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떻게 될지 몰라...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정도(?)의 길을 걷다가, 갑자기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중세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루터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수도사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바로, 부모님을 설득시켜야 했었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는 루터의 제안을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몰차게 박살낸다. 그런데 우리의 레전드는 굴하지 않는다. 에어푸르트에 있는 엄격한 규율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간다. 우리의 레전드는 아버지를 넘어선다. 세습으로 점철된 한국교회는 루터를 많이 폄하한다. 뭐 그럴 수 있다. 이렇게 살아본 적 없는 이들이 그럴 것이다. 200개 넘는 파가 존재하는 장로교가 주류니, 그런데 이들은 루터를 넘어설 수 없다. 세습과 변칙 세습을 하는 한 마이다. 루터가 수도사로 돌아선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슈토튼테른하임의 번개라고 말하지만 최주훈 목사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루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칼에 찔렸을 때, 마음속에 있던 죽음의 공포가 더욱 강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1505년에는 죽음의 공포를 더욱 가까이 체험하게 된다. 흑사병으로 두 명의 동생을 잃고, 게다가 다니던 대학에서 세 명의 교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대학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가 일어난다. 특히 세 교수의 장례식 때 두 명의 교수가 임종의 순간 남긴 말을 듣고 더욱 충격에 빠지게 된다. 두 교수의 말은 이렇다고 한다. “아, 내가 수도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법률학자나 법관으로 살다 죽는 것이 덧없음을 루터는 이때 심각하게 깨달았다. | 『루터의 재발견』, 복있는사람, 최주훈, 77쪽
1505년 7월 2일, 에어푸르트 대학교 법학과를 등록하고, 부모님을 뵙고 다시 돌아오던 길에 폭풍우를 만난다. 영화소재의 효과처럼 무시무시한 번개가 내려치는데, 그것에 놀란 루터는 자기도 모르게 서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서원 바로 실행에 옮긴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루터는 성서를 그것도 66권이 묶여져 있는 성서를 처음 보게 된다. 아직은 쪼랩인 Lv1밖에는 안되지만 레전드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다. 아버지의 성은 원래 루더Luder이다. 아들의 성을 아버지가 따른다. 분명히 아들이 아버지를 이겼다. 반성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한 번 살펴보자.
성이 바뀌었다. 무슨 일일까? 우선 뜻부터 풀이해 보자. 루터나 루더가 비스무리하게 들리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루더는 동물을 유인해서 죽이는 ‘사냥꾼’의 뜻을 가진 고대 독일어이지만 후에 루터는 자신의 성을 루터Luther로 바꾼다. ‘자유인’이라는 뜻의 헬라어 ‘엘류테로스’에서 앞뒤 철자를 빼고 가운데 것 ‘류터’만 취한 것이다. | 위의 책, 66-67쪽
그렇게 시작한 수도사

MMORPG를 플레이 하다보면, Lv 1에서 Lv 2,3-15까지 올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금방 게임의 분위기와 자신만의 기술을 습득하면서, 당장이라도 게임을 씹어 먹어버릴 듯한 성장과 열심을 보인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이다. 지지부진한 레벨 업과 혼자서는 절대로 미션과 퀘스트를 달성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특별히 MMORPG는 파티, 즉 팀플레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단, 전제가 있다. 당신이 플레이를 계속하고 싶다. 상생과 공존은 필수불가결이다. 벼락사건을 겪은 후, 루터는 에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간다. 언뜻 생각해보면, ‘수도원’생활이라고 해서, ‘도’를 닦는 느낌으로다가 귀의(歸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16세기 독일 혹은 유럽사회는 수도원이 대학교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존의 인문대학교와 교류도 가능했을 뿐더러, 학위 인정은 물론이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 수도원은 청빈하기로 소문이 자자했고, 엄격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한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루터가 땅에 납작 엎드려 평생 수도자로 살기로 서약했던 제단 바로 밑에는 루터와 전혀 반대 방향의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의 무덤이 있었다. 루터보다 백 년 전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던 요하네스 자카리아Johannes Zachariae, 1362/64-1428라는 인물이다. 도미니크파 수도회의 신학자였던 그는 콘스탄츠 공의회1415에서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할 때 현장에 있었던 종교재판관 중 한 명이었다.
(중략) 호사가들은 루터가 자카리아의 묘 위에서 백조의 날갯짓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 『루터의 재발견』, 최주훈, 82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자를 처형한 종교재판관이 시무했던 곳에서, 더 굵직한 종교개혁자가 탄생할 줄을… 루터는 열심히 규율을 따르고, 레벨 업을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지난한 과정이 찾아온다. 규율을 통해서, 여러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고, 기도생활과 회개 등 자신의 죄에서 ‘자유로움’ 혹은 ‘해방감’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점점 더 죄책에 대한 잔여감이 떠나지 않았다. 필립샤프는 그의 교회사 전집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경건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외적으로는 더욱 더 진보하고 거룩하게 보일수록 내적으로는 더 큰 죄의 무게를 느껴야만 했다. 분노, 시기, 미움, 자만심의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중략) 구체적으로 지적받을 만한 잘못을 범한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영역에 스며든 힘이자 오염시키는 성질로서의 죄, 본성의 타락에서 오는 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께 대적하는 죄가 루터의 마음을 악몽처럼 무겁게 하고 때로는 절망의 나락으로 몰고 가곤 했다. | 『교회사전집 7』, 필립샤프,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