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송전교회를 끝으로 안식년 교회기행을 마칩니다

by 좋은만남 posted Sep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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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고난함께' 사무국장인 황인근 목사의 부친상 부고가 전해졌다. 토요일 오전 열 시에 빈소인 원주 기독병원으로 출발했다. 아쉬운 마음에 오토바이를 끌고 나섰다. 장례식장을 찾는 마음은 항상 무겁다. 고인의 가족이 느낄 슬픔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생의 허무함 앞에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길지 않은 인생인데 과연 아쉬움 없이 잘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항상 대답은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인생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역시 이 질문도 피할 수 없다. 아직 이 질문에 대답하기엔 남은 시간이 많은 탓일까?

두 시간을 달려 3번 국도의 곤지암 휴게소에 멈추어 엔진을 30분간 식히고 다시 달린다. 또 두 시간 가까이 달려 원주 기독병원에 도착하여 문상을 했다. 주일이 끼는 바람에 4일장이 돼서 그런지 황 목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역시 남은 자의 몫이다. 나에게도 그 몫이 떨어질 날이 머지 않았을 것이다.

 

문상을 마치고 이상민 전도사가 목회하는 충주의 송전교회로 향했다. 이상민 전도사는 황인근 목사와 같은 원주제일교회 출신으로 어린 시절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살기도 했단다. 상중에 이 전도사가 병원에 자주 들러 조문객 대접을 많이 도왔는데 주일을 앞두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따라 들어가기로 했다. 이상민 전도사가 목회하는 모습이 항상 궁금했다.

그는 목회를 하기 전에 창원 외국인 노동자센터에서인가 일을 했었다. 사회운동 경험도 있는 그는 소위 젊은 운동권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기대주이다. 그래서 더욱 그의 목회하는 모습, 그가 있는 교회를 가 보고 싶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맡아보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정리도 잘 안돼서 학창시절 써클룸에 있는 기분도 든다. 대접도 말할 수 없이 소홀하다. 그러나 옛 생각이 나서 그런지, 안주인이 없어서 그런지 마음은 편안하다. 밤 늦은 시각에 들어갔지만 농촌목회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이미 할아버지 한 분이 교회에 와 계시다고 한다. 주일 아침이면 일찍 오셔서 성서를 보신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신지 이제 5개월밖에 안 되셨다고 한다. 중풍을 맞았는데 그리 심하신 것 같지는 않다. 이 할아버지는 밤이고 새벽이고 없이 교회로 찾아오셔서 어디를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고 한다. 병원에 가실 때도 그렇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저수지 물이 얼마나 찼는지 궁금해서 보러 가자고 하시기도 한단다. 주책 아니면 이 전도사에게 가족과 같은 감정을 느끼시는 것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10시 반이 조금 넘어 예배당에 갔다. 할머니 한 분이 더 와 계신다. 이 할머니는 서울에서 사시다가 요양차 20년 전에 내려오셨단다. 이 전도사 부임과 비슷한 때에 교회에 나오셨다고 하니 교회에서는 가장 고참 교인이시다. 공기 나쁜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산으로 다니면서 나물이며 약초를 태시면서 사는 삶이 좋았는데 건강이 좋지 않으신지 앞으로 10년도 더 못 살 것 같다고 하신다.

열한 시가 되어 예배를 시작하였다. 멋진 강대상은 그냥 장식용이다. 장식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게 위압적이다. 차라리 치우고 그렇게 둘러 앉아 예배하는 구조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 가운데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 둘러 예배를 드린다.

눈이 안 보여서 찬송가와 성서를 못 보시는 할머니, 글은 아시지만 교회에 나오신지 얼마 안 돼 찬송가를 잘 모르시는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예배지만 나름대로 마음이 포근하다. 이상민 전도사가 일일이 찬송가를 찾아드리며 기타 반주를 하고 함께 찬송을 부른다. 예배 중간에 비교적 젊은(50대 중후반이 시골에서는 확실히 젊은 축이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이 들어와 앉는다. 여성 한 분이 더 계시다고 하는데 오늘 고구마 캐는 일 품을 팔러 가셨다고 한다.

설교는 역시 예상대로 문답식 혹은 대화식이다. 할아버지는 인생 경험이 많아서인지 전도사와 더불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그래도 어느 누구 하나 불편해 하지 않는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예배당에 앉아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이것이 처음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말씀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오늘도 축복기도의 권리를 가진 합법적인(?) 목사로 축도를 부탁 받고 축도를 하였다. 조화순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송전교회와 성도들, 이상민 전도사에게 정말 축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축도를 했다.      

 

예배를 마치고는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교회에 나오거나 믿음을 가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라 그런지 다들 교회에 오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마을에 병이 깊어진 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이웃과의 불편한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목회자에게 질문을 한다. 그래도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서 그런지 다들 순박하시다. 그 순박함에 마음이 끌리며 다시 한 번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상민 전도사는 아직 꼬박 1년 반을 더 목회해야 안수를 받게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마을이라는 큰 장을 교회로 생각하고 목회한단다. 대부분 건강에 문제가 있고 노인들뿐인데다 젊은이들은 다 떠나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여남은 명 있던 아이들도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도시로 나갔다. 이제 여자 아이들과 어린 아이들이 몇 있지만 교회 예배에는 잘 안 나온다. 가끔 피아노를 치러 올 뿐이다. 몇 년 뒷면 인근 초등학교도 폐교가 될 처지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10년이면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도 얼마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참 상황이 안 좋다. 그런 곳이지만 이상민 전도사는 지역목회라는 목표를 실천할 수 있는 실험대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 밖에 없던 교인을 다섯 명으로 만들었지만 그에게 있어 얼마나 많은 마을 사람들을 교회로 나오게 하고 등록을 시키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마을에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물론 패기만으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절망하는 것보다는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것은 과연 그처럼 패기 있고 희망 있는 젊은 목회자들을 감리교회, 한국교회가 품고 그 꿈을 향해 날개를 펼치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결국 이상민 전도사 같은 젊은 목회자들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겠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이겠다.

문상 가서 차흥도 목사님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는데 농촌이 살아야 생명이 산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많이 공감했다. 도시가 아무리 발달해도 도시에서 나는 것으로 사람이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 팔아도 그것을 씹어 먹고 살지는 못한다. 요즘 곡물가격 폭등하는 것을 보면 식량은 이미 무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은 생명목회의 시작일 것이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겠지만 이상민 전도사와 송전교회가 생명교회, 생명목회, 생명농촌을 만드는 작은 노력들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며 물론 귀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