 않게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거스르지 않는다. 천하가 안락*하여 백성들이 잘 생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풍족해야만 만족한다.
*역자는 안녕을 안락이라 번역하였습니다.
– 장자, 김학주 역, 『장자』(연암서가, 2010), 787쪽.
안녕과 관련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다른 한자 단어도 있습니다. ‘미안未安하다’ 곧 아닐 미未, 편안할 안安입니다. 일반적으로 미안은 자신의 잘못으로 편안하지 않음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본래 미안은 미안을 만드는 어떤 것들로 인해 자신의 상태가 편안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미안’의 예언자입니다. 사람들이 ‘안녕’을 말할 때 미안함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와 막심 고리키, 장자의 시대, 어쩌면 오늘 역시도 미안한 시대입니다. 미안한 시대는 불편하기는 하지만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때 안녕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을 보지 않는 안녕은 거짓 안녕입니다.
예레미야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יִרְמְיָ֖הוּ 이르메야후’, ‘야훼께서 일어나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야훼께서는 미안을 깨닫고 안녕을 꿈꿀 때, 일어나실 것이며 미안을 안녕, 샬롬으로 바꾸어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