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오전 8시 20분 경 효도나들이 출발을 하기로 했던 서울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약속장소를 서울역 파출소 앞으로 정햇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고난 총무인 황인근 목사를 만났는데 선생님들은 다른 장소에들 계신다고 하더군요.
출발하기로 했던 8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와야 할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약 40여명이 나들이에 함께 하는데 45인승 버스 협찬을 구하지 못해 25인승 버스와 15인승 승합차 두 대가 가게 된 것입니다.
그 15인승 승합차에 내가 당첨(?)된 것이었습니다.인천에서 오는 효성중앙교회 버스가 생각보다 많이 늦어져서 한참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이미 8시도 훨씬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지루하셨을른지...
한참을 있는데 한 노인이 가슴에는 고난 효도나들이 명찰을 달고 힘겹게 걸어오시더군요. 모여 계시던 장소를 떠나 차가 있다는 곳으로 오신 것 같더군요. 챙있는 모자에 개량한복을 입으시고 하얀 수염을 기르신 어르신의 가슴에는 김수룡이라는 성함이 쓰인 명찰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첩 혹은 좌익, 빨갱이라고 하면 끔찍한 생김새를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3-40년씩 감옥살이를 버텨낸 사람들이면 독하디 독한 사람들일 것으로 더욱 오해를 합니다. 하긴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정치적인 신념을 위해 수십 년씩 감옥에 있는다는 것은 상상이 잘 안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내 앞에 나타난 분은 그냥 노인입니다. 걸음걸이도 부자연스러운 노인, 동네에서 오가다 마주치는 노인네들보다도 더 늙은 노인!
사실 나도 처음에는 비전향 장기수라는 말에 약간은 긴장을 했었습니다. 그게 남한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도 아닐뿐더러 그런 사람 역시 요주의 인물로 여겨야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고난에서 비전향장기수 백서를 만드는데 내가 한 분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인영 선생님었습니다. 그때가 크게 인상깊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도 역시 의외의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신인영 선생님은 그때도 암투병중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북한으로 송환되어 몇 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꿈에나마 그리던 고향에 돌아가서 임종을 맞으셨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차에 앉아계시라고 문을 열어드리고 나서 한참이 지난후에 차 안에 계신 선생님이 문을 열고 나오시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몸이 불편한 분이 이리로 오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도 편치 않으신데 다른 사람 걱정까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완전히 꼬부라진 할머니 한 번이 지팡이를 짚고 이리로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 역시 비전향 장기수였던 것입니다. 할머니... 젊은 시절에 산에 들어가 빨찌산이 되었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수십년 하시고 이제는 그냥 폭삭 늙어버린 할머니... 마음이 조금씩 먹먹해졌습니다.
버스가 오고 선생님들이 차량 두 대에 나누어 타시고 출발하였습니다. 내 차는 승합차라 조금 불편할 것 같아서 남자분들이 타셨습니다. 한 차 가득 선생님들을 태웠습니다. 남들이 보면 한 차 가득 좌익 간첩 공산당 빨갱이들을 태운 셈이지요. 그러나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그냥 좀 꼬장꼬장한 노인네들, 그저 동네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노인네들을 한 차 태웠다는 느낌정도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야기 하시는 것이나 생김생김이나 나누어 드린 간식봉지를 뒤져 꺼내 드시는 모습이나...
그렇게 평창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남산길로 올라가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영동고속도록 갈아탔습니다. 역시나 양지 부근에서 막혀서 거북이 걸음을 했습니다. 왜 거기는 항상 막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합류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