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경 독일
1500년에 막시밀리안Maximilian1세(1493-1519)가 권력을 잡았다. 카를 5세의 할아버지인 그는 무엇보다 교묘한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가가 세계 패권을 잡을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았다. 훗날 황제가 된 그의 손자이자 후계자 카를 5세는 정확히 세기가 바뀌는 때에 태어나, 할아버지가 행한 정치적 성과를 거둬들었다. 그는 유럽,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지배영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와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국뿐 아니라 북이탈리아의 도시들, 더 나아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부르군트 왕국, 그 다음에는 네덜란드, 이에 더해 스페인과 끝으로 남아메리카에 새로 정복한 영역, 멕시코의 아스텍 왕국, 페루의 잉카 왕국까지였다. 하지만 그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서쪽의 적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였다. 남쪽에서는 마찬가지로 교황들이 황제의 지배에 에워싸여 있다고 느꼈다. 끝으로 남동쪽에는 술탄 술래이만suleiman 2세(오스만제국)가 있었다.
제국 내에서 황제는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다. 제국의 기관들은 황제를 보필했지만, 황제와 대립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세기가 바뀌기 5년 전인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제국의회는 제국의 광범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제국의회 외 기관으로서, 최고 항소법원인 제국 최고법원이 설비되었고, 제국통치평의회가 조직되었다. 집행, 판결(입법, 행정, 사법)에
서 현대적 의미의 삼권분립이 되어 있지 않은 시기에,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제국기관들과 황제 사이에 권력이 정확하게 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1495년의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는 영구 국가 평화령이 선포되었다. 이는 오랜 파벌싸움을 끝내고 국가가 권력을 독점할 수 있는 기틀을 세우려는 의도였다. 이 국가 평화령은 루터의 종교개력을 통해 처음 대대적인 시험대에 올랐고, 기사전쟁과 농민전쟁으로 인한 희생은 있었지만 거의 훌륭하게 시험을 통과했다.

루터의 군주인 작센 선제후는 이들 중 하나로, 이러한 고상한 무리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1519년 황제선출을 앞두고 그는 잠시 동안 제국 최고의 자리를 넘볼 희망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황제 대항 세력의 중심 역할로 만족해야 했고, 이 역할을 탁월하게 해냈다. 제국의회는 당시 계급 사회를 반영했다. 성직자 계급이 첫 번째, 상위 귀족이 두 번째, 도시의 시민이 세 번째였다. 하위 귀족이나 지방 기사계층과 때로 ‘제 4층’이라 불리는 농민, ‘생산 계급’, 다시 말해 여전히 독일 영토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모든 시골 지역은 정치적 책임을 맡지 못했다.
1500년경의 독일은 300여 개의 통치 지역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민족국가의 시초가 보였던 프랑스나 영국과 달리 독일은 민족국가가 없는 민족공동체로서, 군주가 선거로 선출되는 왕국과 지방 세습왕조로 구성된 민족공동체였다. 독일은 제후국과 도시로 이뤄진 나라였다. 이 나라에서 황제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구조 덕분에 루터의 종교개혁은 확장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될 무렵의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탁월한 외교가이자 예리한 사상가로, 예술에 능통한 세련된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예술애호가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베드로 성당을 개축함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남겼다. 그러나 이를 통해 수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취미를 위해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을 조달해야 했다. 바로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었다. 교황들은 민중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라틴어로 거행되는 미사에서 민중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은 ‘호쿠스포쿠스Hokuspokus' 즉 마술사의 주문 같았다. 이 개념이 원래는 성찬식에서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살과 피로 사용하던 말 “Hoc est enim corpus meum(이는 곧 나의 육신이니라)”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일종의 종교적 공체 발행 사업인 면죄부 사업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지옥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죄악에 대해서는 연옥과 최후의 심판이 위협을 가했다. 반대로 교회는 경건함에서 나온 선행을 통해, 특히 수도사나 성자와 죽은 자들의 선행을 통해 보물을 쌓아 올렸다. 고해와 회개를 통한 성사에서 영원한 죗값을 면할 수 있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현세와 내세의 일시적인 형벌, 특히 영혼이 연옥에서 지내야 하는 기간은 교회의 보물인 면죄부를 구입하면 짧아졌다. 하지만 면죄부 제도의 확대와 심화는 확실히 사람들을 질리게 했다. 면죄부가 판매되기는 했지만 항상 잘 팔린 것은 아니었다. 이 시스템은 과도한 욕심을 부렸다.

1470년대 이후의 엄청난 경제적 발전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동반했다. 광산업과 해외 무역, 그리고 식료품 생산 분야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갑부라고 불린 야코프 푸거로부터 시작된 푸거 가문이 이들의 맨 꼭대기에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고위 정치가들이 경제에 종속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부 야코프 푸거를 왕관을 쓰지 않은 유럽의 지배자라고 불렀고, 이 시대 전체를 ‘푸거 가문의 시대’라고 불렀다. 경제 성장에서 손해를 본 쪽은 시골 지역이다. 주민의 90%가 여기 살고 있었다. 기사들은 토지는 있었지만 돈은 없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부담과 조세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루터의 탄생
1483년 11월 10일, 백작령 만스펠트의 아이스레벤 시에 거주하는 한스 루터와 결혼 전 성이 린데만인 아내 마르가레테 사이에, 칠 남매 혹은 구 남매 중 첫째(혹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다음날 아기는 성자 마르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를 서둘렀다. 신생아 가운데 둘 중 하나만이 성년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이 사망률이 높아 전체 평균 수명은 약 35세에서 38세에 불과했다.
가족은 루터가 태어난 다음 해에 만스펠트 시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농부 집안 출신인 루터의 아버지는 당시 한창 호황이던 광산에서 일감을 찾았다. 열심히 일하여 단순 노동자에서 제련소 현장감독이자 여러 소규모 광산조합의 공동출자자가 되었다. 은을 함유한 구리가 체굴되던 만스펠트의 광산은 중부 독일 경제의 핵심이었다. 광산업은 지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1490년 이후 루터는 만스펠트 시립학교에 다녔다. 7년 뒤에는 막데부르크에 있는 돔슐레로 학교를 옮겼다. 이곳에서 일종의 기숙사에서 지냈고 1년 뒤에는 아이제나흐의 신부학교에 입했다. 아이제나흐는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여기서 3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루터나 다른 종교개혁자들은 전형적인 소도시 출신이었다. 아이스레벤은 거주자가 약 4,000명이었고, 만스펠트에는 성이 3개나 있지만 비텐베르크와 마찬가지로 주민은 고작 2,000명이었으며, 아이제나흐는 2배 가량 더 많았다. 이에 비해 에어푸르트는 약 2만 명의 주민과 36개의 성당이 있는 대도시로서, 루터는 대학 시절과 수도원 시절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대도시를 이곳에서 경험했다.
1500년에 마르틴 루터는 17살이었고, 이제 성년의 문턱에 있는 청년 루터가 기대할 수 있는 평균 수명은 이미 57세로 늘어났다. 시골의 평균 수명은 60세를 넘기도 했다. 반대로 도시 주민의 평균 수명은 그저 48세였다. 도시의 보건위생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나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