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강림절 제2주일 및 성서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생명 평화 세상을 위한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경건하게 기다리며 기도해 주십시오. 강림절 기간에는 주보에 매일묵상을 싣지 않습니다. 나누어드린 묵상집 '모든 것을 품는 사랑'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이번 수요일에 제11강으로 종강하며 특별활동으로 모입니다.
4. 다음주일 오후에는 당회로 모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고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자리이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5. 이번 성탄절에 세례 및 입교를 원하시는 분은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6. 겨자씨헌금을 단체로 송금하고자 합니다. 12월분을 조금 일찍 해주시기 바랍니다.
7. 이번 성탄절(25일)에는 오후 3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눅 1:79)'라는 주제로 열리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좋은만남 좋은여행 2018”
모처럼 큰 맘 먹고 기획한 대만 남부 가오슝으로의 '좋은만남 좋은여행 2018'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그러나 아름답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단 참가자 신청은 완료하였습니다. 총 25명이 이번 여행에 함께 하게 되었고 결제도 다 마무리하였습니다. 이번 수요일에 항공권 발권을 한다는데 결제하지 않은 유류할증료(개인당 6,800원)는 교회 지원예산으로 처리하였습니다.
대략 여행 일정을 알려드립니다.

비용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많으실 텐데 지난 회의에서 결의한대로 교회에서 이번 여행을 위해 500만원을 사업비로 지출하겠습니다. 총 유류할증료 17만원과 가이드/기사 경비 30달러(원화는 환율에 따라 변동)를 제외한 금액을 인원수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하여 개인별로 나누어 드릴 예정입니다만 개인으로 가는 분과 가족이 가는 경우, 어린이가 있는 경우가 있어서 어떻게 지원하는 것이 서로 충분히 공평하게 여길까에 대해서는 고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함께 좀 더 상의하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공항으로 이동하는 고속도로 통행료, 주차비 등은 교회에서 별도로 지출하겠습니다.
이 외에 소요되는 경비인 옵션관광(발 마사지 30달러와 대관람차 50달러), 자유시간에 하시는 개별적인 식사 및 음료, 쇼핑, 인터넷 해외 로밍 사용 비용(회선 수에 따라서 공동으로 부담 가능) 등은 개인이 필요하신 대로 부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출발하는 날까지 아프지도 말고, 사고도 내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비행기 타면 되겠습니다. 출발 전까지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많으실 텐데 그때그때 필요한 사항을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2017년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연합예배'가 12월 25일(월) 오후 3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라는 주제로 열립니다. 올해는 특별히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로 황폐화된 구럼비바위 강정마을, 싸드 배치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경북 성주 소성리, 전쟁위안부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마련하였습니다. 당일에 우리 예배당에서는 따로 예배가 열리지 않습니다. 연합예배를 기억하시고 시대의 폭력과 압제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꼭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91년 12월 13일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남북 기본합의서(南北基本合意書)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북한과 맺은 7.4공동선언에 이어 노태우 정권이 1991년 12월 13일에 재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뒤 이듬해 1992년 2월 18일 정식으로 효력을 발생시킨 문건으로 북한과 두 번째로 체결한 합의입니다.
1980년대에 소련의 ‘개혁’, ‘개방’을 추진하였고, 당시 공산권 국가들이 점차 붕괴되기 시작, 냉전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남한 노태우 정권은 공산권국가들과 외교 수교를 맺는등 이른바 ‘북방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1990년에 남북한 고위급 회담을 가졌고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게 되자 12월에는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게 된 것입니다. 주요사항은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안이 특징으로 이듬해 9월 16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양측은 남북합의서 이행과 관련한 3가지 부속합의서(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협력)에도 서명하였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어떤 교구의 신부가 자신의 취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하여 마련한 만찬장에 참석하였다.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이자 그 교구 신도인 한 정치가가 만찬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교통체증에 걸려 늦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신부는 기다리는 동안 그 동안 사목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을 소개하였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대로 고해성사의 비밀은 절대 밝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 와서 제일 처음 받았던 고해성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신원을 밝히지 않고 막연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제가 25년 전 이곳에 부임하였을 때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하려고 온 사람이 자기가 TV를 훔쳤는데 경찰이 심문하려 하길 래 반쯤 죽도록 패주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회사의 돈을 횡령하였고 보스의 아내와 놀아났다고도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못 올 곳에 파송 받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교구사람들이 다 그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신부가 막 이야기를 끝내자 정치가가 들어오면서 늦어져서 죄송하다며 곧 연설을 시작하였다. ”저는 우리교구에 신부님이 취임하셨던 첫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며 이야기를 시작한 정치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는 신부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신부님께 첫 번째로 고해성사를 하는 영광을 가졌었습니다.”
약속한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친밀감을 나누는 집 「주님의 집에서」
“내가 네 안에 내 집(거처)을 마련하듯이 내 안에 네 집을 마련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시며 예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밀한 장소를 제공하신다. 집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곳, 온갖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근심 걱정과 긴장, 압박에서 자유로운 그런 곳이다.
집은 우리가 마음대로 웃고 울고 껴안고 춤추고 실컷 자고 꿈꾸고 먹고 읽고 놀고 음악을 듣고 아궁이에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친구를 불러 놀 수 있는 곳이다. 집은 우리가 쉬고 치유 받는 곳이다. ‘집’이라는 한마디에는 있으면 좋은 곳, 사랑이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 세상에는 집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들 가운데는 분노에 사로잡혀 집을 나온 사람들도 있고 조국에서 추방당해 집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감옥, 정신병원, 난민수용소, 도시빈민가, 쉼터, 사설요양소 같은 곳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집 없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집이 없다는 사실을 그나마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여러 나라와 고장에서 온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여러 해 동안 그들은 고향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쪽방에 살고 있다. 그들한테는 사생활이 거의 없고 공동체는 더욱 없다. 대부분 아이들이나 노인들을 만날 기회조차 없다.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가정도 없고 극히 적은 학생들만 어쩌다가 가정에 초대받아 잠시 휴식을 맛볼 뿐이다. 겉으로는 ‘정상’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집 없는 사람이 되어 뿌리 뽑히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영원한 지금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영원한 삶永生.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 있는가? 오랫동안 나는 영원한 삶을 내 모든 생일이 바닥난 뒤에 올 미래의 삶으로 생각해 왔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음 생’으로, ‘죽음 뒤의 삶’으로 말해 왔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가면서 ‘다음 생’에 대한 관심이 차츰 줄어드는 걸 느낀다. 내일, 내년, 다음 십년뿐 아니라 다음 생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공연한 걱정 같다. 내가 죽은 뒤에 무엇이 어떻게 될지 궁리해 봤자 마음만 어지러울 뿐이다.
진정 내가 영원한 삶을 목표로 삼는다면 지금 당장 내가 있는 여기에서 그 목표에 이르러야 한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게 사는 삶이요, 그 하느님은 바로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성생활(하느님 안에 사는 삶)의 가장 큰 신비는 우리가 그것을 뒤에 올 무엇으로 기다릴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네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도 내 안에 머물러라.” 바로 이 거룩한 상호내재가 영원한 삶이다. 내 실존의 중심에 하느님이 살아 계심(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심)이 곧 우리의 영생인 것이다.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의 연재는 이번 회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겨울에도 독서닷! VOL 4 - 이관택 목사
당신이 예수를 믿는 이유
‘예수를 교회로부터 구출하라’로빈 마이어스,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철학자 알튀세르는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문제설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무엇을 문제로 설정하고 어떠한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현상은 각 각 다른 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아래의 ‘질문’은 로빈 마이어스가 이 책을 통하여 하고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은 궁극적인 고민이다. 어떻게 하면 신앙이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행복하며, 올바르게 이끌어갈 것인가?(결국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일 텐데 말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성경적으로 책임적이며, 지적으로 정직하며, 정서적으로 만족시키며, 사회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신앙이 될 수 있겠는가?”(18p)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접속하는 이유,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 예수를 믿는 이유, 성령을 받고 동행하고 싶은 이유가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와 이유와 경험과 정서와 이미지로 기독교를 만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질문했을 때 기계적으로 튀어나오는 답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소위 말하는 ‘교리’라 하겠다. 하지만 교리를 ‘신앙고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단순명료하며, 나의 경험이 아니라 타인의 가르침 같은 것이라 뭔가 밋밋한 것이 사실이다.

교회 다니는 이유가 천당 가기 위해서라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더욱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라면, 교회 다니는 이유가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셨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너무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면, 좀 답답해진다. 이 세상 대부분의 종교가 천당을 이야기 하고, 대부분의 종교가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이야기 하고, 대부분의 종교가 그것이 진리이고 유일하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왜 굳이 기독교인가? 이것은 끌림인가? 나의 선택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인가? 지성의 잔이 넘치는 시대에 질문은 너무나 다양해 졌으며, 우리 신앙의 구석구석을 찌르고, 생채기를 내는데, 답은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그 진정성마저 폄하 당할 때가 있다. 내가 믿는 진리가 다른 모든 것 위에 상존하는 진리여야 하고, 내가 만난 하나님이야 말로 만고의 진리인 진짜 하나님이여야 한다(고로 타인이 믿는 것은 가짜다!)는 자기중심적 생각이 과연 ‘신앙’이란 단어와 얼마나 어울리는가?
신앙인이 전쟁과 번영, 거대한 제국과 차별, 맘몬과 노예, 비윤리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삶의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드리며, 하나님의 뜻에 비춰 생각하고 있는가? 사실 작금의 교회 성도들을 보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삶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한데,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먼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예수님의 삶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마당에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의 순간순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겠는가? 필자의 질문이 너무 냉소적인가? 하지만 절망 가득한 세상에서 냉소적이지 않는다면, 예수의 삶을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실은 냉소적으로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이 땅의 기독교인은 충분히 독선적이고, 타종교/문화에 대해 충분히 냉소적이지 않은가?
저자는 자유주의자들이 신앙을 해체하고 교회 공동체를 와해시켰던 과거를 반성한다. 필자 또한 그렇다. 질문의 폭을 넓혀, 답의 깊이와 차원을 폭넓게 하자는 것이지, 교회 공동체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으며, 복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대해 탐구하고 정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를 비롯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열렬히 믿고 있는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런데 그 결과가 신앙인들이 물질과 세속주의에 빠지고, 대형화되어 버리고, 사회로 부터 온갖 욕설을 얻어먹고 있는 모습이란 것은 현 교회의 체제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마제국조차 해체시켜버렸던 예수의 복음이 왜 작금의 기독교를 해체시키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제국화시키고 있을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욕망의 방향과 자세와 목적을 세상의 것과는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 지금의 기독교 신앙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세상적 욕망을 더욱 더 커질 수 있도록 부채질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어떻게 달라지겠다는 것인가? 무엇이 더 신앙적이고 성서적이고, 영적이면서도 나를 더욱 행복하게,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할 수 있을가? 답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시작은 ‘예수’이다. ‘예수’처럼 느끼고 예수처럼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이 참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까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옛날 코메디 프로에 나오던 유행어가 기억난다. “돈 벌면 뭐 하겠노? 소고기 사 묵겠지! 소고기 묵으면 뭐 하겠노? 행복해 지겠지” 우리가 원하는 행복이 겨우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를 다시 한 번 돌아보자. 행복의 내용과 목표가 다른 우리. 서로의 품격을 높여줄 수 있는 신앙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기를.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국정농단 극우세력이 방송국을 장악하여 국민여론을 호도하고자 지상파 방송사를 기준 미달로 망쳐놓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최승호 PD가 해고된 지 1998일만에 MBC방송국 사장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방송이 제 자리를 찾고 국민 여론을 올바로 전하는 국민의 입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회복과 부활의 은혜를 베푸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