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종교개혁주일, 왕국절 제10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1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적폐를 해소하고 변화와 갱신의 길을 모색한 개혁 전통이 오늘날에도 절실합니다. 기독교, 개신교의 참된 개혁을 위해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2. 오늘 공동식사 후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가서 농촌생태활동을 합니다. 오후에 농사일을 하고 이 목사님 댁에서 준비해주신 저녁을 먹고 돌아오겠습니다. 자연과 함께 하고 농촌의 생명운동을 경험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세요.
3.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 해 동안 삶을 통해 수확한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절 강단을 장식할 곡식과 과일을 조금씩 가져오시고 감사절 헌금도 정성껏 준비해 주십시오. 또 오후에는 겨울맞이 준비로 김장을 하겠습니다.
4. 수요성서대학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수요일(11월 1일)은 제6강을 이어갑니다.
5. 2018년 교회 달력이 나왔습니다. 넉넉히 가져가셔서 가까운 이웃과 지인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촛불교회 안내] 'NO TRUMP 전쟁 반대를 위한 기도회' | 11월 2일(목) 오후 7:30 / 미 대사관 앞 광화문 광장
■ 목회서신
이번 주일에는 농촌생태활동을 갑니다. 올 여름에도 봉사활동(솔직히 봉사를 하러 간 건지 봉사를 받고 온 건지는 헷갈립니다)이라는 명목으로 갔었던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갑니다. 우리 교회에도 몇 번 오셨기에 다들 아시겠지만 이필완 목사님은 전남 여수, 벌교, 강화도 교동섬 등에서 목회를 하셨고 감리교회 목회자의 부정과 부패 문제를 지적하시면서 오랫동안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시다가 당당뉴스라는 기독교 인터넷 언론을 만드시고 언론을 통해 운동을 해오셨습니다. 지병으로 인해 이른 은퇴를 하시고 지금은 강화도에 머물면서 넓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농지에 다양한 농작물을 키우고 계십니다.
이 목사님 부부는 온갖 작물을 키우시는데 지금까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키우시거나 그걸 내다 파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집에 찾아오는 지인과 이웃들이 돌아갈 때면 어김없이 상추라도 한 봉지 꼭 싸주시고는 합니다. 작년에 고구마 농사를 지은 것도 택배로 지인들에게 한 상자씩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가서 추수하는 것도 아마 여지저기 흩어져 사는 지인들, 목회자들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전문 농사꾼은 아닙니다만 농부의 마음을 이 목사님과 사모님에게서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충남에서 발생한, 장례차 출입을 막고 500만원을 요구한 사건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됩니다. 농촌 인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장례차 사건은 과연 농촌인심이라는 것이 남아있는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농촌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농촌, 농부는 전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귀한 일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생산한 농작물은 나라 곳곳으로 실려가 국민들의 살아갈 힘을 제공합니다. 재배되는 농작물도 농부의 마음을 알고 교감하기 때문에 농부는 악한 마음을 품고 계산속으로만 농사일을 하지 않습니다. 순한 마음은 순한 생명으로 키우지만 악한 마음은 악한 생명으로 키우고 다른 생명에게도 악한 마음을 감염시키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농촌이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도시를 먹여 살리기 위한 식량 생산기지 정도로만 여기는 도시와 도시인들의 오만과 독선 때문일 것입니다. 생산성, 효율성만 따지는 풍조가 결국 농촌의 인심은 물론 농작물의 생명성까지 황폐화시키는 것이 아쉽습니다. 농촌이 생명력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오래전부터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축제가 있었습니다만 한국의 추수감사절은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620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원주민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1621년에는 많은 수확을 하게 되어 도움을 주었던 인디언족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은 것이 유래가 되었고 교회에서는 1623년부터 예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지만 우리교회는 우리 환경에 맞춰 11월 첫째 주일에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미국은 왜 정착 시에 도움을 받았던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탄압했는지, 그리고 우리민족은 추석이라는 좋은 명절이 있는데 왜 추수감사주일을 따로 지키는지 좀 의아하긴 합니다만… 아무튼 한 해 동안 지켜주시고 수확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겠습니다. 한 해 동안의 결실에 합당한 감사의 마음을 듬뿍 담아 여러분의 정성을 하나님과 세우신 교회에 올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 매년 해 온대로 오후에는 김장을 담그겠습니다. 물론 맛난 수육으로 점심을 푸짐하게 먹고요. 이번에도 배추와 무 등 농산물은 방인웅 장로님 부부가 준비해주고 저희 부부가 이번 토요일에 강원도 인제로 가서 배추를 절여오겠습니다. 필요한 분, 주위에 나눠드릴 분이 있으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넉넉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모두의 마음을 합하여 감사와 기쁨이 철철 넘치는 감사절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2016년 10월 29일 "박근혜 하야 촉구! 첫 촛불집회가 열리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2013년부터 시민사회는 국가정보원의 여론조작 사건, 세월호 침몰사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노동문제,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등으로 박근혜의 퇴진 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6년 9월, 한겨레신문은 재벌들이 출연해 만든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최순실이 관여했다고 보도하였고 10월에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터졌고 이화여대 학생과 동문이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특혜입학 이혹을 제기하며 총장을 몰아냈습니다. 10월 24일, 그동안의 입장을 바꿔 박근혜는 임기 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국회에서 연설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JTBC가 최순실이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에 국가의 중요 기밀정보와 대통령의 연설문이 담겨있다고 폭로하였습니다.
2016년 10월 29일 전국 각지에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엄정한 수사와 박근혜 하야를 촉구하는 촛불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서울 청계광장에는 5만 명(주최측 추산)이 모였고 이후 주말마다 박근혜 햐야와 퇴진,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촛불이 타올랐습니다. 촛불은 2017년 4월 29일까지 스물세 번에 걸쳐 범국민행동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이어갔으며 연인원 16,832,280명(주최측 추산)이 전국에서 함께 하였습니다. 현재 박근혜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증거인멸의 우려로 구속기간이 연장, 2018년 4월 16일까지 추가 구속이 결정되었습니다.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한 청년이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심령이 뜨거워져서 “사탄과 맞서 싸우겠다!”라고 결단을 하고 성경책을 들고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사탄이 역사하는 곳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다.
술집, 도박장, 사창가를 아무리 돌며, “사탄아! 나와라!”하고 소리쳐도 그곳에는 사탄이 없었다.
하루 종일 허탕만 치고 지친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 지붕 위에 새까맣게 들러붙은 마귀들을 보았다. 가까이 가보니 마귀들이 잔뜩 교회 지붕 위에 붙어 지붕을 뜯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이 소리쳤다. “이 마귀들아~ 왜 술집, 도박장, 사창가에 있지 않고 여기 교회에 들러 붙어 있는 것이냐?”
그러자 대장처럼 보이는 마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이미 내 수중에 들어온 곳에 뭐하러 간단 말이냐? 우리가 진짜 목표로 삼는 곳이 바로 여기 교회다! 여기만 무너지면 다 끝나는 것 아니겠느냐?”
복음주의적인 성도가 갖추어야 할 4가지 가치가 있습니다.
1. 성경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2.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구속 사역의 인정
3. 개인적인 회심과 용서에 대한 경험
4. 성경 말씀과 선교에 대한 순종과 동참
이러한 가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부정직과 탐욕, 성공지향주의와 맘몬이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죽은 개 뼈다귀를 핥고 있는 한 복음주의는 계속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속에 적을 무찌르고 세상 속에서 예수 닮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죽음의 안무 「영혼의 양식」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전도서 3장 4절) 그러나 비탄과 춤은 분리되지 않는다. 슬피 울 때가 따로 있고 춤출 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은 두 때가 한때에 속한다. 울음이 춤으로, 춤이 울음으로 바뀌는데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다.
때때로 슬픔은 우리를 일으켜 춤추게 하고 춤은 우리에게 슬픔의 공간을 만들어 준다. 사랑하는 벗을 잃었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알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 성공을 축하하는 잔치 자리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애통과 춤, 울음과 웃음, 슬픔과 기쁨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슬픈 얼굴의 광대와 행복한 얼굴의 광대처럼 하나다. 슬픈 울음과 행복한 춤이 서로 손을 잡는 곳에서 드러나는 우리네 인생의 아름다움을 신뢰하자.
정서적 마비 「영혼의 양식」
사랑하는 벗을 잃었을 때, 특히 그를 깊이 사랑했을 때 우리는 오랫동안 정서적으로 마비될 만큼 깊은 슬픔에 잠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분신이 된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이 모두 그들에 의해 결정된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연인, 아이들과 친구들… 이 모두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들이 죽을 때 우리 몸의 일부도 따라서 죽는다. 우리의 분신인 누군가와 아프게 헤어지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성탄절과 생일, 명절이나 축일에 우리는 사랑하던 짝의 부재를 더욱 아프게 느낀다.
우리 가슴이 마침내 미련 없이 안녕이라고 말하고 슬픔의 고통이 어느 정도 지워지기까지는 한 해 또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마침내 떠나보내고 다시 우리의 ‘구성원member’이 될 때,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을 ‘다시 멤버remember’로 받아들이고 (다시 기억할 때), 그때 그들은 우리 영적 여정의 인도자가 된다.
기억 「영혼의 양식」
나이 들수록 기억할 사람이 늘어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 우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 영감을 주도록 그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네 영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우리가 살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조용히 도와준다. 우리보다 먼저 간 부모, 배우자, 자녀, 친구들이 우리의 참된 영적 도반이 될 수 있다. 때로는 그들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과 도반관계를 유지하도록 선택하는 것이다.
■ 가을엔 독서닷! VOL 1 - 이관택 목사
우리 함께 아파할 수 있을까?
‘땅의 옹호’ 를 읽고 | 김종철, 「녹색평론가, 2008.
1. 흙의 문화: 공감의 문화
▮ 함께 아파할 수 있을까?
흔히 ‘환경’운동이라 하면 자신의 안위와 연결시키는 ‘자연보호’ 운동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초등학교에서부터 교육 받아온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가 아끼고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상처 받지 않길 바라는 보편적
‘감수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글쓴이 김종철은 생활 협동조합 활동을 하는 조합원들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먹거리를 유기농으로 선택하는 행위가 결국 현실의 여러 갈림길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원리는 성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정언명령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다. 일단 나를 아낄 수 있는 문화의 시도는 현상을 넘어 근본을 드려다 볼 수 있게 하며 내가 잘 살기 위해 나와 함께 하는 이들도 잘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이며, 여기에서 타인을 나 자신처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감수성’이다.
요사이 일명 어금니 아빠 등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절대로 부족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만행에 대해 경계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어떤 사악한 개인의 일탈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점점 더 ‘타인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져 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교육, 문화, 가치관은 점점 더 타인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거나, 상대방의 상황을 헤아리는 능력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대량 생산체제와 극도로 발전된 자본주의는 이미 사람조차 생산 수단으로 한다. 성서에서는 종말의 때를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지 못하는 비극을 간직한 시대라 말하고 있는데 지금이 그러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성장’과 ‘경쟁’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사실 그것이 가져오는 ‘현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타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조차에 갖지 못하게 만드는 체제가 바로 ‘경쟁’이며, 자신의 발전과 성공을 위해서는 그 어떤 조건과 규칙이 무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성장’이란 말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갈수록 학교 폭력이 심해지고 세월호와 같은 대형 사건들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에는 바로 이러한 ‘성장과 경쟁’ 지상주의로 인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결여가 결정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대에 올바른 공동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남을 죽이고 결국엔 나도 죽는 공멸의 문화만이 승자 노릇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과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할 수 있을까?
▮ 흙과 사람 그리고 '틈' : 공감의 공간
글쓴이는 이 책에서 지금의 생태위기적 시대. 비민주적이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시대의 유일한 대안점은 바로 ‘공동체’이며 그 공동체의 모델로서 ‘농촌 촌락 공동체’를 제안한다. 사람들에게는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한데, ‘땅’이라는 작은 지엽적인 공간 안에서 노동을 통해 서로에 대한 필요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농촌을 그 근거지로 추천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의 ‘틈’이 생긴다. 그 틈의 존재는 서로의 다름을 인식할 수 있는 ‘감’인 것이고, 그러한 ‘감’을 인식하면서 그 ‘틈’을 메워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 공동체의 내용과 질을 보여준다. 작금의 한국사회에는 그러한 틈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다만 모든 것을 획일화 시켜 틈을 생성하지 않거나, 힘이 약한 타인을 죽여 틈 자체의 생성을 애초에 방지하는 방식으로 사회가 운영되고 있다. 타인을 용인하지 않고 ‘자기’의 존재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오만은 어찌보면 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착각이 아닐까. 사람(타인)을 죽임으로 사람(나)이 살아있다고 안도할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감의 공간인 ‘흙’은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 경제성장이 되지 않으면 과연 우리는 풍요롭지 못한가?
“흔히 우리는 경제성장을 통한 빈부격차 해소를 운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빈부격차란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적인 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토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이윤창출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힘의 격차라는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제성장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성장의 결과는 또 필연적으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정말로 고르게 산다면 거기에는 자본주의도, 경제성장도 성립할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하다.”
더글라스 러미스는 그의 저서 “경제성장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에서 끝없는 경제성장은 결국 생태계의 파괴와 인류의 공멸로 이어질 것인데 그것이 과연 우리 모두를 풍요롭게 할 것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더하고 있는 글쓴이 김종철은 이 글에서 ‘경제성장’의 속성 자체가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전제한 것이고, 자본주의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환상에 속아 인간성을 상실하고 끝없는 욕망을 쫒아 달음질하고 있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는 결국 차별을 더욱 곤고히 하고 인간의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함으로써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 말한다.
▮ 우정과 환대: 인간에 대한 예의
김종철은 이러한 시대에 문화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되고 상대적 박탈로 인한 고통을 겪는 일종의 가난을 ‘근대적 빈곤’이라 이야기하면서
‘근대적 빈곤’은 고층의 빌딩이 지어질 때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슬럼’과 같이 경제성장과 자본주의의 토사물을 안고 자연스레 인간다운 삶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삶의 문제라 말한다. 이러한 근대적 빈곤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인간의 자생적 기
술을 빼앗는 것인데 그것은 근대로 인해 오히려 퇴보된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우정과 환대의 윤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사람’이 ‘사람’ 자체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마을 공동체에서 굶는 사람이 생겨 날 수 없고 이웃의 소를 빼앗아 나의 소유가 늘어나는 것에 골똘하지 않을 것인데 지금의 시대는 이러한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무시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이 익숙해지고 남보다 앞서는 일에 미안하지 않는 세상.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이 되어버린 짐승의 논리가 지금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이다. 친구를 만난다는 것, 그 친구에게 내가 기대하는 것이 과연 진정 무엇일까? 그 속내를 고민하게 될 때, 나 자신도 짐짓 놀라게 되는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은 쉽고도 어렵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만이라도 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상대방을 위해 사용 할 때 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청년들이 고도의 스펙을 쌓으며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만 취업이 쉽지가 않습니다. 청년 실업률이 9.2%, 전체 실업자 중에 23%가 청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 권력 있는 자들은 취업을 청탁하고 곳곳에서 자행되는 채용비리가 공정한 경쟁을 비웃고 있습니다. 청년 가슴에 대못을 박는 비리와 부정을 척결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