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립니다!
1. 오늘은 강림절 제4주일 및 성탄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생명 평화 세상을 위한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경건하게 기다리며 기도해 주십시오.
2. 성탄절(25일)인 내일은 오후 3시,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앞에서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눅 1:79)'라는 주제로 열리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절 연합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교회에서 2시에 출발합니다. 날씨가 추우니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오시기 바랍니다.
3. 다음주일에는 낮예배를 드리지 않고 송구영신예배로 모이겠습니다. 저녁 7시에 모여 함께 식사를 나누고 송년행사를 한 후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신년의 기도제목을 담아 신년감사헌금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좋은만남 좋은여행 2018'을 신년 1월 5(금)~7일(주일)에 대만 가오슝으로 떠납니다. 여행에 참가하시는 분은 여권, 여행용품 등을 미리미리 챙겨두시기 바랍니다. 신년 첫 주일님(7일)은 교회에서 남기평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해 주십니다.
■ 목회서신
2017년 12월 31일과 2018년 1월 1일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12월 31일의 아침과 1월 1일의 아침은 똑같은 태양이 떠오르는 똑같은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두 날을 전혀 다른 날로 생각합니다. 내용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다른 것이 전혀 없는 날이지만 인위적으로 선을 그어 1월 1일을 한 해가 바뀐 날, 전혀 다른 새로운 출발로 인식을 합니다.
하루 차이로 전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비록 인위적이기는 하지만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든지 불문하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다짐으로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우리 삶을 더욱 무성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면서 참 많은 결심을 합니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중을 줄이겠다고 다짐하며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금연을 하겠다고 다 갖다 버리기도 하고, 새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겠다고 필요 없는 물건들은 정리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채 한 달도 안 돼서 좌절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열한 달을 다시 전과 다름없는 똑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새해라는 개념보다는 새 날이라는 개념으로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해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 매임 아침을 새롭게 주어진 축복의 날로 여긴다면 차라리 우리 삶에 미약하나마 진보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곧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을 지내다가 한 해가 거의 다 갈 때 즈음 다시 강림절, 성탄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 절기도 인위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일 년을 단위로 순환하는 절기가 일 년마다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욱 철저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매일을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같이 맞이한다면 우리 삶은 더욱 솔직해지고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지은 죄와 허물을 일 년마다 털고 갈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되새기며 결단한다면 분명 신앙의 진보가 있을 것입니다.

■ 좋은만남 이모저모

우리교회의 자랑꺼리 중 하나는 단연 겨자씨헌금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을 자기 한 몸 천국 가고 , 자기 가족, 자기 교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목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교회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일에 헌신하는 분들, 평화를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 이웃을 위해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하려는 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매월 정한 금액을 겨자씨헌금으로 드리고 그것을 연말에 각 단체로 송금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감리교회에 속한 단체인 평화교회연구소(30만), 여성지도력개발원(30만),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30만), 감리교청년회엽합회(30만)와 교회 연합단체 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운영하는 데나리온뱅크(50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10만), 환경단체인 기독교환경연대(20만), 지역활동 토마토학교(20만), 부산의 노숙인 지원단체 애빈회(10만)에 총 230만원을 보냈습니다. 애빈회는 부산의 김홍술 목사님이 노숙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시는 사단법인인데, 송금하는 중에 '지극히 작은 자와 함께 하는 성탄만찬회(사진)'를 한다는 연락이 와서 예정에 없지만 작게나마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겨자씨헌금은 총 290만원 정도 헌금되었지만 연중에 60만원을 지출한 관계로 이번에는 230만원을 집행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큰돈인지 모르지만 단체 운영하는 데는 턱없이 푼돈이라 부끄러운 마음도 있지만 부디 의미 있는 일에 잘 써달라는 요청도 함께 드렸습니다. 올해도 정성껏 겨자씨헌금을 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내년에도 하나님 나라 세우는 일에 마음 더 많이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336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성탄절)이 로마제국에서 시작됨"
성탄절은 일반적으로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지만 기독교에서 매년 12월 24일부터 다음 해 1월 6일까지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로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미사"(massa)의 합성어로서, '그리스도 모임' 즉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모임'이라는 뜻이고, 로마연감의 기록에 따라 336년경 로마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며, 당시 로마제국의 역법인 율리우스력에 의한 12월25일에 기념되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수태일을 수난일인 3월 25일로 보며 이 날로부터 아홉 달을 계산하여 12월 25일로 보고 있습니다. 12월 25일은 기원 전부터 로마, 이집트 등 이교도 지역에서는 태양 숭배 및 관련 신화에 따라 12월 25일을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 축일로 기념하고 있었는데 1년 중에 해가 가장 짧아지는 동지(冬至)에 즈음하여 그 이후부터는 해가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에, 어둠이 물러나고 빛이 세력을 얻어 만물이 소생해 나갈 수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날을 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크리스마스는 1월 7일(율리우스력의 12월 25일)로 서방 교회보다 13일이 늦다고 합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 짧은 얘기 깊은 생각
아프리카를 탐험한 두 영국인의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다.
한 사람은 황금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엄청난 금과 다이아몬드를 영국에 들여왔다.
그는 영국을 진정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침략정책과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그는 영국인들로부터 반역자요 배신자로 비난받았다.
전자의 이름은 세실 로드(Cecil John Rhodes, 1853-1902),
후자의 이름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1813 ~ 1873)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 로드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영국 국립묘지에 안장돼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두 사람이 왜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가?
그것은 믿음의 차이 때문이다.
리빙스턴은 하나님(God)을 믿었고 로드는 황금(Gold)을 믿었다.
그 믿음이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Gold를 God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몇몇 교회에서도 목사가 God을 부르며 Gold를 모읍니다.
그들이 모은 Gold는 그들의 God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God의 종이 아니라 Gold의 사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God과 상관없이 세습을 하는 것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 감리교는 무엇을 믿는가?
이찬석 지음 KMC (2014)
사회 참여와 실천의 전통을 자랑하는 감리교회의 신앙고백 기본을 해설한 "감리교는 무엇을 믿는가?"를 연재합니다. 이 글을 통해 감리교인의 정체성을 갖고 신앙의 정수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감리회 신앙고백이란? (2)
'교리적 선언'과 '감리회 신앙고백'
2. 기본 3대 원칙
감리회 교리적 선언은 웰치(H. Welch, 1862~1969) 감독이 영문으로 초안을 작성하였고, 양주삼 목사가 한글로 번역하였다. 교리적선언의 기본 원칙은 ‘진정한 기독교회’(truly Christian Church), ‘진정한 감리교회’(truly Methodist Church), ‘진정한 조선적(한국적) 교회’(Korean Church)이다. 웰치 감독에 따르면, ‘진정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것들을 행하여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열고 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진리와 사랑의 권능으로 구원하고, 사회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며,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감리교회’는 옛날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은 편협한 교파주의를 버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와 같이 포용적이고 조화적인 관계(에큐메니칼1))를 유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진정한 감리교회는 진보적인 의미로 생명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새롭게 되듯이 감리교회도 구시대적인 진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한국적 교회’는 한국인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지향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또한 감리교인의 생활 중에서 한국적인 것만을 선택하고,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이루어진 기독교 전통을 경시하거나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한국적 교회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기독교의 교리와 전통을 예배, 행정, 교리에 잘 이용하되 한국의 문화와 풍속, 관습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발전시키자는 의미이다. ‘한국적 교회’라는 원칙은 토착화 신학2)으로 이어지면서 감리회가 토착화 신학의 산실이 되었다.
3. 구조와 내용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은 교리적 선언과 감리회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이라고 표현하면서 두 가지 모두를 감리회의 신앙고백으로 삼는다. 그러면 왜 교리적 선언이라는 신앙고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감리회 신앙고백을 제정하였을까?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97년에 감리회 신앙고백을 제정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감리회는 1930년 제1회 총회에서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여 왔다. 그동안 이 ‘교리적 선언’은 한국 감리교인들뿐 아니라 미 연합감리교회에서도 애용되어 왔다. 이러한 ‘교리적 선언’은 앞으로도 감리회의 역사적 선언으로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67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삶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감리회 신앙고백’을 제정하여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바이다.
결국 20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며 한국 사회는 교리적 선언이 제정된 1930년대와 상황이 많이 달라져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신앙고백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기독교대한감리회는 1997년에 감리회 신앙고백을 제정하여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교리적 선언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수정, 보완하였다. 새로운 신앙고백의 제정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창립 초기부터 지향하였던 3대 원칙의 방향과 일치한다. 전술하였듯이, 웰치 감독은 1930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1회 총회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정 감리교회는 진보적이므로 생명이 있는 이의 특색을 가졌으니 곧 그 시대와 지방을 따라 자라기도 하며 변화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로운 신앙고백을 제정하는 것은 감리교회의 특색과 조화를 이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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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의 선교 영역이라는 의미. 현대에는 모든 종교와 교회의 일치와 화합 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2) 신학이 어떤 특정한 지역의 토착 정서, 관습 등과 만나 그 지역 특유의 신학을 형성하는 것을 토착화 신학이라 한다. 한국 감리교 신학의 특징이 '토착화 신학'이다.

약함의 진리
‘예수의 죽음’| 이현주, 샨티, 2003.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오직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를 구원시키려 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위와 같이 고백하지만 실상 이 고백은 온전하지 않다. 예수의 죽음 또한 그의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죽게 되었는가? 그의 삶이 어떠하였길래 많은 이들의 조롱과 핍박 속에서 잔인한 십자가의 형벌로써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태초부터 말씀이었다. 그의 삶 속에서 말은 곧 힘이요 능력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죽은 자는 살게 되고, 병든 자는 치유되었으며, 물질에 매여 살던 이가 인간을 구원하는 이로 변화되어 갔다.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고, 그 말은 곧 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말을 멈추었다. 말은 그의 상념 속에서 되내어질 뿐 결코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예수가 빌라도의 심문을 받을 때에 말을 사용했다면 끔찍한 형벌의 잔이 옮겨졌을 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받을 때 자신을 조롱하던 이들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왔더라면 그는 진짜 유대인의 왕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길을 알고 있었고 그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말이 필요할 때는 말로 행동이 필요할 때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그는 침묵 속에서 마지막 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침묵이 무기력해보이고 우스워 보일지 모른다. 그의 잠잠한 약함이 더욱 비천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구원이 있었고 그의 약함 뒤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배신, 그것은 강함의 배신과 약함의 배신이었다, 구원은 약함 속에 있다. 절대로 강한 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유다의 마지막은 자신의 강함으로 인한 이끌림이었다. 그의 강함이 오히려 측은 하기는 하지만 강함 속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약함 때문에 배신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때 예수는 “약한 사람이 나갑니다. 보살피소서” 라고 기도해 준다. 그의 약함이 비록 자신을 배신으로 이끌었지만, 그 약함 뒤에서 기도하는 예수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구원 받은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 약함을 보듬어주는 사랑. 그 사랑은 예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여 지며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의 무지를 하나님께 아뢰며 용서를 구하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숫자에 의해 변해가는 세상의 논리는 예수를 죽이는 논리이다.”
기독교의 교리라는 것이 숫자에 의한 교리가 아니라 예수에 의한 교리였으면 좋겠다. 그 교리대로 움직이고 살아갈 때에 많은 이들에게 겉치레의 부담과 거북스러움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회개와 행동의 변화로써 이루어지는, 또 사회 자체를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진정한 예수의 삶이 살아지는 그런 교리였으면 좋겠다.
예수의 죽음은 숫자의 논리를 뒤집는 계기이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생애가 모든 사람의 생애가 되며 한 사람의 약함이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었다. 지금 아무리 큰 숫자가 내 앞에 있을 지라도 내가 아무리 약한 숫자 일지라도 나의 모습 속에 약함의 진리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 약함은 강함을 이겨내며 더러운 큰 수를 정화 시킬 것이다. 물론 진리를 갖추기 위한 노력과 실천의 모습이 뒤따라야 할 것이고 그 삶의 자세는 약함의 자세이자 상황에 맞게 삶의 모습들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마지막에 침묵에 이른 예수의 삶으로 살아가는 자세일 것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제천에서 끔찍한 화재사고가 발생하여 스물아홉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유가족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함께 아파하는 이 나라의 백성들과도 함께 하여 주십시오. 보다 안전한 나라, 보다 상식적인 나라, 보다 배려하는 나라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허망하게 생명을 잃는 일이 없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