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Ephebus (솔라 에페부스) "오직 청년으로만" (2) - 남기평 목사

by 좋은만남 posted Apr 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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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헬조선의 청년과 암흑시대의 기독청년

21세기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단어는, 바로 ‘헬조선’이다. 이 단어는 한국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지옥이라는 말이다. 중세시대도 몇 차례의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고 간 후, 이들에게 죽음이후의 문제가 민중들에게는 화두였다. 너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곧 구원을 받아 사후에는 천국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세에 집중하기보다는 내세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민중들은 그 당시 성경의 진리나 설교의 말씀을 이해하기 만무했고, 천국의 가는 길마저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미신과 성유물 장사가 팽배했고, 다양한 신앙상품들이 발명되고, 개발되었다. 그 중 하나가 천국과 지옥에 중간 지대인 연옥이라는 기가 막히는 개념의 발명과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벌부였다. 이 상품은 민중들에게 쉽고 간단하게 설득되었으며, 이것이 교회와 성유물을 가지고 있던 교회와 제후들의 부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상품들이 중세시대에는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일종의 보험으로 여겨졌다. 다시 암흑시대를 지나 헬조선으로 넘어와 보자. 이번 NCCK 청년위원화 EYCK에서 설문조사한 문답 결과를 살펴보면, 문답결과 중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내재적 평안(44.7%)’으로 나왔다. 두 번째로 높게 나온 대답이 ‘예배나 의례(24.3%)’이니, 이는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한 대답이 69%가 되는 셈이다. 개인에게 집중된 생활은 중세시대의 신앙행태와 흡사하다. 현실사회는 청년들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정해진 궤도가 있고, 그 궤도와 더불어 누구나 예외 없는 성장패키지가 청년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별반 하자가 아니다. 여기에서 양념이 치고 장식을 하는 순간, 개인의 안녕 곧 웰빙(well-being)은 자랑거리가 된다. 극심한 경쟁 일변도의 사회에서 개인의 안녕은 바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고, 끝까지 일등으로 살아남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종교 특히 개신교는 이 조류를 타는 것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선도해 나가는 것이 문제이다. 문답 중 ‘종교의 영향이 있는 사회의 부분’에서 ‘문화(24.3%), 봉사(18.2%), 정치(15.3%), 그리고 여론(12%)’ 순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예배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목회자의 설교나 특별히 담임목사의 설교를 지침으로 삼고 있는 개신교의 분위기가 기독청년 개개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한국 땅에 100년 이상 자리 잡으며 개신교문화를 형성했다. 딱 집어서 개신교문화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문화는 말 그대로 사고체계와 행동양식을 담고 있다. 특별하게 금주-금연을 필두로 한 세속의 것을 정죄하면서 형성되는 구별짓기문화로 들어나며, 사회-문화 전반을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이 문화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 기준은 성서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닌, 개교회 담임목회자들의 해석이나 신앙선배의 해석이 주를 이룬다. 이는 정치나 여론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사건과 쟁점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선/악이 나눠줘야 하며, 질문보다는 정해진 답에 모든 사건과 현상들을 끼어 맞춰야 하는 경우가 매번 발생한다. 또한 아직도 서열문화가 남아있는 대학 내에서나, 직장 내에서 이러한 모습은 유연성 없는 불통으로 비춰진다. 집단-서열문화가 개인에게 주는 폭력에는 적절한 문제제기가 필요하지만, 구별짓기문화는 첫 사회생활을 하는 기독청년들에게 큰 시련을 준다. 집단이 준 시련은 이들에게 부적응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만든다. 

한국교회 신앙생활은 선택을 강요한다. 이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치환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개인의 선택으로만 강요된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교회 목회자의 설교 시 강조점’에서도 ‘개인구원강조(51.3%)’로 나타난 것만 봐도, 개인구원의 강조는 선택을 강요하고, 그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공산이 크다. 중세시대로 돌아가 보자, 베드로의 수위권을 받은 교황이 있었지만, 결국의 내세의 갈림길은 오로지 개인의 역량에 따라 달려있었다. 바로 면벌부를 사고, 그에 맡는 고행을 실시하거나, 성축일 때마다 성물을 만진다든지, 그리고 교회의 많은 헌금을 해서 연옥의 기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성직자들의 목회적 돌봄이나 노력 따위는 없다. 돈의 액수에 따라, 연옥에 있을지 천국으로 올라갈지가 정해지는 것이다. 연옥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일반 민중들에게 돈은 희소한 가치이지 자기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중세의 작동방식과 흡사한 헬조선이 있다. 사회의 불평등구조나 경쟁의 불리함은 차치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가볍게 돌리는 나라가 헬조선이다.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것은 지역에 따른 상위권 대학 진학률과 학자금대출에 따른 부채 경향을 보면 뚜렷하게 지역차가 나타난다. 심지어 수저계급론을 통해서, 아무리 노오력 한들, 두꺼운 유리천장에 갇혀서, 일정 부분 그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청년들은 뼈저리게 몸소 체험하고 있다. 『노오력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이충한은 이렇게 말한다. 

청년들의 입장에서 이 사회는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모세대까지는 모두가 위를 향해 열심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청년들에게는 이 계단이 거꾸로 흐르고 있다. 마치 역방향 에스컬레이터를 탄 것처럼 말이다. 이 역방향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날마다 숨 막히게 뛰어보아도, 이들에게는 ‘잘해야 제자리’인 현실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 묵묵히 계단을 오르다 옆을 돌아보면 부모의 경제 자본을 통해 학력 자본과 문화자본을 취득한 이들만이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편하게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노오력의 배신』,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청년들>, 이충한

중세교회와 닮아 있는 한국교회에도, 교회청년들에게 헬조선과 같은 잣대로 이들을 평가한다. 지금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태와 게으름에서 대부분 찾는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청년들은 많은 경우, ‘내재적 평안’ 즉, 개인의 평안과 위로를 찾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다. 그런데 헬조선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의 눈과 관점으로, 70-80년대에 고속성장의 개인적 영광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기존의 교회 어른들이 교회청년들을 재단한다면, 이들은 더 이상 위로받지 못하는 세대가 될 것이고, 속속들이 교회에서 이탈해 가나안교인의 모습이나 무교로 변모하고 있으며,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 문답에서도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는 기독교인 중 전체 72.8%가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다라고 답했다. 개인의 신상문제로 옮긴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중 기타까지 포함하면, 35.1%가 갈등으로 인해서 교회를 옮긴 경우다. 

교회청년들은 위로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교회 내에 갈등에 의해서 튕겨져 나온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교회를 찾고 옮기게 된다. 새로운 교회를 찾는 것에 지쳐서 가나안교인 될 가능성이 크다. 교회에 남는다고 한들, 청년들이 교회 내 결정구조나 중앙회의구조가 참석할 수 없다. 소위 교회의 잡꾼일 뿐이다. ‘현재 교회에서 하고 있는 활동’을 볼 때, ‘교회학교 교사, 청년회 활동, 찬양팀, 청년임원, 성가대’ 순이다. 청년임원(제약이 따르지만, 청년회 안이지만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구성원의 일원으로 참석하고, 수동적인 입장에서 교회의 행사를 참석할 뿐이다.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에 깊숙이 참여할 통로도 없으며 그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못한다. 각 교단 총회나 연회 그리고 노회의 청년총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감히 말하건대, 1명 내지 없거나 있어서도 언권위원(투표권 없는)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미래의 전망은 자연히 어두컴컴하다. 그리고 청년들의 자질과 지도력을 운운할 따름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을 보시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