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12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3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수요성서대학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번 수요일(11월 15일)은 제8강을 이어갑니다.
4. 이번주 16일(목)에 수능시험을 실시합니다. 한예나 학생(한효균 부장님), 김동환 학생(강경숙 집사님) 등 교우 가정의 고3 학생들이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5. 11월 마지막 주일(26일) 오후에는 이관택 목사님의 특강 '힙합과 민중신학'이 열리겠습니다.
6. 내년에 전교인 단합대회를 제주도 혹은 해외에서 추진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교우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촛불교회 안내]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와 노동3권 쟁취를 위한 기도회 | 11월 16일(목) 저녁 7:30 /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
■ 목회서신
지난 월요일에 은평동지방 교역자회의가 열려 참석하였습니다. 남기평 목사님 동기인 전도사님이 아직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지하 예배당에서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솔직히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는 분들을 보면 걱정이 앞섭니다. 고령화와 인구절벽에 젊은 층의 생활고, 여기에 더해 개신교 기피현상 등등 목회가 점점 더 어려위지는 것 같아서입니다. 이런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온 교회가 머리를 맞대고 골몰해도 과연 해결책이 나올까 하는 답답한 상황입니다.
교역자회의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러 가서 지방 평신도 지도자급 장로님과 같이 앉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사회평신도부 총무가 여성이 되는 경우도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가물에 콩 나듯이 아주 가끔 연급이 높은 여성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연급(장로안수를 받은 연한으로 따지는 계급) 이야기로 흘렀는데 이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서열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군대도 아닌데 계급이나 서열이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말씀드렸는데 장로님은 허허 웃으시며 '그건 이상이지요. 현실은 다릅니다!'라고 대꾸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고 이야기는 중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숨을 바쳐서 세우신 교회가 서열, 계급이 없으면 일이 안 되는 현실, 예수님이 죽는 순간까지 품으셨던 꿈과 비전이 그저 이상적인, 현실적이지 않기에 허허 하고 웃으며 넘겨버리게 된 현실이 지금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교인들이 장로가 되고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 감리교회의 중요한 과업들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미래가 막막해질 뿐입니다. 저야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새로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들은 이런 계급의 장벽을 넘고 성별의 숲을 지나서 이상을 비웃는 현실의 절벽 앞에 마주 서게 될 것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목사, 장로들이 감리교회의 법을 만들고 행정을 결의하는 입법의회와 행정총회에 대표의 권한을 갖고 참석하여 미래의 당사자인 젊은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결정해버립니다. 과거와 현재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교회법 수호와 복음을 강조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삶을 이상이라 비웃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 좋은만남 이모저모

지난 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오후에 교회 김장을 하였습니다. 해마다 김장 하는 날이면 김형휘 성도님이 괴력과 손맛을 발휘해 주셔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방인웅 장로님 부부가 준비해주신 절인 배추와 무가 아주 실했습니다. 교우들이 하나같이 달려들어 김치 속을 버무리고 발라주셔서 생각보다 아주 빨리 김장이 끝났습니다. 게다가 맛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끝나서 당황하는 사이 임정희 집사님이 배추전과 해물파전을 부쳐주셔서 맛나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미리 김장이 필요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이웃을 파악해서 나눠줄 수 있었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올해도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전교인 단합대회,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기 전, 교우들이 여행을 위한 작은 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이 시작되자 그동안 부었던 곗돈을 헌금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빚을 갚느라고 여행 같은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제 빚도 어느 정도 청산이 되었고 교회 재정도 조금 숨통이 트였으니 그동안 열심히 달려준 교우들을 위로하는 시간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 가능한 많은 교우들이 참석할 수 있는 날을 정해 제주도나 가까운 해외로 감사와 격려를 위한 여행, 단합대회를 가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물론 교회가 여행을 다니면서 재정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문제제기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지혜롭게 이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면 좋겠습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17년 11월 14일 "쿠데타로 정권 찬탈한 독재자 박정희 출생"
일부 극소수 지역에서 반인반신으로 불리며 추앙 받는 박정희가 1917년에 출생하여 올해로 출생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일본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다가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흡수되었고 남조선로동당 가입이 들통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면되었습니다. 1960년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여 1963년부터 18년 동안 5~8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장기집권을 꾀하다 부하 김재규에게 피격, 사망하였습니다. 일부에게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킨 대통령이라고 추앙받고 있으나 4.19혁명을 통해 폭발한 민주주의 열망을 크게 후퇴시키고 철권통치를 했다는 비판이 더 큽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탄핵되어 현재 구치소에 수감중입니다. 2012년 상암동에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며 최근에는 4미터 높이의 동상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밝혀 논란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경제개발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분명한 것은 권력을 독점하고 인간 생명을 해치며 인권을 짓밟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아름다움과 슬픔 「자비를 구하는 외침」
주님, 오늘도 당신의 풍요로운 사랑이 자연의 풍요로운 아름다움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태양은 제네시 계곡의 너른 들을 감싸고, 파란 하늘은 여기저기 떠 있는 구름 사이로 맑게 빛나며, 벌거벗은 겨울나무에는 연초록 계절이 다가온다는 신호로 망울져 있고, 벌판은 여전히 잿빛으로 어둡지만 온갖 싱그러운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산마루에서 계곡을 내려다보며 저는 지금 제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압도당했습니다. 고맙다는 느낌과 함께 인생이 참 짧다는 느낌이 제 가슴을 가득 채웠습니다. 기름진 대지를 바라보자니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생각났고, 그날 경험했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이상한 슬픔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제가 본 것을 어머니에게 말하거나 어머니가 그토록 기쁘게 맞던 봄 아지랑이에 대해 편지 한 줄 쓸 수 없습니다. 새 생명과 돋아나는 연록색 잎, 꽃과 새들은 여전하지만 올봄에는 어머니가 제 이름을 부르며 ‘여기 봐라, 저기 봐라!’ 하시지 않겠지요.
그러나 주님, 당신은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죽어야 많은 열매를 거둔다.” 저는 어머니의 죽음이 풍성한 열매를 거루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지금 준비하는 당신의 부활 아침은 또한 죽어가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는 신호입니다.
제 슬픔이 저를 이끌어, 십자가를 넘어 빈 무덤의 부활의 새벽까지 당신을 따라가게 하소서. 저 땅의 아름다움으로 제 기쁨과 슬픔을 아울러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제 주인이요 스승이신 당신께 저를 더욱 가까이 당겨주소서.
길 위의 천사 「자비를 구하는 외침」
사랑하올 주님, 당신 집에서 평화로이 안식을 누릴 때까지 저는 언제나 긴장과 불안 속에서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살 것입니다. 만일 제가 저 언덕 위의 도성을 향해 나아간다면, 여전히 저는 고단하고 지친 몸으로 걷고 또 걸어야 하겠지요.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저는 길에서 만나는 당신의 천사에게 묻습니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저 언덕에 오를까요?” 그러면 그가 대답하지요. “그래요. 끝까지 가면 언덕에 닿아요.” 제가 다시 묻습니다. “이 길을 온종일 걸어야 하나요?” 그가 대답합니다. “친구여, 그래요. 아침부터 밤까지 걸어야 해요.”
그래서 주님, 저는 이렇게 지치고 때로는 좌절하고 낙심하면서도 언제든 저 황혼의 석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영원한 도성에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습니다.
앞으로 남은 제 인생이 좀 더 쉬워질지, 제 마음이 좀 더 고요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제가 당신 집으로 가는 이 오랜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걸어간다면, 이윽고 저를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주실 당신이 계심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주님, 저에게 용기와 희망과 확신을 주소서.
■ 가을엔 독서닷! VOL 2 - 이관택 목사
어려워도 더더욱 성찰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도전’ 을 읽고
정희진, 「교양인, 2005.
1.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 사랑한다 말하기 '하나' : 더 중요한, 더 근본적인 사랑(억압)?
역사의 진보는 인권의 확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래서 인권은 사회적 투쟁 속에서 경합하는 매우 정치적인, '움직이는' 역동적 가치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사회에서 좀 더 '진보적'이라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개념은 조금은 구조화된 사랑이며 인식과 가치의 차원일 수 있지만 좀 더 진보적인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외된 노동자, 농민, 장애인 등 소수자의 존재와 가치를 전인적으로 염원하는 존재라 할 수 있으니 '진보적=사랑하다'라고 표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글쓴이 정희진은 더 많은 사랑의 감성을 갖고 있다고 자임하는 소위 '진보적인 남자'들에게 비판을 가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말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남성이라도 성별(gender)과 계급문제를 분리, 대립, 택일해서 생각하기 마련인데, 특히 서구/남성/근대의 이분법적 사고 구조가 익숙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억압은 자신이 경험한 억압이다. 여기서 문제는 자기 경험 외의 사회문제는 특수하고 부차적인 것이 되는데, 사회 전반의 인식 주체로 대표되는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여성의 문제는 그야말로 중요치 않은 사사로운 문제로 치부되기 쉽다.
여성주의는 '일차적인' 사회모순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성별억압을 전제하지 않은 계급 억압이 없으며 계급 모순 없는 성별 모순도 없다는 말을 자세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성별, 장애, 경제, 나이, 성적지향, 언어, 병명, 국적, 종교, 인종 등 수 많은 정체성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차이를 낳고, 그 차이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하면서 ‘차별’로 전환되며 그 결과 상위 주체에 의한 하위주체의 폭력의 경험과 상처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러 가지 정체성과 모순은 서로 중첩 교직되면서 어떤 더 중요한 경험과 근본적인 억압의 문제를 논의 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소말리아의 전쟁 상황이 오히려 여성들을 가정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처럼 누군가에게 프라이버시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이 모순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말하기 보다는 사랑할 수 있는 감수성을 넓히기 위한 상상력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위한 현실인식이 더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 사랑한다 말하기 '둘' : 나에게는 사랑, 당신에게는 강간
어느 날 밤, 집 앞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큰 길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50여 미터, 워낙에 달동네인지라 가로등도 없고 또 담벼락들로 인해 달빛까지 어스름히 비추이는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집에 가고자 골목길에 들어서서 걷다가 문득 내 앞에 앞서 걷고 있는 한 여자에게 시선이 갔다. 형색을 보니 좀 전에 마을버스를 함께 타고 온 여자였는데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나를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걸음도 점점 빨라지고 불안한 듯 어딘가에 전화를 급하게 거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매번 그렇게 하듯이 슬며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여자가 골목길에서 사라지길 기다렸다. 나는 내 자신이 그 시간, 그 여자의 눈에는 한 사람의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짐승(성폭력 가해자)으로 보여 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런 일이 나에게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여성 친구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골목길에서의 남성과의 조우에 대한 공포의 기억과 그 기억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성 친구들은 그것에 대해 별다른 기억이 전혀 없거나 그러한 경우에 미묘한 흥분과 설레임 마저 경험한 사례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예를 바라보면서 골목길 안에서의 경험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기억과 감정은 이 사회의 가부장적인 장치와 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골목길에서 여성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최대한 보호하며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하는 것과 밤에 여성들이 나다니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이 사회의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적 사회는 ‘치한’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껏해야 여성에게 수수한 옷차림을 강요한다거나 가로등 불을 좀 밝은 것으로 바꾼다거나 그 지역 순찰을 강화하는 것의 외부적 기제들에서 찾게 된다. 이는 성매매를 긍정하는 논리와 비슷한 구조를 갖게 되는데 남성이 여성을 강간할 수밖에 없는, 즉 주체할 수 없는 성적인 욕구를 생득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바뀌어 지지 않는 한 이러한 악순환은 반복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운동 중 특별한 행사의 하나인 ‘달빛시위’ 등은 이러한 여성의 현실을 잘 드러내는 운동이다. 남성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밤거리 걷기’가 여성들에게는 굉장히 심리적이고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두려움의 요인인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제 상황에서의 골목길은 실제로 여성에게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여성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의도가 전혀 없는 남성, 심지어 여성주의의 철학을 사유하며 실천하려고 그 밤거리에서 최선을 다해 경계하고 감수성을 발동시켜 조심조심하는 남성도 잠재적인 성폭력 가해자가 되어 질 수밖에 없는 현실은 실로 두려운 상황인 것이다. 또한 많은 경우의 수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성소수자 또는 남성조차도 성폭력 피해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의 어떤 친구는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남성을 밤 열시 이 후에 못나오게 해야 한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 이야기는 굉장히 현실적으로 들리기도 하다. 문명화된 사회 일수록 본능에 의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짐승’들은 주로 동물원에 가둬 놓거나 또 다른 통제기제로 행동에 제한을 두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 때문이다.
이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늑대와 여우의 결합은 언제라도 성폭력 상황을 유발시키는 긴장관계가 된다. 요즘 주변에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사건은 나의 존재와 성별화 된 이 사회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연결시켜보게 한다. 믿음의 문제, 단순한 인격의 문제를 넘어서는 성폭력의 가능성이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내 안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데 사랑을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
사랑한다면 사랑의 방식과 그 사랑에 대해 집중하게 된 과정까지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될 복잡한 세상이지만 사랑의 언어를 하나씩 터득해 나가고 실천할 수 있다는 기대는 나의 존재의 신비를 희망하게 한다.
2. ‘변태’를 위한 존재
▮ 변태하기 위하여: 성찰하는 존재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올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278p)
모든 인간은 삶을 영위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그것은 나이 듦과 환경의 변화, 학습으로 인한 생각의 확장, 몸의 변화를 통한 자기 존재의 인식의 변화를 포괄하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에게 다가오는 숙명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 변화의 과정은 때론 자연스럽게, 때론 전복적인 거부감을 동반하면서 찾아온다. 이 중에 어떠한 변화는 그 사람이 구성하는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만큼의 존재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마치 곤충이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는 과정과 같은 절대적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다시 알로,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서 겪어 온 끊임없는 변화를 결정적으로 인지하는 과정은 상처와 아픔을 동반한다. 아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는 정희진의 말은 결국 안다는 것은 그 동안의 무지로 보호받아온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것을 말한다. 다시는 그 껍질 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껍질의 파괴를 경험하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고민과 성찰, 그로인한 환희는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고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내 모습을 보여준다. ‘변태’는 바로 알기 이전의 나와 달라진 ‘내 존재’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변태의 과정은 일회적인 것이 아닌 순간순간 과정으로서의 ‘삶’ 자체가 된다.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목사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매 순간 인식하지 않으면 그것은 누군가에게 나의 삶 자체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변태’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삶 전체를 성찰의 도구로 삼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 나이, 성 판매, 군사주의 : 한국 사회 한 복판에서 나를 들여다보기
마흔을 앞둔 지금의 나는 나이에 대한 정치학을 체감한다. 젊음(상대적인 시각으로서의 시간)이 끝나고, 자유의 시기가 끝나고 나이 듦과 책임의 시기에 위치하고 있다는 나 자신의 위기감(이런 위기감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이 어느 덧 내 삶을 짓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의 나이 듦과 여성의 나이 듦의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정희진의 말을 통해 나는 놀람과 동시에 기만적인 안도감을 느낀다. 남자에게 나이 듦은 권력과 자본에 더욱 쉽게 접근하는 통로가 되지만 여자에게 나이 듦은 내/외면적으로 점점 소외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영화 <집으로>와 <죽어도 좋아>를 비교 하면서 나이든 여성, 권력 없는 남성(가난하고 장애가 있는)의 욕망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는 이 사회의 시각과 사람들의 인식상황을 느끼면서 몸서리 처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60대인 홍준표가 권력을 탐하고 (다양한 부분에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려는 것에 대해 정치적 의제를 제외하곤 한 번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50대 초반인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의 욕망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에 따라 성별화가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가 얼마나 기득권을 갖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성판매 여성(성매매가 아닌 성판매 여성으로의 이름 짓기)의 이야기에서 ‘사랑-성폭력-성매매’는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 나부터가 성구매 남성일 수 있다는 것은 성매매와 내가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이러한 나의 남성성은 끊임없이 ‘여성성’이라 타자화되는 다양한 존재들을 무의식중에 찾고 있는 나를 통해 발현된다. 후배를 찾고, 가르쳐야 할 대상을 찾고, 편한 상대를 찾는 것, 내가 도와 줘야 할 대상을 찾는 것조차 나를 진정한 어른으로 만들어 준다던 군사문화의 세뇌화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너무나 큰 비약이라는 생각이 언뜻언뜻 들다가도 나에게는 비약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삶이고 끊임없는 고통의 경험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숙연해 진다.
성찰하고 싶어도 성찰되지 않는, 성찰했다 하지만 실천되지 않는 나의 존재를 느끼면서 진정으로 변태를 위한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님 내가 변태하기를 원하는 건지에 대한 끝나지 않는 질문의 연속, 그것이 바로 변태를 위한 ‘존재’되기가 아닐까?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인터넷 댓글 조작으로 국민에 대한 전방위적 여론몰이와 사찰, 블랙리스트를 통한 따돌림을 자행하였고 사대강사업, 자원외교, 방위산업으로 막대한 국고를 탕진한 이명박 정부와 그 하수인, 부역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권력에 취해 온갖 부정을 저지른 세력들이 죄과에 합당한 벌을 받게 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세워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