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거기까지만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이번에 북한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보내는 사업을 진행하는 ‘함께 나누는 세상’에서 사업논의를 하기 위해 개성에 들어가는데 사무총장 한인철 교수, 남북평화재단 김영주 상임이사와 함께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딱히 한 일은 없지만 통일, 통일 타령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이 어느덧 15년이나 됐는데 이제야 북한 땅을 밟아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통일 단체에 있는 이들은 벌써 두어 번씩 평양이며 개성, 금강산까지 다녀왔지만 번번이 따라나서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다녀오게 된 것이다.
북쪽에 간다니까 출경절차가 꽤 딱딱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남북관계가 많이 경색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랬는지(내 생각에는) 남측 사무소(CIQ)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했다. (타고 가기로 한 승용차 내부에 열쇠를 넣고 문을 잠그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해 하마터면 출경시간을 맞추지 못할뻔 하였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도와주어 마지막으로나마 출경할 수 있었다. 조금씩 정부가 대북사업을 풀어주어서인지 북으로 가는 차량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개성공단으로 들어가는 건축자재나 생산원료이겠지만 화물차도 많았고 승용차도 많았다. 북미관계가 급속도로 진행되니까 남한 정부가 남북관계에서 소외될 것을 우려했다는 평론이 많던데 그래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긴 차량의 행렬에 섞여 개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비무장지대 각각 2Km, 도합 4Km 정도였다.(아마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 비무장 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북한측 CIQ 가 있었다. 북한측의 입경절차가 오히려 좀 까다로웠다. 통행증을 확인하는 체격 좋은 군인의 태도는 좀 어설프기는 했지만 고압적이었다. 그래도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북한 입경이 처음인지라 무슨 서류를 보여줘야 할 지 몰라 약간 헤맸는데 나이 든 세관원이 너무 꼼꼼하게 체크하여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이 던져지기도 했다.
그렇게 북한 입경절차를 마치고 우리를 마중 나온 북한 민화협 인사 두 명과 만났다. 인상이 참 좋았다. 미소가 여유있고 부드러운 조금 젊은 축의 남자와 체격이 작지만 나이는 더 들어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봐왔던 북한사람과도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내가 본 북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고작 군이들 몇과 텔레비전에서 본 게 다인데!
다시 한 번 놀란 것은 개성이 무척 가깝다는 것이다. 눈발이 조금씩 날리는 길을 5분이나 달렸나? 회담장소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그것도 북한의 주요 도시라는 개성이 있다니, 이필완 목사님 고향이 개성이라던데, 이렇게 가까운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다. 우리 아버지도 황해도 연백에 살다가 개성에 99칸짜리 집을 사서 이사 오려다가 전쟁이 나는 통에 못가셨다고 하던데 바로 그런 개성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거리는 가까운데 마음의 거리는 왜 그렇게도 멀기만 한지!
개성은, 엄밀하게 말하면 개성공단인데 개성공단은 남한의 여느 공단지역 풍경과 다르지 않다. 최근에 조성된 공단이라 건물이 현대식이라는 것이 다를 뿐 남한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공단 둘레를 빙둘러 철망 펜스가 둘려있다는 것이다. 가는 길에 하얀 눈을 이고 앉은 북한의 일반 주택도 가끔 보였는데 7-80년대 시골에서 볼 수 있던 블록벽체에 슬레이트 지붕집 같았고 그걸 보는 내 마음이 좀 아릿해졌다.
‘함께 나누는 세상’ 협의가 경제협력협의사무소 4층(북측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남한에서 출경할 때 요즘 남한사람을 대하는 북한당국의 태도가 눈에 보이게 친절해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인지 시종일관 부드러운 분위기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자세한 논의 내용은 ‘함께 나누는 세상’ 홈페이지를 참조하시라!
협의가 그럭저럭 끝나고 개성공단 내 북한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간판이 없어 식당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들어가니 이미 남한에서 온 여러 팀이 자리를 잡았다. 실내는 약간 썰렁했다. 난방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음식이 코스별로 몇 가지가 나왔다. 생선살튀김, 돼지발족(우리는 족발이라고 하는데 그네들은 발족이라고 한다), 닭고기 훈제구이, 삶은 조개 등등이 나왔고 마지막으로 개별적으로 주문한 냉면이나 토장국밥, 만둣국 등이 나왔다. 냉면은 남쪽에서 먹는 것과는 다르게 육수가 담백했고(조미료를 벌로 안 쓰는 것 같았다) 면발이 미끌미끌했다. 그래도 개성에서 먹는 냉면의 맛이라니 기분으로 느끼는 맛은 최고다.
식사를 하면서 사업 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북한 사람들은 경제사정은 어렵지만 자존심은 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민족과 동포를 위한 지원과 협력이라는 생각을 해서인지 비굴하지 않았다. 자녀들 이야기도 하고 결혼 적령기, 남북의 언어차이도 이야기 했다. 남한에서 우스갯소리로 종종 말하는 불알(전구) 이야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사투리 중 하나일 것이라고 일축했다. 남한에서는 북한이 한자어를 과도하게 우리말로 바꾸어 쓰고 있는 줄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미 입에 굳어진 단어까지 바꾸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역시나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대부분 그렇듯이 쇼타임이 진행되었다. 캄보디아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인삼식당인가 하는 북한식당이 있었다. 거기에서는 서빙을 하던 아가씨들(북에서 ‘아가씨’라는 표현은 모욕적이지는 않지만 소설에서나 나오는 표현일뿐 실생활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란다, 대부분 접대원 동무나 의례원 동무라고 부른단다)이 갑자기 무대로 뛰어 올라가 노래와 춤을 선보였었는데 여기도 그렇게 운영한다. 이 동무들은 김 장군님을 찬양하는 노래도 부르고 생소한 북한 노래들도 불렀지만 남한의 서유석씨가 불렀던 ‘홀로아리랑’과 몇 가지 익숙한 노래들도 불러 박수를 받았다. 어떤 손님이 ‘아내의 노래’를 신청했는데 ‘당신은 나의 길동무’ 뭐 이렇게 끝나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아까의 건물로 돌아가 차 한잔씩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아까의 길을 되짚어 남한으로 입경하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이다. 항상 맨 처음은 유별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역시 물리적 거리는 가까운데 마음의 거리는 멀고 멀었다. 문제는 그동안 단절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주입한 선입견이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자, 공산당, 빨갱이,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은 집단, 가난뱅이 등등등. 그렇지만 만나서 한나절만 같이 보내도 그 거리는 반정도 줄어들고 선입견도 반 정도 무너지는 것 같다. 역시 중요한 것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만나면 풀린다.
북한은 남한에게 개성공단을 위해 100만평을 약속했지만 현재는 20만평밖에 개방이 안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기숙사란다. 입주한 공장들은 더 많은 북한 노동자를 원하지만 남한 정부는 이미 약속한 기숙사를 짓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노동자가 추가로 들어오지 못하니 개성공단도 확대되지 못하고 있고 부지도 그대로라고 한다. 한창 때에 비하면 지금 개성은 거의 텅 빈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한다. 그나마 요즘 들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단다. 내가 가서 본 북한의 개성은, 남한 땅에 자리 잡은 미군부대가 샌프란시스코의 번지수를 사용하는 것처럼, 북한이라고 하기보다는 남한의 공장지역을 옮겨 놓은 것에 가깝지만 제한적으로마나 남과 북이 만날 수 있는 공간, 화해의 자리였다. 새 세대의 통일과 화해를 위한 축복의 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곳에 다녀올 수 있었던 체험이 내겐 은혜이고 감사의 조건이다.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만 있다면 ‘통일은 이미 됐다’는 고 문익환 목사님의 선포는 현실이 될 것이다.
그날 함께 만난 북한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내내 ‘일없다’고 대답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괜찮다, 문제없다’는 말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어렵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그들은 ‘일없다’를 반복했다. 통일도 일없었으면 좋겠다.